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18)
118.
“실제 할리우드 생활은 어떤가요? 소문으로는 커다란 캠핑 트레일러 두 대를 연결해서 쓴다고 들었는데.”
한세혁의 질문에 내가 쓰게 웃었다.
할리우드가 어떻냐고.
으음, 모르긴 몰라도.
“전쟁터죠.”
보이지 않는 칼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곳.
내가 할리우드에 던진, ‘칼의 힘’도 적지 않다.
아니, 무시무시하지.
한세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괜찮으시다면 [게라드 쇼> 이후에 일어났던 #Do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곳.
할리우드.
[게라드 쇼>의 진행자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가, 존 미켈이라는 스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락으로 끌어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게라드 쇼> 이후 #Do 운동은 일부 인종차별을 일삼는 배우들을 고발하는 형식으로도 번졌다.몇몇 감독이 논란을 일으켰고. 진행 중이던 영화가 엎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로 ‘겉으로’ 드러나는 차별은 크게 보이지 않는 듯 했지만.
뭐, 얼마나 변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알겠지.
[게라드 쇼> 이후에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딱 ‘하나’ 있다.내 인지도.
나는 [7년의 기억> 무대 인사 스케줄을 소화하며 하루를 통으로 비워 홍콩으로 향했다.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즈(이하 APSA) 개막식 사회자를 맡았기 때문이다.
APSA.
아시아권 영화와 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아시아 별들의 잔치.
그곳에서 만난.
“재희?”
“오! 도재희!”
중국, 홍콩, 일본, 필리핀, 대만 등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들.
“사회자로 재희가 온다더니, 정말이었어?”
“[게라드 쇼> 봤어요! 여기서 보게 되다니! 정말 팬입니다.”
[게라드 쇼>를 통해, 이들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을 대신 해준 나는, APSA에 참석한 영화인들 사이에서 이미 ‘스타’였다.“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저도요!”
일본의 유명 여배우도. 홍콩을 대표하는 액션 배우도. 대만 특유의 말랑말랑한 고교 감성으로 한국 극장가를 휩쓴 흥행작의 주인공들도.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두가 나를 알아보며, 사진을 요청했고, 종국에는 사인까지 요청하는 배우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마카 펜을 들어올렸다.
이것 참, 쑥스럽게.
그 때.
“재희!”
“어…? 안녕하세요.”
나와 개인적인 안면이 있는 배우가 한 명 다가왔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할리우드 음악영화 [아다지오Adagio> 오디션에서 탈락의 쓴 맛을 보았던 홍콩 배우 ‘라이킨 방’ 이었다.
홍콩에서 열리는 영화제라, 여기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역시.
“물론이죠. 잘 지내셨죠?”
“네. 재희가 그 오디션에 붙었다는 소식은 나중에나 들었어요. 그 음악 영화 촬영은 잘 끝났겠죠?”
“네. 무사히 끝났습니다.”
나는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 남자. ‘이 오디션에 내정자가 있었어요! 빌어먹을!’ 이렇게 말하며, LA 오디션 장을 박차고 떠났었지.
의도치는 않았지만, 내가 그 ‘내정자’가 되어버렸고.
음, 이거 괜히 미안해지는데.
라이킨 방 역시 이를 의식했는지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 때는 조금 충격적이었지만. 지금은 저 대신, 재희가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게라드 쇼>에 나가 시원하게 한 마디 해줬잖아요. 아마, 저라면 못 했을 거예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람’도 오는 게 정말인가요?”
“누구요?”
“… 그 일본인 가수요. 이름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모토 료.”
일본 락 밴드. ‘초코 버스터’의 보컬.
나와 함께 음악영화 [아다지오> 오디션을 보았던 일본인 뮤지션.
미야모토 료도 APSA 개막식 특별 공연을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다.
“음, 어쩌다보니 얼굴 마주치면 불편한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군요.”
“….”
라이킨 방의 말 대로, 얼굴을 부딪치면 꽤나 불편한 사이다.
