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12)
112.
[패브리케이터(Fabricator)>.영화에는 FX 팀이 있다.
특수효과, 특수분장, 특수미술 같은 분야를 뜻하는 총칭이다.
이 FX팀 내에서 ‘특수의상’을 만드는 제작자를 패브리케이터(Fabricator)라고 말한다.
영화, [패브리케이터(Fabricator)>는 실화와 실존인물에 대한 고증을 차례차례 밟아나간다.
일전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던, 캠핑 트레일러를 다섯 채나 연결하며 썼다는 유명 M사의 그 히어로 배우.
그 히어로가 입는 ‘강철 슈트’를 제작하고 할리우드 수많은 영화에 참여한 ‘탑(Top) 특수 의상 디자이너’ 실존 인물의 이야기다.
사고로 생긴 장애.
한 때는 평범한 취업 지망생, 중소 회사 인턴을 전전하며 특별할 것 없는 20대를 보내다 현재는 할리우드에서 서로가 모셔가려는 패브리케이터(Fabricator)로 성공신화를 만들어낸 인물의 이야기.
단순한 성공기가 아니다.
인생에 숨어있던 ‘복잡한’ 인간관계들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했다.
놀랍게도 이 인물이 동양인이며, 또 한국인이다.
나는 놀라운 얼굴로 되물었다.
“이런 영화를 찍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오웬 형제들은 되려, 이런 내 반응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응?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문제는 없다.
하지만, 서양인 영화감독이 만드는 동양인의 할리우드 성공기를 담고 있다.
이제껏, 이런 영화가 있던가?
“아뇨, 좀 의외여서요.”
뭐, 동양인이 모델인 영화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조폭, 무사, 어둠의 조직. 대게 이런 부류로 묘사되어서 그렇지.
내 말에 코너 오웬이 말했다.
“음, 재희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조금 의외군요.”
“예?”
“서양인은 동양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면 안 되나요?”
“…. 아.”
둔기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색 안경’을 끼지 말아달라고 [게라드 쇼>에 나가 만천하에 대놓고 부탁해놓고, 오히려 내가 ‘색 안경’을 끼고 있잖아.
제기랄.
“재희는 오히려, 아무런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 제가 실수를 했군요.”
나는 내 실수를 인정했다.
그래, 이들은 좋은 메시지의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 대상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의문을 가지다니.
이런 저런 목적을 재가며 접근한 사람은 나다.
“미안합니다.”
내 사과에 코너 오웬이 활짝 웃어보였다.
“아닙니다. 농담이에요. 저 역시도, [게라드 쇼>를 보기 전 까지는 사실 이 영화를 찍을 확신이 없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몇 년 전에 썼다가, 찍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고이 접어뒀던 영화지요.”
“….”
“[게라드 쇼>에 나온 재희의 말에 용기를 얻었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이 배우라면, 이 배역에 참 잘 어울리겠다고.”
이거, 참 믿기지가 않는 군.
이런 거장이 내 말에 영향을 받았다니.
“저희 영화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해피엔딩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오웬 감독들의 영화적 특징.
서스펜스, 치밀한 복선, 이를 회수하는 다소 잔혹한 방식 들이 있다.
오너 오웬은 이번 영화는 조금 다른 ‘색’을 취하는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변 상황들이 의도치 않게 자꾸만 꼬이는 블랙코미디.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하면 빠르게 치솟아 올라갈 카타르시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영화 [월가의 늑대>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투자의 귀재 ‘벨포트’의 삶이 떠오른다.
물론, 벨포트의 제국이 붕괴되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 따위는 없고.
장애와 편견을 딛고 위로 수직상승하는 그 터질듯한 카타르시스만 닮아있겠지만.
“어떻습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영화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물론, 이런 감정은 나 뿐 만이 아니었다.
재익이 형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재밌겠다.”
프로 매니저인 재익이 형이 이런 얼빠진 얼굴로 감탄할 때면, 그 작품은 으레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내가 참여한 작품 중 이제껏 얼빠진 표정을 짓지 않은 작품은 없다.
