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0)
120.
영화 ‘제작’이 하는 일은.
자금 조달, 촬영 팀 섭외, 로케이션 확보, 장비 대여 등 광범위하게 걸쳐져있다.
감독이 이런 ‘제작’ 업무를 겸하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다.
본인 영화사에서 만드는 작품 모두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감독의 ‘이름 값’이 있다면- 자금 조달이나 스탭 진을 꾸리는 일도 수월할 수밖에 없으니까.
감독의 이름값이 높을수록, 단순한 연출 뿐 만이 아닌 기획, 제작 같이 영화 전반에 걸쳐 영역을 확장한다.
나는 박진우 연출에게 이런 부분을 부탁했고.
“정말이요? 그럼 도와드릴게요.”
[7년의 기억> 이후, 뚜렷한 항로를 정하지 않았던 박진우 연출은 내가 오를 선박의 일등항해사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시나리오 다 쓰시면 꼭 보여주세요.”
“으음, 그런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네. 기대는 안 할 테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고요. 설렁설렁 봐드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하하!”
“….”
이거, 너무 무섭잖아.
미국에서의 시간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 마냥 쏜살같이 흘렀다.
[데드 매니악> 시즌1 촬영은 막바지에 달했고.영화 [패브리케이터>의 촬영은 시작되었다.
그 사이 있었던 일이라면.
[[7년의 기억>, 역대 흥행 스코어 4위. 1600만 관객 동원!]한국에서는 [7년의 기억>이 역대급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박진우 연출은 메이저 데뷔작으로 단번에 천만 감독에 올랐고.
일본, 중국, 홍콩, 미국, 프랑스, 인도 등.
세계 굴지의 영화 배급사들은 [7년의 기억> 판권 수입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영화사 [너울>은 밀려들어오는 제의에 기존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했다.
이번 일로 조만간 미국 극장가에 개봉할 예정이라고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어쩌면, [데드 매니악> 방영시기랑 시기 겹칠 것 같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예상치도 못했던 호재.
[7년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적당히 무게감 있는 스토리와 어두운 영화배색은 한국보다 오히려 미국의 입맛에 더 맞을지도 모른다.영화를 보고나면 묘하게 오웬 형제가 떠올라 두 영화에 대해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영화.
[7년의 기억>이 가지는 서스펜스는 탁월했고, 벌써부터 미국 영화 평론사이트에 이름을 오르내리며 평점 9.4점의 훌륭한 스코어를 기록했다.“잘 하면 줄줄이 터지겠는데… 연쇄폭탄처럼.”
[7년의 기억>, [데드 매니악>이 연거푸 터지고 찍어 두었던 [아다지오>가 터진다.그럼, 올 연말에 내 얼굴이 전미에 알려지게 되고- 이 연쇄폭탄은 내년 상반기까지 문제가 없다.
“아! 기대하지마세요. [피셔> 때 도 기대했다가 성적 저조했잖아요.”
“흐흐, 그 때랑은 또 다르지. 이번에는 네가 주연인데. 그나저나 박 감독님은 미국에 언제 오신다고 하셨지?”
“다다음 달이요.”
박진우 연출이 조만간 미국에 방문한다.
[7년의 기억> 판권 수출에 관한 방문. 그 외에도 또 다른 업무가 있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는 내게도 알려주지 않았다.“무슨 일이시지? 네가 쓰고 있는 그 시나리오 손봐주시려고 오시는 거 아냐?”
나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 작업에 도움을 주려는 깜짝 방문이 아니냐는 재익이 형의 추리는 꽤나 탁월한 듯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는 미국에서 작품 하나 하시지 않을까 싶은데.”
“응?”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이미 [양치기 청년>으로 세계무대에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린 바 있다.
거기다 [7년의 기억>을 통해 아시아 극장가에 강풍을 불어 일으켰으니, 해외 시장에서 탐내는 감독이 되었다.
그는 재능 가득한 젊은 감독이니까!
“왜, 선댄스 영화제 끝나고 옴니버스 영화지만 할리우드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으셨잖아요.”
“아! 그렇지! 그게 제일 가능성 높겠다. 할리우드에서 입봉 하는 한국인 감독이라..!”
뭐, 아직까지는 섣부른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뭐가 되었든, 박 감독님은 잘 되실 거예요.”
“그렇겠지. 아이고, SAFA 건물에서 보았던 그 신인 감독님이 벌써 천만 감독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 빨라.”
박진우 연출은 날아오르고 있다.
“이제는- 저만 잘하면 되겠네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보다 더 잘하고 있을 수가 있나? 자신감을 가져.”
“푸흡, 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자신감은 가득 차 있는 상태다.
드라마 [데드 매니악>의 촬영 주도권은 내가 가져왔고.
오웬 형제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 정도.
아직 제목도 정하지 못한 시나리오를 열심히 머리 굴려가며 쓰고는 있지만, 이야기의 결말이 나지 않은 상황이라.
[?/?]내 능력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일단 빠르게 완결까지 쓴 상태로, 능력의 도움을 받아 대본을 수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음, 3개월 안에는 할 수 있겠지?
