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08)
108.
동영상 링크를 클릭해보았다.
실로폰으로 연주하는 듯, 동화 속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은 아기자기한 BGM.
그 뒤에 나오는 영상들.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그대로 돌처럼 굳어져, 옅은 탄식만 연발했다.
자리에 함께 앉아있던 설강식 선배님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내가 휴대폰을 선배님께 건네었다.
“응? 재희 너잖아?”
“네.”
동영상 속에 나오는 사람은 ‘나’였다.
[게라드 쇼>에 출연한 내 모습.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담겨있었다.처음에는 팬들이 보낸 영상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내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들은 바로.
오웬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내 영상과 사진을 드라마틱하게 편집하며 나레이션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재희. 보고 있어요? 놀랐어요? 미안합니다.… 놀라다마다.
[이건, 음… 일종의 프러포즈라고 생각해줘요. 이보다 쉽고 빠른 방법도 많이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1분 30여초.
아주 짧게 흘러나오는 동영상.
이들은 내게 함께 영화를 하자는 제의를, 동영상에 담아서 하고 있었다.
[[게라드 쇼>에 나온 당신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문득, 당신이 궁금해졌죠. 이 배우, 도대체 누구야?] [그 뒤로, 당신이 출연한 한국 작품을 찾아봤어요. 정말 손에 땀을 쥘 만큼 흥미진진한 시간들이었죠.]감독 두 명의 얼굴이 나왔다.
“헛”
설강식 선배가 흠칫 놀라는 순간이기도 했다.
동영상 속 장소는, 오웬 감독들의 작업실인 것 같았다.
포근한 베이지색 대리석 바닥. 따뜻한 나무 재질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말했다.
[재희, 일전에 얘기 했던 영화 기억해요? 우리 영화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요.] [세간에 떠도는 우리에 대한 소문은 모두 지워버려요. 이건 오웬과 재희의 이야기입니다.] [독립영화라고 망설여지나요? 이봐요! 걱정 하지 말아요!] [이렇게 까지 말하는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부디, 거절하지 말아줘요.] [입 닥쳐, 오너] [우리와 함께 해 줄래요?]오, 마이 갓!
모두가 다 즐겨보는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한, 그야말로 완벽한 프러포즈!
너무 환상적인 일이다.
설강식 선배님은, 멍하니 동영상을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나 참, 이런 건 또 처음 보는군.”
선배님, 저도 처음 봅니다.
승낙이냐, 거절이냐에 대한 고민은 이미 오웬 형제들을 조우한 그 순간 끝났다.
시나리오를 보지 않았지만, 잠시 나누었던 이야기만 믿고 함께 작업을 시작 할 수 있는 감독들!
“어떻게 할 거야? 할 거야?”
“아마도요.”
나는 이 환상적인 프러포즈에 어떻게 화답할지를 고민했다.
역시, 똑같은 방법이 좋겠지?
*
배우가 감독에게.
감독이 배우에게.
작가가 감독에게. 등등.
‘공식 매체’를 통한 ‘러브 콜’은 흔히 있던 일이다.
하지만.
직접 찍고 편집한 동영상으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러브 콜을 보내는 일은 흔치 않다.
영화 속 세상을 그렇게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감독들이, 어떻게 이런 아기자기한 영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내게 아주 큰 선물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오웬 감독이 내게 보낸 공식 프러포즈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금사자상의 오웬 감독.
[게라드 쇼>에서 일침을 날린 한국 배우.이 둘의 조합이 어떨지에 대해 떠도는 갖가지 무성한 소문들.
‘미친! 한국 배우가 오웬의 영화에 출연하다니!’
한국이 주목하고.
‘그 한국인 배우? 그를 위해서 오웬 감독들이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야?’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동시에 전 세계 영화계가 주목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일들은 너무 스케일 큰 이야기라 감흥이 조금 덜하다.
그러니 주변부터 시작하자.
