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14)
114.
[데드 매니악>의 첫 촬영이 시작 된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그 사이 ‘더스트(괴물) 습격 이전’의 과거 씬들을 촬영했다.
더스트가 들이닥쳐 멀쩡한 세트를 부숴버리기 전, 세트가 멀쩡할 때 주연 배우들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세트를 부쉈다가 다시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1회에서 16회를 넘나들며 ‘회상’ 장면 촬영을 모두 마쳤다.
“다음 장면 찍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
눈을 떴다.
끔뻑, 끔뻑.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피자국이 묻어있는 천장.
저기에 왜 커피 자국이 묻어있을까.
고민도 잠시,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하루에 정해진 루틴을 시작했다.
낡은 고물 라디오를 탁탁 두드리면, 여자 아나운서의 날씨 소식이 들려온다.
[굿 모닝! 캘리포니아. 오늘의 날씨에 대해 알려드립…>동시에 칫솔을 들어올린다.
칫솔위에 쭈욱 떨어지는 치약.
커텐을 열어젖히면 아침 햇살이 가득 방 안으로 들어온다.
퀴퀴한 벽지, 작은 미니냉장고, 굴러다니는 과자봉지, 물병 따위가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어지럽고 좁은 아파트.
먼지 자국이 가득한 낡은 거울 앞에서 양치질을 시작한다.
슥슥-
거울 너머 벽에는 [한국어 사용 금지! 영어 사용 생활화!>라고 자필로 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간단하게 얼굴에 물을 끼얹고,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고, 얇은 야구점퍼에 스냅백을 눌러쓰고 백팩을 들어올린다.
철컥.
문을 잠그고, 곰팡이가 가득한 아파트 복도를 걸으면 하루 일과 시작이 완료된다.
귀에 이어폰을 끼자, 경쾌한 리듬의 Ben Kwell의 Hold On이 흘러나온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계단을 터덜터덜 빠져나왔다.
먼발치에서 찍히는 풀 샷.
음악에 맞춰 걸으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보기도 하고, 어느새 익숙해진 캘리포니아의 아침을 만끽한다.
유학생.
미국에 온지도 벌써 2년.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아침 8시 33분.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형 할인마트 ‘Beck`s Shop’에 1층에 위치한 제과점은 언제나 붐빈다.
자칫 잘못하면 지각을 하거나, 아침을 굶게 생겼다고.
“….”
하지만 금세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라.”
눈 뜨자마자 집 천장에서 보았던 생소한 커피자국이 왜 도로 표지판에 칠해져있는 걸까.
그제야, 매일 똑같이 생각했던 캘리포니아가 다르게 느껴진다.
길거리에는 유달리 사람이 없고.
왜 이렇게 황량하게 느껴지는 거야?
마치, 죽은 도시처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코앞에 마트 ‘Beck`s Shop’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게 웬걸.
“… 사람이 없잖아.”
뭐야? 왜 이래?
이어폰 한 쪽을 빼내었다.
그러자 귓가에서 흘러나오던 Ben Kwell의 Hold On이 아주 천천히 디졸브 되듯 사라지고.
주변 공기가 급변한다.
내 시야를 따라 앵글이 회전하고.
쾅!
파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유리창이 깨지며 유리조각들이 눈 앞에 떨어졌다.
“뭐, 뭐야.”
나는 몸을 움츠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듯, 굳어버렸다.
귓가가 웽웽 거린다.
한 쪽 귀에서는 어제와 다름없던 Ben Kwell의 Hold On의 일상이.
다른 한 쪽 귀에서는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비일상적인 사이렌 소리가 귀를 찌른다.
이어폰을 완전히 빼내었다.
도시 전체에 터져 나오고 있는 비상 사이렌 소리.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몸을 엄습한다.
굳어있던 다리가 조금 풀어지며,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뚜벅, 뚜벅.
한 걸음. 두 걸음.
어딘가에서는 알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가스관이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온다.