누군가는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고.
누군가는 떨어졌으니까.
아마, 오디션이 끝난 뒤 나에 대해 뒤에서 실컷 욕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진즉에 끝난 싸움인데.
“분풀이를 하지는 않겠죠?”
“그럴 리가요. 애도 아니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미야모토 료의 공연팀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일순간 몰려들어 자극적인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미야모토 료가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오가는 것도 잠시.
“괜찮으시면 간단하게 리허설 한 번 하겠습니다.”
“아, 네.”
영화제 진행팀의 설명에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개막식 리허설을 위해 중국 여배우 ‘연쯔이’와 함께 무대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리허설일 뿐이지만, 긴장감이 몸을 차갑게 집어삼킨다.
나를 바라보는 수백 수천여명의 사람들의 눈빛에서 일종의 ‘기대감’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막식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멋지다!”
한 대만 여배우가 유창한 영어로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중국 여신이라 불리는 연쯔이와는 처음 만났지만 제법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했고.
레드카펫 행사. 홍콩 영화 거장의 별세 10주기 회고행사. 개막식 특별 공연들의 진행 순서를 확인하고 차례, 차례 리허설을 진행했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
“다음은, 영화제를 축하해주기 위해 일본에서 날아온 미야모토 료의 초코버스터 공연이 있겠습니다.”
개막식 특별행사 마지막 무대.
미야모토 료가 서있는 무대 중앙에 조명이 들어왔다. 그는 마이크 높이를 조절하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고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짙은 스모키 화장 뒤로 적대감인지 뭔지 모르는 기묘한 눈빛이 오갔다.
그러던 중 돌연, 미야모토 료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노래 들어가기 전에, 멘트를 하나 추가 하고 싶은데요.”
본 무대에 들어가기 전, 공연에 대한 모든 약속을 정하는 것이 리허설이 가지는 본 의미다.
미야모토 료가 ‘멘트’를 추가하고 싶다는 말에 진행 팀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멘트를 추가하시겠다고요? 어떤 멘트인가요?”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미야모토 료가 나를 노려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 노래를, 아시아 영화인들에게 바칩니다.”
“…..”
미야모토 료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Respect 존경’이었고.
“우리들이 우리의 권리를 올바로 찾을 수 있기를.”
그는 오히려 적대감이 아니라 내게 암묵적인 존경심을 담아 보냈다.
“어라.”
재익이 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의외인데.
나는 미야모토 료의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진행 팀을 향해 손을 들고 말했다.
“저도 한 마디 덧붙일게요.”
화답해줘야지.
“아, 말씀하세요.”
나는 ‘기대감’에 가득 찬 수많은 아시아 배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영화들이 많습니다. 부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아시아인들을 위한 영화제.
‘우리들’만의 축제.
“기왕이면 할리우드에서요.”
그 중심에서 태평양 건너 머나먼 곳에 있는 백인들의 시장을 정조준한다.
“도재희! 도재희!”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나를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래.
그 시작은, 나다.
*
홍콩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APSA 개막식 영상은 국내에도 공개되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내 개막식 영상은 화제였고 이러한 내 행보는, 영화 [7년의 기억>이 정식 극장 개봉에 그대로 직격타를 먹였다.
들불처럼 번지는 흥행에 흥행!
[연일 찬사! 역대 흥행 기록을 모두 갈아 치우고 있는 영화 [7년의 기억>! 개봉 첫 주 만에 400만 돌파!] [주말 사이, [7년의 기억> 600만 돌파 가능할까?] [500만 역대 최단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한국 영화의 오늘] [할리우드 산 히어로 영화 [윈드 러너>. 박진우 X 도재희 [7년의 기억>에 밀려나 고전 중] [치솟는 주가, 도재희 국내 차기작에 관심 집중!]영화 [7년의 기억>은 순풍에 돛단 듯 극장가를 점령해가기 시작했다.
