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15)
115.
“그 말이 무슨 말이죠?”
내 말에 마일이 발끈하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순수하게 웃어보였다.
“제가 마일의 동선에 맞춰서 연기하겠다는 얘기입니다.”
“….”
그러자 마일의 눈에 짙은 ‘혐오감’이 들어섰다.
으음.
이 봐, 그렇게 벌레 보듯 바라보지 말라고.
마일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그냥 하시죠.”
그래.
할리우드에서 알려진 내 ‘인지도’의 한계는 고작 이 정도다.
작품으로 증명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렸으니까.
‘재희’ 라는 이름만 조금 널리 퍼졌지- 내가 뭐하는 놈인지, 어떤 놈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고고하신 할리우드 배우님들에게는 그냥 거슬리는 동양인일 뿐이다.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이런 편견.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허리를 굽히며, 좋게 봐달라고 애걸복걸 할 생각도 없다.
“뭐, 좋으실 대로.”
나는 나대로.
저들은 저들대로.
결국 판단은, 제3자가 하겠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출을 바라보았다.
“저는 준비 끝났습니다.”
그러자 연출 감독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네. 일단 한 번 찍어보죠. 찍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으면 되니까. 자! 스탠바이 갑시다!”
“스탠바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진 장내.
그 틈바구니에서 조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한국에서 유명하다고? 이거 미처 몰라봤네.”
“조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영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배우셨는데.”
“이런, 영국에 와본 적 있어?”
“네. 런던에 여행 차.”
“으하하! 다음에 또 런던에 들리게 된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내가 소개 해 줄 테니까.”
“재희, 뉴욕에는 가본 적 없나요?”
“저 일전에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서울? 서울 맞죠?”
주변에 모여있던 배우들이 일제히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
1인분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어엿한 ‘배우’들을 위한 무대.
이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를 이렇게 증명하는 방법 뿐 이고.
나는 [아다지오>에서 그랬듯, 이들에게 첫 단추를 꿰었다.
유일하게 나를 인정하지 않은 마일은, 미운 오리 새끼마냥 무리에서 동 떨어져 혼자 대본을 노려보았다.
그런 마일에게 내가 말했다.
“편하게 하세요.”
*
“스탠바이!”
슛 사인이 돌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인간 도재희로 서있던 현재의 신체가 비약적으로 팽창하는 듯한 기분.
숨으로 들이마신 호흡이 아랫배를 따스하게 휘감았고 텐션이 올라간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엔진에 계속해서 부채질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액션!”
카메라의 REC 빨간 불이 나를 비추었지만, 나는 옴짝달싹한 입술을 떼지 않았다.
3초.
모아둔 기를 폭발하듯, 단박에 에너지를 뿜어냈다.
“이, 이런! 제기랄!”
할인 매장 2층.
붙박이장, 가구 따위로 1층을 통하는 출입구가 폐쇄되어있는 공간.
‘생존자’ 수십 여명이 한데 모여 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이곳.
“제기랄!”
콰앙!
나는 있는 힘껏 선반을 걷어찼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캔 깡통, 통조림 따위가 떨어졌다.
조지가 내게 다가와 나를 만류했다.
“이봐, 친구. 일단은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 좋겠는데. 밑에 있는 놈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이야.”
“아저씨는 왜 이렇게 침착해요?”
지금, 나 혼자 흥분한 거야?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분노하고, 오열하고, 슬퍼했다.
그런데 이 자는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내 질문에 조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야,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
조지의 시선을 따라, 조금 전 내 품에 안겨있던 꼬마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세실이라고 했던가.
아이를 보자, 들끓었던 속이 조금 식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냉정해지자.
“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 세상이 변했다는 거잖아요. 제가 지난 주에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호호 불어가며 먹을 때 보았던, 영화 [월드 디제스터>에 나오던 좀비들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냉정해질 수 있겠나?
유학원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한국은 어떨까? 내 가족들은?
