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
12.
티저 촬영이 있는 날 이다.
이른 새벽 도곡동 빌라 건물을 나오자, 주차장에 카니발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 재익이 형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일찍 나왔네? 10분 있다 전화하려고 했는데.”
“첫 촬영이라 긴장 되서 그런지 자동으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좀 주무셨어요?”
“그럼, 로드 하던 경력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새벽 공기가 제일 편해. 그럼 갈까?”
“네.”
카니발 문을 여니 제일 뒷자석에는 의상들이 가지런히 걸려있었고 안에는 영미 씨가 타고 있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멀쩡한 얼굴이다.
“안녕하세요오.”
“안녕하세요. 안 피곤하세요?”
“전혀요.”
이틀 전, 우리끼리 저녁을 먹을 때 술을 간단하게 한 잔 먹었는데, 그게 두 병이 되고 세 병이 되더니 급기야 3차까지 달려버렸다.
하지만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영미 씨다.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단 말이지.
“자, 그럼 출발 합니다.”
오랜만에 맡는 새벽 공기에 들뜨기라도 한 듯, 재익이 형이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시작했다.
콜타임은 오전 9시 콜을 받았다.
도곡동에서 춘천까지 이동하는 시간도 있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 청담동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일은, 앞으로 적응해야 할 숙제 같은 일이다.
샵에서 머리를 정리하며 간질간질 메이크업을 받고 있자니 잠이 쏟아진다. 하지만 메이크업을 마치고 영미 씨가 건네준 의상으로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이야, 우리 도 배우! 스타일 장난 아닌데.”
몰려왔던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어때요?”
샘플 사진에도 나와 있는, 모던한 녹색 야상에 청바지만 가볍게 롤 업해서 입었을 뿐인데도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 좋은데요.”
“좋기만 해? 문교랑 김균오 씨 이제 큰일 났네. 재희 옆에 서면 다 죽겠네, 다 죽겠어.”
재익이 형의 칭찬에 힘입어 영미 씨는 내 모습이 흡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빠가 비주얼은 안 빠지니까, 사실 뭘 입혀도 옷걸이가 괜찮긴 해요.”
“아냐. 내가 보기에는 영미 씨도 확실히 의상 고르는 눈이 있어. 응? 안 그래? 이거 내가 입으면 이런 핏 안 나온다니까?”
“그건 당연하죠.”
“… 영미 씨, 은근히 가슴에 못 박는 스타일이구나.”
확실히 내 옷을 입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배역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뭐랄까. 내뱉는 공기마저 점점 몰입되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주변의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이른 시각 청담동 샵 골목에서 쏟아진 경계와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 혼자 밖에서 느끼던 시선과는 조금 이질적이었다.
‘쟤 연예인이야?’
확실히 직접적인 시선들이다.
나는 곧바로 차에 올랐다.
춘천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소윤을 바라보는 시선, 우진을 향하는 손짓, 강혁에 대한 생각 등. 콘티를 살피며 머릿속에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는 캐릭터를 하나로 정리했다.
“이제 다 왔다.”
카니발은 한적한 시골 길에 들어섰고, ‘경강역’ 이라고 쓰여진 조그만 간이역에 도착 했다.
역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만큼 작았지만, 옛 정서가 잘 묻어나는 곳이었다.
물론, 이제는 기찻길로 쓰이지 않고 레일바이크 전용 길로 쓰이기 때문에 주차장도 크게 생기고, 좌우에는 상업용 천막들이 많이 보였지만. 카메라 각도로 충분히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오전 8시 40분.
콜 타임 전이라 그런지, 촬영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장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좀 기다릴래?”
“아뇨. 인사하고 올게요.”
“그럴래? 아무래도 첫 촬영이니까, 그게 좋겠다. 같이 나가자.”
나와 재익이 형은 카니발에서 내려 스텝들 사이로 들어섰다. 촬영감독님과 조명감독님은 일전 대본 리딩 때, 얼굴을 뵈었기 때문에 한 눈에 알아보고 인사 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아! 재희 씨.”
그리고 촬영 퍼스트와 조명 퍼스트 등, 스텝들과도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조연출이 한달음에 내게 달려왔다.
“오, 왜 벌써 나오셨어요? 추운데. 차에서 기다리시면 불러드릴게요.”
“나온 김에 감독님께 인사드리고 갈게요. 감독님은요?”