그제야 또렷하게 보인다.
도시 전체가, 달라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때.
“게에에에에에에엑!”
내 앞을 막아서는, 갈색의 인간.
머릿속의 사고가 그대로 정지해버리며 몸이 굳어진다.
영화 촬영 중인가?
도대체 저 사람은 뭐지?
좀비? 괴물? 모래? 코스프레야? 지금 도시 전체가 나를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하고 있는 건가?
어딘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방송국 카메라를 찾듯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갈색 괴물이 반응했다.
“게에에에엑!”
기괴하다.
몸과 팔, 목을 사정없이 꺾으며 내게 다가온다.
저건, 인간이 아냐.
나는 뒷걸음질 치려했지만.
“… 허, 헉.”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젠장.
이게 뭐야.
왜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뀐 거지?
놈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내 멈췄던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뛴다.’
일단은 뛰어야 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무작정 뛰었다.
다행히 놈은 내 속력을 따라올 만큼 잽싸지는 못했다.
‘Beck`s Shop’의 간판이 눈앞에 들어왔고, 나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은 아비규환 그 자체다.
“시발.”
영어가 아닌,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벽에 문구를 써가며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을 책망하는 대신, 나는 재빠르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꺄아아아아악!”
“살려줘!”
“이게 뭐야!”
쫓기는 사람들. 그리고 쫓는 사람들.
아, 사람이 아닌가?
이런 내 의구심에 불을 지필 새도 없이 무언가가 나를 들이받았다.
퍼억!
“큭”
“저리 비켜! 이 퍽킹 새끼야!”
나와 부딪힌 백인 남자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가 나온 출구 쪽으로 달려갔다.
시선이 돌아간다.
그곳에는 백인 남자를 쫓아가던 괴물이 내게 쇄도해오고 있었고. 이곳이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나는 건물 밖으로 달아나기 위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대로 멈춰서버렸다.
“켁, 케게겍, 켁. 사, 살려… 살려줘.”
“… 시발.”
나를 밀치고 달아났던 백인 남자는, 출구에서 또 다른 괴물에게 붙잡혀 사정없이 물어뜯기고 있었다.
물어, 뜯겨?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가게 깊숙한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
어제까지만 해도 보았던 평화로운 일상과 내 귓가를 울리던 Ben Kwell의 Hold On은 온데간데없고.
지옥이 펼쳐졌다.
“으에에에엥!”
그 때, 한 여자 꼬마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갈색 괴물의 모습도.
짧은 순간이지만, 인간의 도의성과 내 생존본능. 이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여자아이 바로 앞에있는 2층 계단이 눈에 들어왔고, 탈출 루트를 찾은 내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히야아!”
재빨리 뛰어가 여자 아이를 껴안아들었다.
그리고 식료품이 가득한 좁디좁은 찬장 사이를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 뒤로 셋 이상의 괴물이 쫓아왔고.
“으아아아아아아!”
나는 사정없이 소리치며 뛰었다.
그리고.
쾅! 콰아앙!
황급히 등으로 비상계단 입구를 막아선 채로 멈춰 섰다.
쿵!쿵!쿵!
괴물들이 문에 몸을 들이받았고, 그럴 때 마다 세차게 문이 들썩였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 젠장.
눈 앞에 보이는 2층으로 향하는 비상계단.
뛰어야 할까?
그 때, 텅! 텅! 텅!
철계단 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 누구야.
진퇴양난에 빠진 순간.
질겁한 얼굴을 한 백인 남자 한 명이 계단 위에서 내게 달려내려왔다.
“제인!!”
“아빠!”
아무래도 딸 아이의 아빠인듯 했다.
내 품에서 떨어지듯 내려온 아이는 남자의 품에 안겨들었고, 백인 남자는 오열할것만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 감사합니다.”
“….”
감격스러운 부녀상봉은 그 쯤 해두는 게 어때요.
나는 멋쩍은 얼굴로 내 등 뒤의 철문을 가리켰다.