이런 내 의문에 조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확히는 좀비가 아니라, 더스트Dust라고 하더군. 먼지를 뒤집어쓴 모래 괴물이지.”
“아, 네. 이런 판국에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요. 제기랄. 빌어먹을 라디오 같으니.”
내 시선이 창 밖 으로 향했다.
더스트 건, 좀비건 간에.
웨에에에에엥-!
사이렌이 멎으며 똑같은 멘트의 라디오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캘리포니아 공영 라디오에서는 통칭, 더스트Dust로 불리는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집 밖 외출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고. 창문을 열지 말 것이며.
[절대, 타인과 접촉하지 마십시오.>… 빨리도 말한다.
출근시간. 집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길거리는 이미 점거 당했다.
당장 건물 2층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군대를 동원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있으니 끝까지 생존할 것을 말했지만, 기간을 정해두지 않았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도 말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울화통을 못 이겨 다시 한 번 바닥을 향해 세차게 발길질 했다.
쾅! 쾅!
“제기랄! 제기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한국에 있는 건데.
가족들 곁을 떠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그러자 조지가 다시 한 번 나를 만류했다.
“별로 좋은 행동은 아냐.”
“….”
맞는 말 같아서 행동을 멈추었다. 불 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고 있었으니까.
이제, 냉정하게 고민할 때 다.
나는 그 자리에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매장 2층의 사람들의 몰골은 참혹했다.
부상에 신음하는 사람들, 공포에 절어있는 사람들, 공황장애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 당장이라도 뭔 사고를 칠 것 만 같은 위험한 눈빛을 보이는 사람들.
조지는 세실(딸 아이)을 끌어안은 채, 자리에 주저앉아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 때, 웬 호리호리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러자 술렁술렁 거리던 주변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반장갑을 끼고, 타이트한 검은색 나시를 입고 있는 그 여성은, 어딘지 모르게 강인한 여전사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나가야 한다고? 왜?
이런 내 우려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웬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방송 못 들었어? 무조건 집 안에 있으라고 하잖아!”
그러자 단발머리 여인인 ‘마일’이 사람들을 똑똑히 노려보며 말했다.
“나가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리고는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도?”
해결방안 역시 뚜렷하게 나온 것이 없다.
더스트는 전염된다고 했다.
그럼, 캘리포니아 길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또 가장 중요한 포인트.
‘기간’ 역시, 정해진 것이 없다.
“여기를 보라고. 아무것도 없잖아?”
얼핏 듣기에 저 여인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빌어먹을 마트.
1층에 식료품이 몰려있고, 2층에는 주방용품, 가구, 전자기기 따위가 늘어져있다.
식료품 가위 따위를 씹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안에서 모두 굶어 죽을 셈이야? 차라리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 나아.”
사무실 등에서 발견한 간단한 음식으로는 이 많은 인원이 아무리 아껴먹는다고 하더라도 이틀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부상자도 너무 많고, 도무지 탈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느새 ‘마일’의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
“그, 그런가?”
“역시 나가야겠지? 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너무 걱정되어서….”
“나도 함께 나갈게요!”
나는 ‘조지’를 바라보았다.
“….”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이 상황을 판단하고 있을 그라면, 어떤 해결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라 여겼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딸의 안전이 최우선인 그에게는 어떤 선택도 쉽지 않으리라.
그래서, 대신 내가 입을 열었다.
“…. 가져오면 되죠.”
내 말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반응했다.
“뭐라고?”
“네?”
나는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길 나가는 순간 모두 죽어요. 더스트들이 거리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1층에는 널린 게 음식이죠. 차라리, 더스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1층의 음식을 노리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마일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 다음에는?”
“… 네?”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처럼 여기에 갇혀 살 건가? 할인마트 음식들이나 축내면서?”
“…..”
‘죽음만 기다리는 사형수’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 눈에서도 불똥이 튀었다.
“그 말, 취소해요.”
“뭐?”
내가 사람들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공포 분위기 조성하지 말라고요.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서!”
