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1)
11.
어머니는 신난다며, 주방 파업을 선언하셨다.
“오늘은 외식이야!”
그러면서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놓지 않으신다.
“여보 빨리 들어와요. 알았죠? 아, 글쎄 할 얘기가 있다니까 그러네!”
뿐만이 아니라, 첫 방까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홍보를 시작하셨다.
“내 아들이 나온다니까! 그래! 12월 18일 밤 10시야 10시. SBC [청춘열차>!”
“….”
어머니, 그거 아직 티저 촬영도 안 들어갔어요.
포털사이트에 [청춘열차>를 검색해도 그 흔한 포스터 사진이나, 티저 영상 하나도 나오지를 않는다.
[송문교 SBC 후속 드라마 [청춘열차(가제)>발탁] [‘애프터 픽시’ 소윤, 심쿵 여사친으로 변신!] 이런 캐스팅관련 보도기사 뿐이다.아, 나도 있긴 있다. 내 기사가 아니라, 송문교 기사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짤막한 문장뿐이지만.
[… 배우 송문교와 같은 L&K 소속 신인배우 도재희는 조연 ‘김도훈’ 역할로 출연하여 진한 우정을 선보일….]다른 사람 등에 올라탄 셋방살이 신세일 뿐이지만 어머니를 감동시키기에는 내 이름 한 줄이면 충분했다.
“우리 아들이 기사에 나오다니!”
어머니는 소녀같이 좋아하셨고, 나는 그 모습을 연신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어머니의 강압적인 명령에 이른 귀가를 하신 평범한 회사원인 아버지는, ‘오디션 합격’ 이라는 얘기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내게 물으셨다.
“소고기 먹을래?”
*
하나 뿐인 외동아들의 ‘연예계 성공’을 반 쯤 포기하고 계셨던 가족의 응원을 얻은 것만으로도, 이번 짧은 이틀간의 휴가는 굉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에게도 떳떳하지 못했던 배우지망생이, 이제 앞만 보고 달려 나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오라는 박찬익 팀장의 말에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두 시 정도에 L&K 사옥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의 사무실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촬영이 있을 팀들은 모두 촬영을 나가고, 스케줄을 정리하는 실장급 이상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박찬익 팀장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어? 이야, 푹 쉬었나본데? 얼굴 좋아 보인다.”
술 엄청 먹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쉬었으니,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
“특별한 소식이 있다. 잠시 기다려 봐.”
박찬익 팀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하는 내용이 누군가를 부르는 눈치였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사무실로 두 명의 사람이 들어섰다.
“어? 재익이 형.”
대본이 처음 내게 말을 걸어오던 날. 내게 [청춘 열차> 대본을 가지라며 건네주었던, 매니저 황재익 형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한 명 서있었다.
“인사해. 앞으로 재희 너 담당으로 붙을 친구들이야. 재익이는 잘 알지? 신입 들어오기 전까지 당분간 재익이가 로드 뛰어 줄 거고, 옆에는 의상 챙겨 줄 친군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영미요.”
“아 그래, 이쪽은 영미 씨. 전에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친구. 일단 천천히 인사들 나누고, 재익이한테 스케줄 전달하고 인수인계 해놨으니까 앞으로 재익이 통해서 들으면 된다.”
로드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내 팀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근데 형. 로드도 뛰어요?”
매니저 황재익.
재익이 형은 다른 기획사에서 매니저로 일하다 L&K로 넘어온 경력자다. 나이는 서른이 조금 넘었고, 일을 시작한지는 어언 7년 정도 된 베테랑 매니저. 직급은 실장이라 로드매니저를 뛸 짬은 아니다.
이런 내 질문에 재익이 형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요새 매니저가 워낙 부족 하잖냐. 박봉에 일은 힘들지. 거기다 막상 뚜껑 열어보면 자기가 생각했던 연예계가 아니거든. 며칠 해보고 다 때려치우잖아. 쯧쯔. 근성이 없어 애들이… 이럴 때는 나 같은 중간 짬밥이 제일 애매하다니까.”
