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01)
****************************************************
[ 책 먹는 배우님 – 101화. >101.
주연 배우가 바뀌면, 작품의 향이 바뀐다.
뭐, 당연한 소리지만.
이런 것들까지 포괄적으로 수치화 된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적인데.
어느덧 할리우드에 도착한지도 나흘.
존 미켈과 있었던 첫 일정의 트레블은 빠르게 잊혀졌다.
뭐, 그럴 수 밖에.
촬영 중이던 배우가 중간에 교체되는 일도 허다하니, 영화의 땅 할리우드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일 것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티에 위치한, 마틴의 뮤직 스튜디오.
그곳에서 나는 조연출에게 새 스크립트를 받아들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영화 [아다지오>의 이름과 하이마운트의 로고가 박힌 새 대본.
속은 그대로고, 스크립트 프린팅만 조셉과 함께 찍은 스틸 이미지 컷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문제.
“아아, 네.”
“… 그런데,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여요. 재희.”
대본을 받아들자마자 내가 조금 당황했기 때문일까, 조연출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고.
나는 괜찮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새 대본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고마워요.”
“그렇다면.”
조연출이 넉살좋게 웃으며 스튜디오를 빠져나가고, 나는 다시 대본을 바라보았다.
내가 대본을 받고 순간, 당황했던 이유.
[73/100] (+17)숫자가 변했다.
왜 그럴까.
“….”
뭐, 아무리 고민해봐야 이유는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수치만 보자면, 존 미켈에게 부족했던 부분을 조셉이 메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조셉의 등장에 따라 덩달아 내 부담감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높은 성적과 완성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받은 스크립트에 기대감을 나타내는 사람은, 이 중에서 나뿐만이 아니었다.
“스크립트에 조셉 표정 좀 봐.”
스크립트와 동시에 바뀐 확 변해버린 분위기에, 영미 씨가 감탄했다.
“조셉이야 말할 것 없는, 할리우드 스타니까요.”
“그럼요. 연기파 배우죠.”
존 미켈의 아름답고 탄력적인 외모가 주를 이루던 이전 대본과 달리, 대본 겉면에 프린팅 된 조셉이 구현한 주인공 ‘조’의 매력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할리우드에서 이미 수년 간 자신의 커리어를 구축한 그는, 감성적인 눈빛 하나로 영화의 분위기를 나타내버린다.
그리고 나는, 그 옆에서 기타를 들고 유쾌하게 웃고 있고.
“재희 표정도 봐요! 꺄하하!”
스크립트를 둘러보며 곁에 앉아있던 샘, 행거, 아리아나가 말했다.
“재희는 이렇게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린단 말이야?”
“맞아. 난 런던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다고. 재희는 진지한 얼굴보다 이렇게 유쾌한 느낌이 좋아.”
샘, 행거, 아리아나.
할리우드 도착과 동시에 너무 다사다난한 일이 벌어져 잠시 잊고 있었지만, 런던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인연들과 이번 영화에서 재회했다.
‘이들은 어때요?’
내가 넌지시 물었고.
엘라니 오코너가 냉큼 추천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그만 단역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극 중 밴드 [아다지오>를 따라다니며 매니저 및 코러스 역할을 자처하는 감초. ‘런던 트리오’ 역할로.
런던 버스킹 동영상이 화제를 일으킨 이후, 인지도를 확 끌어올린 이들은, 웨스트엔드 인근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연극 [리어왕>에 출연했다고 한다.
이름 있는 배역은 아니고, 광대 뒤에서 노래하는 코러스로.
그렇게 서서히 자리 잡기를 몇 달. 최근에는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컴퍼니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지며 적당한 배역을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하던 음악의 천사들이, 한 순간에 뛰어올랐다.
행거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영화에 함께 출연하다니! 이게 다 재희 덕분이야. 뮤지컬 배우로 자리를 잡을뿐더러, 영화 촬영차 미국엘 다 와보다니! 무려 할리우드야!”
“재희, 우리를 잊지 않고 챙겨줘서 고마워요”
이들은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 부끄럽다고요.
“그만 얘기해도 되요. 제가 더 고마우니까.”
그래.
이들 덕분에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이, 보다 ‘특별한’ 내 할리우드 행을 부추겼음은 틀림없다. 이들과의 버스킹 공연이 엘라니 오코너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리고.
“저는 별로 놀랍지도 않아요. 오히려, 믿고 있었죠. 이렇게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이들은 내가 아니었어도 언젠가 반드시 빛을 보았을 거다. 그건, 장담할 수 있다.
“으음, 고마워요 재희.”
분위기가 간질간질 거린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 너무 싫단 말이야.
그 때, 합주실 안으로 엘라니 오코너가 들어왔다.
“오, 엘라니.”
등장과 동시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그녀가 나를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분위기 좋은데요? 하지만, 연습실 분위기가 더 좋았으면 좋겠네요.”
내가 웃으며 화답했다.
“물론이죠.”
“자신만만한데요? 좋아요. 각오해요. 그럼, 오늘 연습을 시작해 볼 까요?”
*
영화 [아다지오>에는 총, 열 세 곡의 노래가 들어간다.
보컬이 가미된 곡이 총 여섯 곡이고. 나머지는 BGM으로 쓰이는 곡들이지만, 모두 엘라니 오코너가 만들었다.
메인 타이틀곡이자 영화의 엔딩 곡인 [Sweat, Adagio>라는 곡은 조셉이 부른다.
잃어버렸던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으며, 아주 아름답게 노래하는 장면.
다른 한 곡은 여성 보컬이 부르고, 나머지 네 곡은 모두.
“….”
내가 부른다.