“너무, 흥미롭습니다.”
영화에는 적절한 픽션이 가미되어있다.
하지만, 실존 인물의 삶이 베이스로 깔려있는 만큼 그(녀)의 삶을 어떻게 진실 되게 연기하느냐가 진정한 관건.
이는, 내게도 몹시 흥분 되는 일이다.
‘삶에서 배우는 연기.’
책보다는, 책 밖에서 찾아야하는 연기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재희가 잘 소화해줄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럼, 당연하지.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고. [패브리케이터>는 재희를 위한 영화라고.”
나와 코너가 악수를 했다.
“앞으로 잘 해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물론 여담이지만.
이들은 개런티로 장난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게, 40만 달러 (4-5억)짜리 미니멈 개런티를 제안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조항이 하나 삽입되어있다.
무려, 러닝 개런티다.
*
“오웬 팀과 이야기가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영화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환상적인 영화를 만났고, 개런티도 훌륭하고, 감독들의 믿음에 보답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나는 조금 서먹서먹해진 에이전트 빌의 말에 짤막하게 반응했다.
“네.”
아직 [데드 매니악>에서 생긴 감정의 골이 풀리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 확실한 것은.
이번 일로, UAA가 내게 거는 기대감이 얼마나 작은지는 알 수 있었다.
[게라드 쇼>, 오웬 감독들이 내게 보낸 러브 콜.이런 ‘증명되지 않은’ 것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성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배우 도재희의 ‘실적’에 대한 이야기.
‘회당 4만 달러짜리 드라마’에 집어넣으려고 애 쓰던 빌.
이거야 말로 나를 이용해 한국 시장은 사로잡을 수 있어도, 미국 무대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다는 반증이니까.
뭐, UAA를 탓할 생각은 없다.
이제껏 할리우드 시스템이 그래왔고.
이건 비즈니스니까.
그냥, 이렇게 서로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편하다.
“[데드 매니악>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빌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뇨, 아직.”
“그렇군요. 그럼, 전에 말씀하셨던 ‘다른’ 작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오디션을 진행하고 싶다는 작품은 몇 개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
오디션을 보라고.
그래.
이래서, 다들 미국 시장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지.
‘네가 뭐가 아쉬워서 오디션을 봐?’
이무택 대표님께 이런 소리 듣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그럼 당분간, [패브리케이터>에만 집중하면 되겠군요.”
“아, 네….”
내 말에 빌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는, 불안한 듯 보였다.
서로 간에 쌓여있는 불신을 타파하고 싶은데, 그 연락이 도무지 오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 불안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와중.
“… 전화 왔습니다.”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빌이 긴장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아주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내 앞으로 왔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잔뜩 흥분된 얼굴이었다.
“이런 일이!”
“… 무슨 일입니까?”
내 질문에 빌이 잔뜩 흥분하며 외쳤다.
“회당 9만 달러로 올리겠다고 합니다!”
“…. 뭐라고요?”
9만 달러.
회당 거의 1억 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유명’ 배우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는 ‘푼돈’이지만, 할리우드에서 생짜 신인이나 다름없는 내게 제안하는 금액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서도 소위 말하는 ‘탑’ 급 배우들 중에서도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개런티다.
활동을 계속했다면 나 역시 받았겠지만, 나 역시 한국에서 받아 본 적이 없는 개런티.
4만 달러짜리가, 9만 달러로 변했다.
갑자기 개런티가 두 배로 불어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나는 기쁨 보다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고.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패널티는 뭡니까?”
*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내게 주어진 상황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이냐고 묻는 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
HBS에서는 연출팀과, 제작PD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나를 간절하게 원하는 연출팀.
동양인 신인배우에 대한 개런티를 높여줄 의향이 없는 제작팀.
지지부진한 이 싸움의 승자는 결국, 연출팀이었지만.
