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11)
111.
내 말에 제작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
이들은 나를 ‘테스트’ 하려했다.
뭐, 당연한 얘기다.
내가 미국인들에게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린 방송은 오직 [게라드 쇼> 뿐이고.
그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만으로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시즌제’ 드라마에 섭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겠지.
이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나 역시, 이들이 어떤 인간인지 속으로 수없이 재보았으니까.
제작진이 정말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눈치 채셨습니까? 이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나름대로 절박합니다. 물론, 흥행여부에 달렸지만… 계획상으로는 시즌 8까지 기획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와 함께 ‘롱런’ 할 수 있는, 작품에 정말 ‘애착’을 가지는 그런 배우를 찾고 있어요.”
시즌 8 이라니.
그야말로, 엄청난 욕심이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어떠십니까? 저를 시험하신 결과는?”
제작진이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이런 제길! 무조건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괜한 실망감만 드린 것 같아 걱정이네요. 오히려 저희가 묻고 싶습니다. 저희는 재희에게 합격입니까?”
“….”
그래.
나는, 이 작품이 얼마나 ‘단단한’ 돌멩이 인지 알고 있다.
오헬리안 다미앙이 연기하는 [라스팔마스의 휴일>을 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한 방 깊숙하게 날려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들은 ‘처음’의 내게 ‘의구심’을 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원하고 있다.
최소한 작품에 대한 ‘기준점’과 ‘애착’이 확고한 제작진.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
하지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조율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빌과 재익이 형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아직, 남은 것이 있지 않은가.
빌이 눈치껏 입을 열었다.
“우선, 개런티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개런티 협상.
“네. 물론이죠. 이 부분은 저희 관할이 아니라, 잠시만요.”
제작진이 누군가를 호출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제작 PD로 보이는 남자가 미팅 룸 안으로 들어왔다.
개런티에 관한 내용은, 감독과 작가의 영역과 별개로 다룬다. 감독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제작사에서 개런티의 문제로 섭외가 깨지는 경우는 일상다반사.
슛 사인이 돌기 전까지, 실무자는 저 남자다.
찢어진 눈에, 뿔테 안경을 쓴 대머리 남성.
깐깐해 보이는 인상.
한 눈에 보기에도 호감 형은 아니다.
… 분위기가 좋지 않다.
재밌는 점은, 이런 내 예감은 이제껏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내게 말했다.
“….”
“….”
나는, 기본적으로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의 값어치는 ‘돈’으로 말하고.
내게 측정된 몸값이 예상보다 턱 없이 낮은 개런티라면.
“그건, 안 되겠는데요.”
거절할 의사도 충분히 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할 이야기가 없군요.”
내 거절에 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재희! 회차 당 4만 달러(한화 4천만 원 내외)면,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미팅 룸을 빠져나오자마자 빌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거기에 SAG(Screen Actors Guild : 배우조합)에 가입하면, 야간 촬영 개런티가 추가로 붙는데다, 4만 달러라는 출연료는 재방송이나, DVD 판매 시청료가 모두 계산된 금액이 아니라고요. 실제로 받는 액수는 훨씬 큽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합니다.”
“이제껏 모두가 그렇게 받습니다. 특별히 낮은 금액이 아니라고요.”
“….”
“시즌 1을 잘 마무리 지으면, 시즌 2에서 재계약 할 때, 훨씬 높은 개런티를 받아낼 수 있어요. 이 정도면, 시작으로 훌륭합니다. 제가 약속드리죠. 시즌2에서 두 배 이상 올리겠다고.”
“….”
내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자, 빌이 말했다.
“젠장! 재희! 여긴 한국이 아니에요.”
“….”
그 말에 내 눈이 뒤집어졌다.
아니, 내가 화난 이유는 한국에 비해 내 몸값이 낮아서가 아니다.
“이봐요. 빌! 잘 들어요! 난 내 몸값이 한국에 비해 터무니없게 낮게 측정되었다고 징징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죠?”
“저 보다 비중이 낮은 백인 배우의 개런티가 20%이상 높기 때문이죠!”
“….”
내 말에 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차별은, ‘존 미켈’의 경우처럼 대놓고 내 뺨을 때리는 경우보다, 이렇게 은근하고 천천히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젠장!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즌1이 성공을 거두고, 시즌2에서 보다 높은 개런티로 재계약을 채결하려던 한국계 배우가 돌연 드라마에서 하차하는 이유.
인지도, 능력에 관계없이 백인보다 10%이상 낮게 측정되는 개런티.
나는 조금 전,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대머리 PD가 내게 개런티를 제시하고, 은은하게 풍기던 그 조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고맙게 받아먹어.’
내가 거절하자, HBS 연출팀에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개런티 상향을 요구했지만, 대머리 PD는 요지부동이었다.
“제기랄.”
욕이라도 한 바기 퍼부어 버릴 걸 그랬다.
자신의 대접이 ‘부당’ 하다고 말해주고 있는데, 얌전히 뺨만 맞고 있을까.
그게, 할리우드야?
“잘 들어요. 빌.”
“… 말씀 하세요.”
“저는 한국보다 높은 개런티를 벌기 위해 미국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아니! 애초에 한국에서 받던 개런티만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
“제가 말하는 것은, 이 계약이 ‘불공정’ 하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시즌 1에서 인지도를 끌어올려서 시즌 2에서 더 크게 계약하자고?
엿 먹어라.