“섭외 부장님이랑 장소 둘러보고 계세요. 그럼 가실까요?”
나는 조연출을 따라 걸었다.
경강역 바로 뒤편에는 철로가 나있었다. 녹슨 철길과 자갈밭을 따라 조금 걸으니, 감독님을 포함해 연출부와 섭외 부장님이 장소를 둘러보고 계셨다.
“감독님, 재희 씨 오셨습니다.”
“오, 재희 씨. 왔어요?”
유독 나를 볼 때면,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시는 문병철 감독님은 나와 악수를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서보라고 말했다.
내가 자리를 잡자, 촬영감독님이 다가와 감독님과 연신 말씀을 주고받으신다.
그리고 결론은.
“그림 좋네요.”
어떤 식으로 촬영할지 감이 오시는 모양이다.
티저 촬영은 보통 외주 CF감독과 그 휘하 팀이 따로 찍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감독님이 손수 찍기로 자원하셨다고 했다. 미니시리즈 바닥에서 밀려날 위기에 놓여있는 만큼,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그 때, 소윤과 김균오, 그리고 박청아 배우가 나란히 등장했다. 오전 9시. 시간 맞춰서 도착한 셈이다.
“오, 어서들 와요. 아침 일찍 멀리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배우들이 감독 주위에 몰려들자, 자연스럽게 촬영감독님과 조명감독님 등, 헤드급 스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슬슬 촬영에 들어가는 분위기였고, 문병철 감독님이 손뼉을 짝! 치며 말씀하셨다.
“자! 그럼 배우들도 다 모인 것 같은데,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면서 콘티 얘기 좀 할까요?”
“네, 감독님.”
아, 그런데 한 명이 안왔는데.
그 때 조연출이 앞으로 나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아직 문교 씨가 안 왔습니다.”
“응?”
오전 9시 10분. 지각이다.
문병철 감독님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물었다.
“문교 씨는 언제 오신대?”
“확인해 보겠습니다.”
“쯧. 주연 배우가 안 왔는데 그럼 기다려야지. 자자, ‘송문교’씨 오시면 시작 할 테니 대기하세요.”
은근히 이름을 밝히며 면박을 주려는 속셈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첫 촬영부터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으신 듯, 불편한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문병철 감독이 얼마나 권위적인 감독인지는 박찬익 팀장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저 무덤덤한 얼굴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포함한 배우들이 차에서 기다리기 위해 주차장 방향으로 등을 돌리자, 조연출이 무전기에 대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문교 씨 오셨는지 확인해봐.”
곧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지이익! 아직 안 오셔서 방금 전화 해봤는데, 5분 안에 오신다고 합니다.
“뭐? 첫 촬영부터 늦어? 야! 임마! 네가 미리미리 체크했어야지. 전화 안 하고 뭐했어!”
이건 FD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조연출은 그 화를 FD에게 풀고 있었다. 어쩐지 안타까운데.
촬영장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재익이 형은, 눈에 다 보인다는 듯 말했다.
“걱정 마. 보여주기니까.”
“네?”
“감독님이 첫 촬영부터 화낼 수는 없잖아? 우리 보라고 지금 쇼 하는 거야. 너네는 앞으로 절대 늦지 말라고. 안 그럼 애꿎은 애들만 욕먹는다고.”
“… 아.”
“얼른 가자, 춥다.”
감독이 지적하고, 조연출이 화내고, FD가 욕먹고. 그 화살은 매니저에게 가고. 결국 스텝들 사이에 뒷말이 나오는 것은 배우들.
감독이 직접 배우에게 화를 낼 수도 없으니, 애꿎은 중간 사람들만 치고 박는다는 건가.
듣고 보니, 물고 물어뜯는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확히 15분이 지난 9시 25분.
송문교의 차량이 주차장으로 느긋하게 들어섰다.
차량을 확인한 재익이 형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문교 로드가 명길 인가? 이 자식이. 형도 일찍 오는데 늦고 난리야?”
“매니저 잘못은 아니겠죠.”
“알지, 문교 잘못인거.”
내가 차에서 내리자, 재익이 형이 따라 내리며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문교도 처음엔 안 그랬는데… 문교가 좀 약았잖아?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자기 처신은 빠릿빠릿하게 잘 했다고. 근데 주연 되더니, 선배들한테 잘못 배웠어.”