제작 PD는, 강력한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재희라는 배우가 드라마에서 기대이하의 반응을 얻거나 드라마 시청률이 저조할 경우에는 시즌 2 재계약시, 개런티 협상을 하지 않겠어요.”
즉, 성적을 보고 시즌 2에서 나를 완전히 발목 잡겠다는 말이다.
이 얘기를 들은 재익이 형이 분통을 터뜨렸다.
“시발, 이거 완전 양아치 새끼들이네! 재희가 혼자 잘 한다고 안 될 드라마가 잘 되기라도 해? 주연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그 뭐? [라스팔마스의 휴일>? 그거랑 동시에 방영하는데, 재희 혼자 어떻게 하냐고!”
‘공정한’ 계약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덜 공정한’ 계약을 들고 왔다.
아니, 오히려 더 ‘부당한’ 계약인가?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시즌 1이 끝나고 시즌 2로 넘어갈 때 재계약 개런티가 ‘몇 배’씩 널뛰기 하는 지금 이 시장에서는 일종의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다.
시즌 2를 성공적으로 이끈 배우의 역량을 충분히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의 그 대머리 제작 PD와 다시 재회했다.
“오셨어요?”
대머리 PD는, 한껏 조소를 품은 얼굴로 물었다.
‘이번 제안은 어때?’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한 얼굴이었고, 나는 결코 져줄 생각이 없는 완강한 입장을 보였다.
“좋아요, 좋아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니까, 내가 못하면 시즌 2에서도 똑같은 값으로 부려먹겠다는 거잖아요.”
“부려먹는다뇨. 당치 않습니다.”
맞는 것 같은데.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나는 흰 종이 한 장에 펜으로 써내려갔다.
내 손끝에서 움직이는 만년필 한 자루가 유려하게 글자를 만들어냈다.
조항 몇 개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해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내민 조건.
종이를 받아든 대머리 PD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샅샅히 읽더니, 되물었다.
“정말, 이거면 됩니까?”
“네.”
내가 내민 조건은 별 것 아니다.
1.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도재희’라는 배우의 실력을 인정받거나.
2. ‘주연 배우’ 보다 높은 인지도를 얻거나.
3. 만약, [데드 매니악>이 [라스팔마스의 휴일> 보다 시청률이 높게 나올 경우.
시즌2에서 내 개런티는 ‘회당’ 최소 40만(4억-5억) 달러 이상으로 상향 할 것.
내 제안을 찬찬히 읽던 대머리 PD가 말했다.
“오케이. 이렇게 하시죠.”
“….”
PD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적은 조항들 모두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렇게 시원하게 응했겠지.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제작은 ‘도박’이 아니라 ‘사업’이다.
내가 만약, 시즌1에서 저 셋 중 하나만 이루고 시즌2에 대박 조짐이 보인다면, 다음 시즌에 회당 최소 40만 달러를 받는 것은, 이들에게도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모두가 좋은 제안이다.
내가 손을 뻗었다.
“악수나 할까요?”
그러자 대머리 PD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네, 그래야죠.”
나는 사인을 마치고, PD와 악수를 했다.
이 자는 알고 있을 까?
자신들이 만들 드라마가, 얼마나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1인분 이상을 어떻게 해낼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와!”
“됐다!”
우리의 악수에 에이전트 빌과 [데드 매니악> 연출팀이 모두 환호했고.
“휴우-”
재익이 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대머리 PD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한 배를 타게 되었네요.”
“… 그렇군요.”
“이 드라마에서 저는 반드시 ‘제 역할’을 해낼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러시면 저희야 좋죠.”
“그런데, 하나 간과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짚어드릴까 합니다.”
“뭐죠?”
나는 계약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즌 2에서 재계약 시, 40만달러 라고 명시되어있는 부분이요.”
“네.”
“최소입니다. 최소.”
한참 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금 아쉬운 쪽은 너희가 아니겠지만.
기대 해.
“…..”
다음 시즌에는 40만 달러, 그 이상의 값을 받아내고 말테니까.
[ 책 먹는 배우님 – 11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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