모르긴 몰라도, 시작부터 잡아놓지 않으면 시즌 2에서 오히려 똑같은 문제가 더욱 크게 두드러질 거다.
“가서 그 잘난 제작 PD에게 똑똑히 전해요. 나를 원한다면, 최소한 ‘공정한’ 개런티를 가지고 오라고.”
빌이 입을 꾹 다물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죠.”
빌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아직 포기했다고 말하지는 말아줘요. 기회를 한 번 더 줘요.”
기회랄 것도 없다.
아마추어가 아니다.
프로다.
온당한 대우를 약속한다면, 나 역시 그에 걸맞는 반응을 하면 되는 것이다.
“부탁입니다.”
빌의 간곡한 말에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하아.”
재익이 형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좀 쉬어야겠어.”
나는 차에 올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혼자 화를 삭히자, 룸 미러를 통해 조용히 나를 보던 재익이 형이 말했다.
“우선 잊자, 다음 미팅도 있잖아.”
“….”
그래.
첫 드라마부터 틀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내게는 한 작품이 더 남아있다.
바로, 오웬 형제들.
*
누군가 나를 계속해서 찾아주는 일은, 그 배우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는, 최고의 순간들이다.
특히.
세계적인 거장의 공개 프러포즈를 받는 다는 것은.
정말이지, 끝내주는 일이지.
오웬 형제들과의 미팅 날짜가 잡혔다.
[데드 매니악>에서는 내부 회의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거듭 흘러나오고, 빠르면 오늘 중으로 확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빌의 말.“제발 포기하지 말아요. 대머리 PD는 재희의 가치를 모르고 있어요. 연출팀이 계속해서 재희를 밀고 있으니, 가능성 있어요.”
그래.
그게 문제지.
흑인 보다 낮게 평가되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배우라는 것이 할리우드 시장에서 우리들에 대한 인식이다.
“일단, 알겠어요.”
나는 머릿속에서 [데드 매니악>을 지워버리고 오웬 형제들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네소타 주에 위치한 오웬 형제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아주, 오랜만에 재회했다.
“재희!”
이미, 동영상을 통해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자마자 뜨겁게 악수했다.
“반가워요!”
형인 코너 오웬이 내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자, 동생인 오너 오웬이 심술을 부렸다.
“이거, 방이라도 잡아줘야겠군. 결혼식장은 왼쪽이라고.”
“입 닥쳐, 오너.”
“이제 재희 손 좀 놔주지 그래? 표정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는군.”
“앗, 아”
코너가 내 손을 놓아주자, 오너가 빈틈을 파고들며 내 손을 꽉 잡고는 말했다.
“재희. 우리 프러포즈에 응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하하! 저야 말로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에이니! 여기 마실 것 좀 준비해달라고!”
우리는 오웬 형제들의 미네소타 주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실이라고는 하지만, 책이 빼곡하게 쌓여있는 서재나, 골방이 아닌, 일종의 거대한 스튜디오였다.
특수촬영용 크로마가 벽에 붙어있고, 조명기기나 촬영용 장비가 지천에 준비되어있는 촬영용 스튜디오.
코너 감독은 이를 ‘플레이 라운지’ 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 전에, 이곳에서 항상 모든 씬들을 가지고 놉니다. 대사를 해보기도하고, 카메라를 들고 와서 무작정 찍어보기도 하고.”
“플레이 라운지라, 멋지네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긴장감을 숨길 수 없었다.
오너 오웬이 양손에 깔끔하게 제본된 스크립트 두 권을 들고 왔기 때문이다.
대본.
오너가 대본을 흔들며 웃었다.
“제가 전에 파티에서 설명했던 내용은 영화의 일부 장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는 여기에 있어요.”
“….”
나는,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로 웃고 있지만.
영화는, 비즈니스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감성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이만큼이나 ‘현실적’인 일도 드물다.
이미, [데드 매니악> 과의 미팅에서 경험하지 않았는가.
아무런 일면식도 없던 이들이 내게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이유는 분명 하나다.
‘내 이미지.’
[게라드 쇼>에서 대중들에게 만들어진 내 ‘이미지’가 필요했을 것이고.내가 오웬 감독들의 프러포즈에 응한 이유는, 온전히 내 커리어에 대한 발판 때문이다.
칸과 아카데미가 사랑한 남자들이니까.
하지만 이런, 팍팍한 것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자.
속으로만 궁금해 하자.
자, 이들이 내게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공개적인 러브콜’을 하면서 까지 내게 원한 배역이 뭘까?
도대체 자신들의 영화에서 나와 결합시킨 역할은 어떤 인물일까.
“이겁니다.”
오너 오웬이 대본을 건네주었다.
대본을 받아들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제목.
[패브리케이터(Fabricator)>.쉽게, 해석이 되는 단어는 아니다.
적어도 들어본 적은 없다.
제목 다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점수.
매우 높은 점수, 썩 훌륭한 시너지.
어디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어마어마한 영화였지만, 나는 속으로 긴장감을 놓지 않고 물었다.
“어떤 영화입니까?”
속으로는 간절하게 외쳤다.
‘제발, 당신들은 멀쩡한 사람들이길!’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너 오웬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코너가 말해줄 겁니다. 어서 말해달라고.”
“안 그래도 말하려던 참이니까, 닦달 하지 마. 오너.”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 유쾌한 형제들이다.
코너 오웬이 까끌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럼, 저희 영화 소개를 시작할게요.”
[ 책 먹는 배우님 – 111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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