“아아.”
“뭐, 그래도 불만은 없다. 확실히 현장 보는 게 내부 작업 보다 편해. 오랜만에 로드 뛰면 옛날 생각도 나고 재미는 있겠네.”
확실히 베테랑 매니저가 내 옆에 있어주면, 현장에 대해 잘 모르는 신인 입장에서 든든하긴 할 것이다.
이번에는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미 씨라고 했죠? 저는 도재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오.”
나이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일까, 노랗게 물들인 염색이며 진한 화장에 쭉 찢어진 눈까지. 그다지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패션 센스 하나만큼은 남달라 보였다.
하얀 니삭스에 홍대에서 유행할 법한 펑퍼짐한 통바지. 거기다 뜬금없는 샤넬 클러치 백.
“….”
음, 확실히 남다르다.
“재희야. 밥은 먹었어?”
“예. 형은 식사 하셨어요?”
“마침 나도 먹었다. 그럼 어디 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할까?”
갑작스럽게 편성된 ‘도재희 크루.’
우리는 카페를 찾아 사무실 밖을 나섰다. 하지만 우리 세 명이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 뿐 만이 아닐 것이다.
“근데 영미 씨는 고향이 어디야? 약간 사투리가 섞여있는 것 같은데.”
“김해요.”
“으음 역시. 경상도 억양이 섞여있더라니. 나는 어디일 것 같아?”
“주문진?”
“… 주문진? 강릉 주문진?”
“몰라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서.”
“으흥흥. 영미 씨는 농담 좋아하는구나.”
“그래보여요?”
“….”
말 하는 것을 좋아하는 매니저 형과, 극도로 단호박을 시전 중이신 스타일리스트. 거기에 이상한 능력을 쓰는 배우까지.
확실히 일반적인 조합은 아니다.
마치 어벤져스 같이 어울리지 않는 우리 세 사람은, 회사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일 얘기 좀 해볼까?”
하지만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일’ 얘기에 들어가니 단번에 눈빛이 달라진다.
장난기 가득하던 재익이 형의 눈은 진지해졌고, 단호하기만 하던 영미 씨의 눈은, 드라마 판에서 십년은 구른 듯한 프로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일단, 이번 주 토요일에 춘천에서 티저랑 포스터 촬영 예정되어있고. 여기, 이건 티저 콘티.”
“이건 [청춘열차> 의상 팀장 언니 만나서 컨셉 정리한 사진들이에요.”
내가 쉬었던 이틀 동안, 벌써 촬영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재익이 형이 건네준 티저 콘티와 스케줄 표는 종이 한 장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영미 씨가 건네 준 파일에는 의상 컨셉을 샘플로 뽑은 모델들의 사진들이 십여 개 정도 나열되어있다.
“티저 컨셉은 기차 여행이야.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랄까. 어디서 본 것 같은 흔한 컨셉이긴 하지만… 그 만큼 [청춘 열차>와 어울리긴 해.”
기차를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신비로운 장면이라.
1화 1씬이 기차 여행을 떠나는 주연들이니, 나름대로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영미 씨가 말했다.
“의상은 감독님이랑 의상 팀장님 뜻이 확실해서 고르기는 쉬웠어요. ‘김도훈’ 직업이 저널리스트라 특별한 의상이 필요하지는 않아서 더 편했고요. 심플하면서 조금 모던한 느낌만 강조했어요.”
진녹색 야상에 청바지에 슬립 온, 혹은 잘빠진 항공점퍼를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모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샘플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내가 입을 의상 컨셉들이다.
“…. 완벽한데요.”
나 역시 회사 짬밥이 있기에 이런 서류들은 어깨너머로 많이 보았다. 쉬워보여도 이 정도 샘플 수집이면, 상당히 공을 들였을 것이다.
재익이 형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문제 생기면 일 때려 쳐야지.”
“그런가요.”
