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05)
105.
세상 모든 일들이 ‘운’ 하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실력’ 하나로 돌아가느냐?
그것도 아니다.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를 이리저리 잘 옮겨 타며, 본인 스스로가 ‘최상의 패’를 잡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톱니에 찍혀 아웃될 것이고.
너무 바삐 움직이려 해도 넘어지는 것이 일상다반사.
모든 일에는 정해진 템포와, 순서가 있다.
하물며, 이 바닥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톱니에 찍혀 한 놈이 미끄러지면- 그 만큼 올라가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L&K에서는 [게라드 쇼>에 출연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히 ‘기대 반’, ‘우려 반’을 표했다.
우선, ‘기대 반’
애초에 캘리포니아 지역방송 KAN의 [니콜라스 인터뷰>까지 섭외했던 이유는, 전미 방송에 나를 태워 올릴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런데, 곧 바로 연락이 왔다.
“미쳤어요! [게라드 쇼>라니! 미국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토크 쇼라고요!”
“이거,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냐?”
이럴 수가!
[게라드 쇼> 라니!공영 방송 ABS의 프라이데이 나잇을 장식하는 황금 프로그램이다.
돈 주고도 나가지 못하는 방송에서 나를 찾다니!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우려 반’이 나올 수밖에.
‘하차’로 마무리 짓고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려 했던, 할리우드의 더러운 치부를 들추려는 일이니까.
어쩌면, 난 ‘피해자’를 연기해야한다.
이건, 단순한 ‘도재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적당히 하차로 마무리 지으려했던, 하이마운트도 문제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일전에 내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달했던 하이마운트의 이사 ‘케빈.’
그가 내 트레일러를 찾았다.
“오셨어요?”
“재희, 오랜만이네요. 미안해요. 진즉에 한 번 촬영장에 들르려고 했는데, 이제야 오게 되네요.”
“바쁘실 테니까요.”
“뭐, 그런 셈이죠.”
자, 간단한 안부 인사가 오갔다.
나는 케빈이 이 시점에 나를 찾은 이유에 대해 정확히 캐치하고 있다.
그 역시, 굳이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제가 재희를 찾은 이유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게라드 쇼>에서 온 제의. 분명, 재희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아요. 할리우드에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죠.”
케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저희를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는 말입니다. 재희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
“나는 재희가 당당해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호라.
“잘못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모든 일은 공정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만약, [게라드 쇼>에서 내가 겪은 더러운 이야기를 꺼낸다고 하더라도, 하이마운트 측에 똥물이 튈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는 얘기다.
거기다.
“난 오히려 존 미켈의 반응에 크게 실망하고 있어요. 뒤에서 우리 얘기를 안 좋게 하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존 미켈은 뒤에서 나에 대해 악 소문을 퍼뜨리고 여전히 주변 배우들에게 비하를 하고. 하이마운트가 배신했다느니,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내 팬들의 미국 방문 역시, 기사로 접한 존 미켈은.
“….”
말도 말자.
어떤 쓰레기 같은 말을 떠들고 다녔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케빈은 피해자를 연기할 필요 없이 내가 당당해져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난 오히려, 재희가 소신 있게 토크쇼를 밀어 붙였으면 좋겠어요.”
“그거, 정말인가요?”
“물론, 재희의 에이전시가 허락을 한다면. 껄껄”
그래.
모든 선택은 나로부터.
그리고 그 책임도 내가 진다.
패널티가 있으면, 보상도 큰 법이다.
모든 일은 이렇게 시작되고.
“좋아요 케빈.”
나는, 한 계단 더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
[게라드 쇼!>ABS에서 제작하는 프라이데이 나잇을 장식하는 미국에서 가장 시원시원한 생방송 토크쇼.
이 토크쇼에 출연하는 출연자들은, 대게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혹은 제작자들.
출연 시에 나누는 대화는 통상적인 인터뷰가 아니다.
이를테면, 논란을 일으킨 뒤 공백기를 가진 스타가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으며 복귀하거나.
중년의 배우가 살아오며 쌓은 필모그래피를 돌아보거나.
할리우드라는 꽃밭 뒤에 숨겨져 있던 더러운 논란을 해명하는 에피소드가 다수다.
‘홍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거리가 먼 프로그램이지만, 역으로 시선집중이 높기 때문에 홍보라는 부가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도약한 배우들이 아주 많다.
또, 그만큼 고꾸라진 배우들도 아주 많다.
“내가 회사 통해서 많이 알아봤거든.”
재익이 형은 인근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ABS 스튜디오에 도착한 뒤,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이 프로그램. 잘만하면 잭팟이야. 게라드라는 그 양반, 할리우드에 인맥이 장난이 아니더라고.”
자, 이런 프로그램의 도움 따위 없이 온전히 실력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면 좋지.
하지만, 나는 효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영화 [아다지오>가 개봉하고, 반응을 살펴보고, 또 다음 차기작을 기다리기 까지 걸리는 시간들.
이걸, 감내하며 몇 년이고 기다릴 것이냐.
아니면.
“이번에 안면 터놓으면 동아줄 하나 제대로 쥐는 셈이야.”
“….”
보다 많이 뛰어서, 그 시기를 앞당길 것이냐.
내 선택은, 당연히 후자다.
위험이 있다고?
위험 없는 삶은 없고, 나는 이제껏 동일한 선택을 해왔다.
우리는 짙은 갈색의 10층 정도 되는 건물인 ABS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에이전트 빌은 익숙하다는 듯 앞장서 걸었고 본관 지하에 위치한 [게라드 쇼> 녹화 대기실로 안내해주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되요. 아, 조셉은 바로 옆방에 있습니다.”
“감사해요.”
나는 조셉과 함께 출연한다.