이 소식에 내 주변에서 가장 즐거워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진우 연출이었다.
박진우 연출이 오웬의 동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믿을 수가 없어요. 그들은… 제 우상들이에요.”
어쩐지.
이번, [7년의 기억>을 작업하면서 느꼈는데. 둘의 영화색은 닮은 점이 많다. 여러모로 자극을 받은 것 같은 느낌.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도 배우님은 정말…”
박진우 연출이 연신 감탄했고, 나는 그런 박진우 연출에게 줄 작은 선물이 있다.
“감독님, 그 보다 더 재미있는 소식은 뭔지 아세요?”
“네? 재미있는 소식이요?”
“후후, 놀라 자빠질 모릅니다.”
“그럼, 뜸들이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어서요!”
“코너 오웬 감독님이, 선댄스에서 우리 영화를 봤어요. 바로, [양치기 청년>을.”
내 말에 박진우 연출이 입을 양 손으로 막으며 경악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제 영화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던 가요?”
“하하, 흥미롭게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도저히 신인 감독 같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예쓰! 이럴 수가!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믿지 못하셔도, 모두 사실입니다.”
영화사 [너울>의 사무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박진우 연출은 창문을 활짝 열며 뛸 듯이 기뻐했고, 나는 이 사무실을 찾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실은, 감독님께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네. 어떤 부탁인가요?”
“저도 오웬 감독님들께 답장을 보내고 싶은데… 그걸 감독님이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 답장?”
내 말 뜻을 알아들은 박진우 연출이 환하게 웃었다.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
마치, [양치기 청년>을 찍던 때로 잠시 돌아간 것 같다.
아니지.
박진우 연출이 기자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처음 찍었던.
박진우 감독이 A4용지에 간략하게 콘티를 그렸고.
나는 대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캠코더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많은 스탭도, 화려한 장비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밖에 다 있으니까!
장소는, 종로.
“꺄아아아아!”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인근에 등장한 내 모습에 주변이 시끌벅적 해졌지만, 나와 박진우 연출은 괘념치 않았다.
“거리 유지 부탁드릴게요.”
재익이 형과 영미 씨 정도가 연출부 역할을 하며 시민들을 통제한, 자유로운 상태.
이런 상태로 박진우 연출이 캠코더를 들어올렸다.
“촬영 시작할게요.”
마치, 게릴라 콘서트 같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인원을 투입해서 기왕 찍는 거 제대로 찍으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와 박진우 연출이 반대했다.
트라팔가 버스킹 동영상이 그랬던 것처럼.
원래, 이런 ‘날 것’ 그대로가 주는 느낌이 더 설득력 있을 때가 있다.
캠코더 하나. 붐 마이크 한 대. 반사판 하나면 끝인 촬영.
덕수궁 돌담길을 배경으로 한적하게 걸었다. 그리고 돌연 카메라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웬. 저는 미국 촬영을 마치고 휴식 차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숨을 골라내었다.
내가 주변을 돌아보자, 캠코더가 내 시선을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먼발치에서 나를 구경하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제 뒤에 사람들 보이시죠? 여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제게 궁금해 하고 있어요.”
덕수궁. 조금 떨어진 북촌한옥마을. 그리고 아늑한 상점가.
계속해서 걸었다.
“도대체 얘가 왜 여길 나온 거지? 나와서 뭘 하는 거지? 도대체 뭘 찍고 있는 거야? 이렇게요.”
그리고 나는 광화문 광장 앞에 도착했다.
나를 따라오던 수많은 인파가 어느새 둥그렇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
“제가 처음 감독님들을 뵀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럴 수가! 오웬 형제잖아! 도대체 저들이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마치,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처럼 요.”
그리고 나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감독님, 우리 당장 만납시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보여줍시다. 감독님의 영화를!”
이런, 내 동영상이– 스트리밍 사이트에 공개되었다.
*
나와 오웬 형제.