나와 마일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뭐랄까.
극중 배역의 싸움이 아니라, 실제 도재희와 마일의 신경전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아무렴 어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 보다 몰입할 수 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마일도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바락바락 내가 뿜어내는 에너지보다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연기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정해요!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갈 건지, 아니면 저 동양인 말대로 마트에 남아서 음식이나 축낼 건지!”
“…..”
마일의 말에 조용하던 장내가 들불처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패로 나뉘었다.
이곳에서 나갈 자들과, 남을 자들.
카메라 앞에서의 내 표정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지만, 속으로는 이 말 못할 희열에 미소 지었다.
확실히 알겠다.
나는 연기 할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
*
[데드 매니악>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는 문제는 다름 아닌, 연출팀과 제작팀의 반목이다.도재희 캐스팅 때부터 앓아오던 이 다툼은, 섭외과 완료되며 끝난 듯 보였지만.
아직 명백하게 남아있었다.
최근, HBS 스튜디오에서 찍었던 드라마 포스터와 스틸 컷들이 공식홈페이지와 HBS 케이블 채널을 통해 공개되었다.
‘[데드 매니악>? 좀비 물이야? 호러 물?’
‘이거 뭐야? 완전, 영화 퀄리티잖아!’
‘좀비 물을 시리즈로 볼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데드 매니악>에 대해 전체적인 반응은, 제법 흥미롭다는 의견들이 종종 튀어나왔지만.“부족해요.”
돈에 민감한 제작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반응이 너무 빈약해요. 이정도로는 안 됩니다.”
[라스팔마스의 휴일> 시즌2의 촬영 종료가 임박했다.즉, 동시간대 가장 강력한 시청률 최강자가 벌써부터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는 말.
‘이럴 수가! 벌써 시즌 2라니!’
‘[라스팔마스의 휴일>은 인생 최고의 명작.’
‘이렇게 감질 맛 나는 로맨틱 코미디는 처음’
인터넷 상에서 [라스팔마스의 휴일> 시즌2에 대한 반응은 이미 뜨거울 대로 뜨거웠다.
거센 폭풍이 연일 휘몰아쳤다.
‘[라스팔마스의 휴일> 시즌10까지 나왔으면 좋겠다.’
[라스팔마스의 휴일>이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을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데드 매니악> 팀이었다.“상대가 안 되겠네.”
제작 PD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촬영 현장으로까지 이어지는 듯 보였다.
그 덕에 연출팀은 촬영을 준비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작, 본 촬영이 시작되자 이들은 점점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뭐야? 생각보다 재밌잖아?’
제작팀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하고 연기력 배틀이라도 하듯 불붙은 현장에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고.
연출팀은 배우들의 연기에 화답하듯 더욱 의기양양해지며 소리쳤다.
“오케이! 바스트 갑시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함대가, 조금씩 하나가 되고 있는 순간.
그 중심에서 연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의 그 대머리 제작 PD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여전히 9만 달러가 아깝나요?”
9만 달러.
도재희의 회차 개런티.
“….”
“제 생각엔 19만 달러짜리 배우 같은데. 오히려 싸게 쳤다고 생각되는데… 어때요?”
그래.
우려하던 것 보다 훨씬 재미있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던 것보다 훨씬 연기가 안정적이다.
정말 도재희가 제안했던 말 그대로, 자신들 보다 비중이 큰 주연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저 배우 도대체 뭐야?
왜, 자꾸 눈이 가는 거야? 왜?
하지만 대머리 PD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 글쎄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걱정했다.
“….”
정말, 시즌2에서 40만 달러 이상의 값어치가 되지 않을까.
그 정도 개런티면, 할리우드에서도 최정상급은 아니라도, 정상급에 속한다.
이 정도의 개런티를 받는 동양인 배우는 손에 꼽는다.
‘… 에이, 설마.’
대머리 PD는 아니겠지, 싶은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 책 먹는 배우님 – 11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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