잠시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자, 연출 인 이어를 낀 크루와 작가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오더니 내게 대본을 건네주며 프로그램 녹화 순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며칠전 진행한 사전 인터뷰로 이미 간략한 대본은 만들어둔 상태.
방청객 없이 리허설을 러프하게 진행하며, 리허설 때 길어지는 대사는 잘라내는 첨삭 과정을 한번 거칠 예정이다.
그리고 방청객이 입장하고, 대기시간을 거쳐 본 방송에 들어간다.
규모만 커졌지, 한국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시스템.
크루들은 이 방송이 ‘생방송’ 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고지시켰다.
입 조심. 말조심.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차라리 카메라 빨간 불이 돌지 않는 타이밍에 맞춰, 대본을 한 번 보고 깔끔하게 말을 이으라는 지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해했어요.”
다 안다고요. 이 양반들아.
크루들이 대기실을 빠져 나가고, 재익이 형이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반듯하게 제작되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쪽 대본을 들어올렸다.
[흡수하시겠습니까?]당연하지.
*
녹화가 시작되었다.
“지상 최대의 거침없는 할리우드 이야기! [게라드 쇼!>가 이번 주에도 찾아왔습니다! 한 주간 안녕하셨는지!”
“와아-!”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
그는, 백발이 성성한 60대지만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강인한 전사 같아보였다.
마이크를 꽉 움켜쥐고 이를 으르렁 거리며,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오늘 모실 손님들은, 지난주에 예고 드린 대로 두 명입니다. 먼저, 처음으로 모실 손님은 이미 저희 쇼를 거쳐 간 스타입니다. 본인이 제작한 영화 홍보 차 나왔다가, 뜬금없이 폴 안토니 감독의 차기작에 탑승한 조셉 이든 캣맨!”
이미, [게라드 쇼>에 한번 출연한 경험이 있는 조셉에게 뜨거운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게라드! 오랜만입니다!”
“어서 와요. 우리는 항상 당신을 기다렸다고!”
“정말요?”
“그럼! 절대 다른 사람이 만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 것처럼 굴어놓고 그새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으니까!”
나는 무대 사이드 스테이지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프론트 스테이지에서 움직이고 있는 녹화용 달리 카메라들을 주시했다.
이미, 익숙한 녹화장이다.
물론, 수많은 시상식을 겪으며 생방송도 경험해보았다.
콘티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방송계에서 흔히 쓰이는 콘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ENG콘티냐, 녹화 콘티냐.
ENG콘티는 야외 촬영 용 콘티로 카메라 샷 사이즈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되어있지 않다.
그에 반해, 녹화 콘티는.
‘원’
‘이번에는 투’
‘다음 컷은 쓰리 카메라.’
원,투,쓰리,포. 수많은 카메라들.
정해진 대본에 맞춰, 풀 샷을 쓸지, 조셉의 바스트를 쓸지, 내 타이트 바스트를 쓸지 등에 대해 모든 샷 사이즈와 순서가 기입되어 있다.
이를 통해 녹화(저장)를 하느냐, 생중계를 하느냐.
틀은 똑같다.
빨간 불이 들어오는 카메라가 부조정실 메인에 걸리고, 시청자들에게 보여 지는 카메라다.
내 머릿속에는 이 녹화콘티가 완벽하게 굴러다니고 있고.
이런 생방송이던, 녹화건, 언제 무슨 사이즈의 컷이 들어갈지 정확히 꿰고 있다.
즉, 나는 카메라 순서에 맞춰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연출’도 가능하다.
“조셉! 이번에, 함께 온 친구가 있다고요?”
“맞아요. 한국에서 온 친굽니다.”
“누군지 우리가 맞춰볼 수 있게 간략하게 소개 좀 해주시죠.”
“음, 이미 그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이룬 탑스타에요. 처음 그를 만난 것은, 2019년 1월. 선댄스 영화제였죠. 힌트를 드리자면, 선댄스에서 월드시네마 드라마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 주연 배우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짧은 시간동안 매우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아주 젊고 유능한 친구죠.”
“그래요? 무슨 관계입니까?”
“친구.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내 영화에 사로잡고 싶은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하죠.”
‘다음은, 객석 카메라.’
내가 예상한 정확한 타이밍에 객석을 비추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누구지?’
‘선댄스?’
웅성거리는 장면의 연출이 끝나고, 다시 풀 샷으로 변한 뒤. 빠르게 게라드의 바스트 컷으로 바뀌었다.
“오호라. 저는 누군지 알 것 같은데요. 이 늙은이의 정보망을 피해갈 수 있는 배우는 없어요. 어디한번 제가 짐작해보죠. 혹시, 지금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아닙니까?”
능청스러운 게라드의 연기에 조셉이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네, 맞아요. 영화 홍보 목적으로 나온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조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오케이. 더 이상 시간 끌다가는, 관객들에게 혼나겠군요. 이제 그를 모셔보도록 하죠. 한국에서 온 배우, 재희! 입니다!”
생소한 이름에도, 방청객 알바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을 보내주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플로어를 밟았다.
머리를 포마드로 깔끔하게 말아 올리고, 짙은 자주색 정장에 갈색 로퍼를 신었다.
또각, 또각.
무대를 걷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게라드 쇼>는 동시간대 전미 시청률의 최상단을 달릴뿐더러, 세계적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는 프로그램이다.이곳에 출연하다니.
그리고 지금.
정확한 타이밍에 플로어 매니저가 손을 들어 올리며 쓰리 카메라. 즉, 나를 정면으로 비추는 카메라 상단에 빨간 불이 번쩍였다.
나는 TV를 통해 나를 보고 있을,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한국에서 온 재희 입니다.”
내 이름을 전 세계에 던진 순간이다.
[ 책 먹는 배우님 – 10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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