서로가 서로에게 보낸 ‘러브 콜’ 동영상의 조회 수는 끝없이 불타올랐고, 댓글에는 우리 둘의 만남을 기대한다는 응원들이 이어졌다.
오웬 감독이 만드는 영화는, 독립영화다.
뭐, 감독이 오웬 형제라 이미 독립영화 팬 층이 상업영화 뺨치는 수준이지만 어쨌든.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 치솟는 관심에 비례해 영화의 ‘판’이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에 ‘후원’하고 싶다는 후원자들이 속속들이 등장했고,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줄을 지었다.
모두 ‘이익’을 우선시 한 투자가 아닌, 후원.
제 아무리 독립영화지만, 동양인이 ‘주연’으로 참여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이렇게 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잘 됐다. 정말.”
“… 그러게요. 정말 기다리던 일이에요.”
오디션을 거치지 않았고.
단 한 작품도 뚜껑이 열리지 않은 미지의 땅 할리우드에서.
‘섭외’를 받았다.
그것도 환상적인 감독의 매력적인 프러포즈로!
옛말에, 행운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이번 동영상들이 수많은 영화,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화제가 되며, 졸지에 도재희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자신만만한 동양인 배우’가 아니라, ‘오웬이 원하는 배우’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인지도 가치가 늘어났고.
나를 원하는 곳이 한 곳 더 있었다.
UAA는 내게, 또 다른 ‘섭외’ 소식을 전해왔다.
“이건, 정말 흔하게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에이전트 빌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개 했다는 작품.
미 케이블 방송국 HBS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데드 매니악>.이곳에서, 동양인 배우를 찾는다.
역할 비중은 조연이지만, 매회 등장하는 비중 높은 역할.
이 역할의 후보로 내가 최종적으로 낙점되었다는 소식.
재익이 형이 말했다.
“UAA 말이 맞아. 인지도 알리고 얼굴 알리기에 이만한 작품이 없어.”
하지만 나는 기뻐하기 전에, ‘드라마’라는 사실에 우려를 표했다.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장르.
드라마.
“형, 하지만 드라마는…”
“알아. 너 국내에서 안하겠다고 한 거. 산으로 갈까봐 그런 거잖아. 하지만 이거, 사전제작이야. 그것도 ‘시즌제’라 촬영 모두 다 끝내고 방영 시작하니까 스케줄 걱정은 안 해도 되. 영화랑 똑같아.”
“….”
모든 대본이 나와 있는 사전제작 형태라면, 내 능력이 통하는 범위다.
거기다, 확실히 ‘미드’로 국내에도 유명세를 떨치는 HBS라는 점은 플러스 요인이다.
대중적인 얼굴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고.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에는, 이만한 것이 없으니까.
“오웬 감독님 영화랑 스케줄 조정이 가능할까요?”
“괜찮을 거야. 여기 방송국도 너 영화 들어가는 사정 다 알면서 연락 한 거니까.”
음.
하지만 작품을 고를 때에는 항상, 심사숙고해야 한다.
모든 조건들이 너무 좋다.
판이 내게 ‘맞춰’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 그런데 왜 불안한 것이냐.
아마도. 마지막 하나 남은 찝찝함.
시즌 7,8 까지 이어지면, 드라마에 계속해서 묶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
“이 드라마, 너무 길어지지 않을까요?”
시즌 1을 1년 동안 찍는 것이 아니라, 시즌 1,2를 묶어서 찍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7,8년 씩 걸리지는 않겠지만.
이런 시리즈물이 가지는 단점은, 명확하다.
늘어지는 기간에 대한 ‘무료함’과 특정 이미지의 ‘고착화’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야 할 배우 이미지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점.
하지만 재익이 형은 이런 내 우려를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하지 마. 이 드라마, 좀비 드라마잖아.”
“네?”
그게 어때서?
“죽여 달라고 하지 뭐.”
“….”
아, 죽여 달라고 하면 되는구나.
[ 책 먹는 배우님 – 10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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