[Railway sing>, [Drawing drive> [Alone House>, [Stay with You>드러머도 노래하고, 키보더도 노래하고 베이시스트도 모두 함께 즐기는 밴드 음악이기에, 따지고 보면 모두 다 같이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메인’ 보컬은 나다.
“부담이 장난 아니겠어요.”
“…..”
정말로.
부담이 장난 아니다.
“재희 파이팅!”
나는 크게 숨을 골라 쉰 뒤, 합주실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재익이 형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주고는 한 쪽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을 조절했다.
엘라니가 내게 물었다.
“준비 되었어요 재희?”
“그럼요.”
“요 며칠 간, 세션과 호흡을 맞추는 연습은 충분한 것 같으니 이번에는 원곡 템포로 연습해볼게요. 어때요?”
원곡이라, 아무 상관없다고.
“좋아요.”
내 말에 엘라니가 힘차게 주문했다.
“제이크! 사정없이 두드려줘요!”
드러머 역할을 맡은 제이크 라는 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후우, 긴장되는데.
엘라니 오코너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시작할게요!”
“오케이!”
엘라니의 외침과 동시에 주변이 고요해진다.
그리고 들려오는.
탁, 탁, 탁, 탁.
제이크의 드럼스틱 두드리는 소리. 시원한 심벌을 시작으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엘라니 오코너의 음악들이 내 귀를 가득 메운다.
엘라니 오코너가 만들고.
폴 안토니 감독이 보여주고.
내가 표현해내는 음악들.
이 음악 주는 떨림을 따라, 눈을 감았다.
발이 박자를 쫓아 움직일 만큼 유쾌하고, 가끔은 감미롭고. 가끔은 눈물이 날 만큼 애절한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멜로디 라인을 따라,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노래가사를 따라.
한 음절, 한 음절 아주 천천히 쫓아 걸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어요.
But it’s in the distance. 하지만 너무 멀리 있죠.
느릿한 드럼.
공간을 울리는 베이스.
적절한 타이밍에 팅! 팅! 터져 나오는 건반.
그리고.
I`ve been down this road before. 이 길을 걸어본 적 있어요.
The way walked last year. 작년에 걸었던 길이죠.
내가 눈을 번쩍 떴다.
“…..”
쏴아아아-!
눈을 뜨자, 쾌적한 녹음실에서 퀘퀘한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흠뻑 젖어있는 무대로 바뀌었다.
강렬한 밴드사운드는 앰프를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무관심한 얼굴로 객석에 앉아 술을 마신다.
작은 펍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작은 울림.
합주 실에서 아주 천천히 합을 맞춰가던 배우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렇게나 매력적인 아티스트들로 변모했다.
무대 한 귀퉁이에는.
“퍽! 퍽!”
아주 작은 목소리로 흥분한 듯 건반을 두드리는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키보더가 앉아있고.
내 옆에는, 내 입 모양을 따라 함께 노래하며, 가난한 세월 따위는 잊은 채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표정을 짓는 베이시스트가 서 있고.
무대 뒤에서 펍을 가득 채우는 박자를 만들어가는 드러머는 아웃사이더이던 예전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
“이야야야야야!”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무대를 즐긴다.
그리고 나는.
But, Tomorrow will be different. 하지만 내일은 다를 거야.
If you and I can be together. 너와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면.
무명의 설움을 경쾌한 음악 뒤에 숨겨, 마음껏 소리쳤다.
Let’s leave together, Railway sing! 함께 떠나자. Railway sing
고요속의 외침.
펍의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하지만 말 못하는 음악 천재 조셉은, 복잡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조의 꿈을 대변하는 우리들.
밴드 아다지오!
그 때, 샘, 행거, 아리아나 ‘런던 트리오’가 앞으로 나오며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와!”
“최고다!”
술에 잔뜩 취하고- 노래에 잔뜩 취하고- 우리들이 내뿜는 분위기에 취한 그들은 펍의 가장 전면으로 튀어나와 조셉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함께 환호하고 춤을 추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반전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Railway Sing>.노래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의 대부분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 신난다!
이렇게 신나는 순간이 있을 수가!
내가 고개를 휙, 돌리자 카메라 앵글이 빠르게 돌아가며 어느 새 무대 위에 서 있는 조셉.
조셉은 기타를 매고 내 옆에 섰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기타를 연주했고, 분위기는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환호하는 사람들.
짧지만 모두가 하나가 된 기적이 끝나자, 터져 나오는 사인.
– Okay!
사인과 동시에 나와 조셉이 하이파이브를 쳤다.
짝!
그리고 드러머, 베이시스트, 키보더가 달려와 나와 조셉을 끌어안았다.
이 분위기에 기름을 붓듯, 폴 안토니 감독이 펍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최고였어요! 최고! 됐어! 됐다고!”
그리고 감독을 뒤 따라, 엘라니 오코너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쇼팽과 사랑에 빠진 클래식 연주자 같은 나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표정이 애매한데?
“별로였나요?”
“….”
내 질문에, 그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표정을 급변시키며, 양 손을 위로 번쩍 들며 소리쳤다.
“내가 줄 수만 있다면, 이건 그래미 감이야!”
“…. 아.”
노래가 끝나고 시험 성적을 기다리던 아이처럼 무대 위에 서 있던 우리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음악 영화에 음악이 좋다는 것.
이미 절반은 해낸 것이나 다름 없잖아.
“이 기세로 쭉쭉 가자고요!”
쌀쌀한 추위도 모두 사라지고, 따스한 햇살만 가득한 5월의 LA.
영화 [아다지오>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의 내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101화. > 끝ⓒ 맛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