“하, 하하.. 이것 좀 어떻게….”
그는, 상표가 채 떼어지지 않은 야구방망이를 들이밀며 내게 말했다.
“뜁시다.”
– 오케이!
*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딸아이의 아빠이자, 드라마 [데드 매니악>의 주인공인 ‘조지’가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재희. 연기 경력이 얼마나 되었어요?”
“예? 한 4년 정도.”
“눈빛이 너무 좋은데요? 덕분에 나 까지 잔뜩 몰입해버렸네.”
그리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고마워요. 조지.”
나 역시 잔뜩 몰입해 버렸다.
세인트 리가 정밀하게 만든 ‘더스트’.
정말 괴물이 쫓아오는 것 같아 무서웠거든.
연출 감독 역시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나를 치켜세웠다.
“믿기지가 않는군요! 역시 우리 눈이 틀리지가 않았어!”
“거 봐요. 내가 말했지? 재희 연기력은 이미 한국에서 증명 되었다니까!”
단, 한 장면.
나에 대한 증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씬은, ‘Beck`s Shop’에 안전구역을 마련한 생존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장면.
남자 배우 다섯.
여자 배우 셋.
총 여덟 명의 배우가 한 자리에 모여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리허설 할게요.”
리허설을 진행했다.
촬영 시, 혹은 리허설 도중 배우들 사이에서 기 싸움은 으레 있기 마련이다.
두 명만 있어도 기 싸움이 생기는데, 8명 이상이 나오는 떼 씬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나 같이 할리우드에서 그 무엇도 증명한 적 없는 신입이 눈앞에 있다면 더더욱 맹수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풀 샷에 담긴다면, 보다 좋은 위치에 서려고 하거나.
상대방의 대사 말미에 힘입어 의도적으로 피치를 올리려고 한다거나.
본인이 돋보이도록 장면을 찍고 싶어 한다는 것.
‘마일.’
자신의 분량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하며, 내게 질투의 시선을 보내던 ‘마일’ 이라는 여자 배우.
그녀는 마치, 의도적으로 위에 언급한 모든 것들을 통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리허설 도중 교묘하게 앵글을 가리기도 하고, 대사 타이밍을 한 박자 빠르게 연기하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떨까요?”
쓸데없는 장면에 힘을 주며 자신을 돋보이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 기 싸움은 내게는 특별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도 으레 있어왔던 일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순수할 만큼 정직하게 연기했다.
모국어를 쓰지 않는 다는 점을 제외하면 ‘마일’이라는 배우의 파괴력은 그 어느 것 하나 위협적이지 않았으니까.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연기했다.
어떻게 하면 인물을 온전히 120% 연기 할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에피소드에 진실성을 부여하려면 어떤 얼굴 표정을 지어야할까.
상대방 대사를 들으니 이런 기분이 드네? 이렇게 연기 하면 어떨까.
연기는 합을 맞추는 행위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합’을 자꾸만 깨려고 한다면?
“잠깐만요. 잠깐만.”
연출 감독이 메가폰을 들게 된다.
리허설을 바라보던 연출이 불편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일. 감정을 조금 죽이는 게 어때요? 재희 지금 감정 상태 좋으니까, 이쪽을 살렸으면 좋겠는데.”
“그 말은, 제 연기가 더 별로였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마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연출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녀도 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필드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동료배우들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색을 통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일, 유치한 행동은 그만 두는 것이 어때?’
이렇게.
나는 조금 전의 연기로, 여기 모여있는 이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니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다.
연기는, 피부색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분량?
그걸 따 먹고 싶으면 스스로가 증명해야지.
안 그래?
하지만 이런 말들을 목구멍 깊숙이 숨겼다.
그런 마일과 내가 눈을 맞추었다.
나는 그 어떤 적개심을 배제한 순수한 눈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마일,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해요. 저는 괜찮으니까.”
응, 어디 한번 해봐.
[ 책 먹는 배우님 – 11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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