“뭘요?”
“뭐긴, 자기는 ‘주연’이다 이거지. 어차피 9시 까지 와도 촬영은 늦게 들어갈 거 아니까 일부러 늦게 오는 거야. 기다리는 시간 없게 콜 타임 똑바로 달라. 연출부 길들이는 거지.”
나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밖에서 떨고 있는데, 고작 본인 십분 더 자겠다고 일부러 늦게 온다니.
“연출부랑 그렇게 싸워야 해요? 그냥 친하게 지내면 안돼요?”
“문교도 신인 때는 그랬어.”
“….”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재익이 형이 한탄하며 말했다.
“어휴, 이 바닥이 원래 그래요. 완전 정치판이야.”
그리고 재익이 형은 송문교의 로드 매니저인 명길 씨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냅다 명길 씨에게 달려가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첫 촬영부터 늦으면 뭐하자는 거야? 우리 회사 엿 먹일 일 있냐?”
“죄송합니다.”
분명 매니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왜 저럴까.
나는 직감했다.
아, 저것도 보여주기구나.
조연출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송문교 차량 쪽으로 다가오다, 대뜸 재익이 형에게 욕먹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화난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조연출한테 욕먹게 하느니, 차라리 이쪽에서 보여주기 하겠다는 거다. 연출부와 매니저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 싸움이랄까.
“하루 이틀도 아녜요.”
뒤에서 카니발 문이 열리더니 영미 씨가 내리며 말했다.
“다들 겉으로만 웃고 있지, 뒤에서는 싸움 밖에 안한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한심하다.
제작진과 매니저들. 감독님과 배우들.
서로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웃는 얼굴로 등 뒤에 칼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더 한심한 장면은.
드르륵!
카니발 뒷자석 문이 거칠게 열리며 송문교가 황급히 내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 죄송해요. 매니저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감독님은 어디 계세요?”
의상을 미처 입지도 않은 채 헐레벌떡 걸쳐 입으며 허둥지둥 조연출에게 달려간다.
“… 저건 뭐하는 걸까요?”
“보여주기죠 뭐.”
일부로 늦어놓고, 입구에서는 급하게 온 척을 하는 모습이다.
“저런 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 중얼거림에 영미 씨가 말했다.
“먹히죠. 저렇게 급하게 뛰어 들어가는 주연 면전에 대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어요?”
“….”
아니, 틀렸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문병철 감독님은 송문교를 직접 뽑은 애정 있는 감독님도 아닐뿐더러, 약아빠진 배우의 하찮은 변명이 통하는 물렁한 감독도 아니다.
‘매번 주연 배우랑 트러블을 만들어낸 트러블 메이커야’
트러블 메이커.
박찬익 팀장은 문병철 감독을 한 단어로 말해 ‘꼰대’ 감독이라 표현했다. 감독의 권위가 서고, 그 권력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포장해 칼을 휘두르는 감독. 그 과정에서 배우와의 사이가 틀어지고 시청률에 타격을 입지만, 자신의 방법을 바꾸지 않는 ‘자존심’ 강한 감독.
“안 먹힐 거 같은데…”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으로 가보니, 문병철 감독님은 연출부를 대신해 직접 스텝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자! ‘송배우’ 왔으니까 이제 슬슬 시작합시다. 날 새겠네!”
내가 잘못 들었나?
‘날 새겠네.’
송문교를 면박 주려는 의도적인 단어 선택. 대놓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 송문교는 반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가가 일그러진다.
“… 네?”
“응? 못 들었어요? 촬영 준비하자니까? 늦었어요.”
“아,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니저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그럼 네비게이션을 바꿔야겠네요. 그렇죠?”
송문교가 너절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문병철 감독님은 제대로 듣지도 않으신다.
완벽한 철벽.
“…..”
송문교는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라는 눈빛으로 문병철 감독님을 쏘아보았지만, 문 감독님은 상대도 하지 않으셨다.
“… 푸하! 대에-박!”
영미 씨는 속 시원하다는 듯,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팝콘 각. 감독님 성격 엄청 화끈하시네요?”
“그, 그러게요.”
“으흥, 여기 현장 재밌겠다. 대박, 마음에 들어요.”
재미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일 한번 크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영미 씨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영미 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싸움 구경, 재밌잖아요.”
아, 그러세요.
[ 책 먹는 배우님 – 1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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