나는 천천히 콘티들을 숙지하기 시작했다.
굳이 흡수 할 필요는 없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김도훈’이 있고, 촬영하는 장면은 대사 없는 이미지 컷들 뿐이었니까.
“촬영장이 춘천이라고요?”
“어어. 경강역이라고, 지금은 폐역이라 관광지로 쓰이는 조그만 간이역인데 거기서 컷 몇 개 따실 거래.”
벌써 머릿속에서 그림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간이역을 거니는 안개속의 사람들. 이제는 다니지 않는 기찻길에서 안개를 뚫고 흘러가듯 멀어지는 기차. 김도훈의 걸음걸이, 간단한 제스쳐, 표정 등. 모두 선명하게.
“포스터도 간이역 배경으로 찍을 거야. 간 김에 다 찍어버리면 좋지 뭐.”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럼! 재밌어야지. 이제부터 시작하게 될 일들이, 그 동안 네가 얼마나 기다리던 일이냐.”
재익이 형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형은 그동안 남몰래 기울여왔던 내 노력들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형이다.
단순히 대본 테이블 옆 자리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아는 체 하지 않던 무명 배우에게 가끔씩 안부인사도 물어주던 형.
“입 발린 소리 같겠지만, 네가 매일 출석체크 하듯 사무실에서 대본 읽을 때, 조만간 빛 보겠구나 생각했다.”
“으음, 감동인데요.”
“진짜야 임마. 큭큭. 영미 씨. 얘 대본 읽는 눈빛이 어땠는줄 알아? 욕심은 많은데, 그거 숨기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 완전 이글이글 대본 다 씹어 먹을 기세 같은거 있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욕심이 많은데 숨기려고 애쓴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앞으로는 표정 관리에 더 신경 써야겠는데.
“기분 나쁘게 오해하지는 말고. 배우가 그런 욕심도 없으면 되겠냐.”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
“네. 지금은 어떤 것 같아요?”
재익이 형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알 것 같다는 듯 말했다.
“아직 조금 부족해 보이는데?”
괜히 7년 매니저가 아니라는 건가.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재익이 형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재희, 욕심 많구나.”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영미 씨가 입을 열었다.
“아닌데. 지금 충분히 행복해 보이시는데. 반 주연급 캐릭터로 미니시리즈 데뷔하시잖아요. 이제 뜰 일만 남았는데.”
“아아, 영미 씨는 오늘 재희 처음 봤지? 나는 얘 오래 봤거든. 착해보이는 얼굴 뒤에 시꺼먼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이건 내 촉이 맞아. 얘, 이걸로는 부족해.”
“전 잘 모르겠네요.”
“맞다니까?”
“글쎄요.”
“… 영미 씨, 은근히 말 꼬리 잡는 버릇이 있구나.”
나는 웃음이 터질 뻔 했지만 참았다.
“푸흡. 그만하세요. 둘 다 맞으니까.”
둘 다 맞는 말이다.
지금 현재 더 없이 행복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허전한 기분도 감출수가 없다.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자꾸만 내 욕심을 부추긴다.
“그건 그렇고. 자! 우리 도 배우님 데뷔 기념으로 저녁이나 먹고 퇴근할까?”
“저녁 좋죠. 영미 씨는 어때요?”
“뭐, 나쁘지 않죠.”
“그래그래. 찬익이 형한테 활동비 잔뜩 받아올게. 뭐 먹고 싶어?”
“음, 감자탕 어때요?”
“좋지. 영미 씨는?”
“나쁘지 않죠.”
“… 영미 씨, 조금 독특하다는 얘기 많이 듣지 않아?”
은근히 재미난 조합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들의 업무 능력이야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이젠 내 차례다.
이들이 내게 판을 깔아주었으니, 나는 그 믿음에 보답하듯 판에서 실컷 놀기만 하면 된다.
티저 촬영은 내일 모레.
자, 어떻게 놀아볼까.
[ 책 먹는 배우님 – 11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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