한국에 체류한 일주일 가량의 시간 동안, 내가 최종적으로 확인한 수치만 600만이다.
아직, 극장 상영일은 3주 가량 남았다.
“천만? 우습지.”
애초에 내가 기원했던 천만은 우스운 수치가 되어버렸고.
총 예상 스코어는 최소 1200만 이상.
“아냐,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잖아. 평가도 나쁘지 않고, 뒷심만 좀 받쳐주면 1위 자리도 문제없지. 1위가 몇이야? 1,900만 인가?”
“가능해요. 저, 벌써 극장에서 세 번 봤거든요. 크하하!”
“나도 야! 내일 딸내미랑 또 보러 갈 거라고. 으흐흐!”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헤드급들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진우 감독의 영화사 [너울>과 L&K엔터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무택 대표가 껄껄 거리며 말했다.
“홈런을 쳐도, 너무 멀리 쳐버린 거야. 이거 이제 다른 감독들 부담스러워서 작품 내밀 수 있겠냐고. 오히려 일거리가 줄어들걸?”
“응? 어째서요?”
“찍었다 하면 천만이라고. 벌써, 2연속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은 쳐다 도 못 보겠지.”
“에이, 오히려 성가진 파리들이 더 끓어오르겠죠. 그런 어줍잖은 시나리오 가지고도 천만 찍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하며 투자자들 주머니 열 궁리만 하겠죠. 재희만 섭외하면 투자자들이 줄을 설 테니까.”
한동안 이무택 대표와 박찬익 팀장이 기분좋은 설전을 벌였다.
“아니라니까.”
“맞을 걸요?”
“으하하!”
박진우 연출과 권우철 대표, 그리고 나는 그저 옆에서 이를 즐겼다.
한참을 조용히 듣던 권우철 대표가 이를 정리하듯 말했다.
“자자, 무의미한 얘기 그만해요. 여기 모인 사람들, 다들 알잖아요? 어차피 재희가 그런 ‘어중이떠중이’는 쳐다도 안 볼 거라는 걸.”
그러자 이무택 대표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건 그렇지. 재희가 작품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지. 재희야, 너 은퇴하면 나랑 회사 하나 하자.”
“은퇴라니, 이제 시작인 애 한테 그 무슨 저주를..”
“퉤퉤, 은퇴는 내 실수다. 영원히 함께하자! 으하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재주가 너무 아깝잖아. 아니지? 꼭 은퇴 안 해도 되잖아. 재희야. 저것 좀 봐줘라.”
이무택 대표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그러자 박찬익 팀장이 “아!” 하고 소리치며 가방에서 시놉시스와 책 대본 몇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내게 건네주었다.
“재희야, 이번에 네 후배들 들어갈 작품인데. 하나 골라줘.”
“네?”
“조건은 다 비슷해. 재미도 비슷비슷하고. 요즘 영화들. 에이, 눈에 확 띄는 게 없다니까.”
“…. 으음.”
“그런데도 이 중에서 흥행작 하나가 튀어나오겠지? 그냥 눈 감고 꾹 하나 찍어주기만 하면 돼.”
나는 책을 받아들고 휘리릭 넘기는 척 훑어보았다.
그래.
보인다, 보여.
박찬익 팀장 말대로, 세 작품 성적은 다 비슷비슷하다.
“다 별론데요. 그냥 되는 거 시키세요.”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권우철 대표가 덩달아 웃었다.
“그래. 아무거나 하면 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형님?”
“아, 그렇지. 그렇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에이, 이딴 거 아무나 하라 그래. 이것들 보다 재희 차기작이 더 중요하지.”
이무택 대표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지금 미국에서 충분히 바쁘잖아. 그래서 말인데 재희야. 이제 한국 생활 싹 청산하고 미국에 올인 할 생각이냐?”
내 차기작 계획에 대해.
“….”
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아뇨.”
[ 책 먹는 배우님 – 118화. > 끝ⓒ 맛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