“자, 도착했습니다.”
에이전트 빌이 차량을 정차시켰다.
몇 번 와봤다고 벌써 익숙해진 LA 한인 타운.
한국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곳곳에 보이는 한글 간판과 한국인들 덕분에 나름대로 한국적인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곳.
나는 두꺼운 롱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 현장을 향해 걸었다.
“아! 오셨어요!”
“어서 와요! 재희!”
연출팀들이 나를 반기고, 스탭들이 내게 윙크를 날렸다.
영화 [패브리케이터> 촬영장.
철저히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
촬영 현장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내 이름과 함께 부러움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와, 도재희다.”
“…”
이런 반응은 이미 익숙하다.
한정적인 인지도랄까.
“여기”
재익이 형이 내 얼굴이 프린팅 되어있는 스크립트 대본을 건네주었다.
오늘 내 촬영 분량.
# 14. 사무실.
이직을 결심한 내가 영화 특수의상 팀 면접을 보는 장면.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대사들을 요리조리 다듬고 있을 때, 내게 악수를 청하는 흑인 배우가 등장했다.
“헤이, 재희.”
마이클 D. 조나단.
30대 후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였다.
스타급의 유명 인지도를 구가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오웬 형제들의 전작과 전전작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실력파 배우.
내 특수의상 팀 ‘사수’ 역할로 깨알 같은 코미디 연기를 보여줄 예정이다.
“재희, 잘 지냈어요?”
“그럼요. 마이클은 어때요?”
“저는 매일 좋죠. 그러고 보니, 재희 오웬 감독님들과는 촬영이 처음이죠?”
“네. 처음입니다.”
‘처음’ 이라는 말에 마이클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웃었다.
“오케이. 좋아요. 내가 오웬 감독님들과 작품만 벌써 세 개 째인데. 한 가지 충고할게요. 음, 조언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네. 들어볼래요?”
“오, 어떤 건가요?”
“이것만 명심해요. 오웬 감독님들은 절대 ‘애드리브’를 허용하지 않아요.”
“….”
애드립 금지라.
장난스러운 얼굴로 던진 조언이지만, 그 말의 무게는 실로 대단했다.
“… 정말요?”
“정말이에요. 오웬 감독님들 앞에서 이제껏 애드립을 성공한 배우는 단 한명도 없었어요.”
영화는 감독 예술이고, 오웬 감독은 머릿속에 있는 정확한 이미지만을 캐치해 장면을 ‘배열’ 한다.
애드립을 원하고 장려하며 더 끌어내려는 감독이 있는 반면, 이런 감독의 세계관을 어지럽히는 방해요소로 받아들이는 감독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웬은 철저한 후자.
“토씨 하나 안 틀리도록 조심해요. 자신들이 쓴 스펠링 하나에 힘이 실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철저하게 ‘계산 된’ 연기를 좋아한다.
“일전에 그것도 모르고 갖가지 애드립으로 연기 끝내고 칭찬을 기다리던 배우 한 명이 욕을 엄청 얻어먹었다고. 그 따위로 할 거면 나가! 이렇게.”
배우가 감독 성향에 맞추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마이클, 조언 고마워요. 새겨들을게요.”
애드립 금지만 조심하면, 괜찮다 이거지?
간단한데?
그 때, 코너 오웬이 등장하며 메가폰을 들고 내게 외쳤다.
“재희! 어서 와요! 오늘 신나게 한 번 찍어 봅시다!”
세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보던 마이클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좋아 보이죠?”
“네?”
“저 천사 같은 얼굴이, 촬영장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잘 봐요.”
“… 음?”
“여러가지 의미로 전설적인 사람들이오.”
그는, 첨언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악마요, 악마.”
“….”
아, 그러세요.
*
“이것들이 내 영화 말아먹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군! 시간이 몇 시야! 제기랄! 이래가지고 한 씬이라도 찍겠냐고!”
“소품이 왜 이따위지? 내가 이런 걸 주문했나? 이런 쓰레기를 카메라에 담으라는 말이야? 테이블은 왜 브라운 색이지? 내가 분명 스테인리스 테이블로 준비하라고 했을 텐데! 한눈에 보기에도 차갑고 냉혹해 보여야 한다고!”
코너, 오너 형제들은 그야말로 현장의 무법자였다.
“제기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터지는 군! 비켜! 내가 직접 옮길테니까.”
가만히 있는 법 없이 크루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본인들이 직접 소품을 들고 뛰어 나르기도 했다.
“….”
뭐랄까.
여유로운 할리우드 환경과는 다른, 한국 드라마 팀에게서 보던 모습이랄까.
[청춘열차>의 문병철 감독이 떠오른다.오웬 형제들은 마이클의 말 대로 ‘악마’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런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고집이 그들을 지금의 명장으로 만들었으리라.
“다 죽어버려어어어어!”
“….”
그렇게 믿고 싶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 준비가 끝나고, 스탠바이 위치에 섰다.
“슛 들어가기 까지 정확히 17분이 걸리는군.”
코너 오웬이 편안한 얼굴로 메가폰을 들며 말했다.
“재희! 연기 편하게 해요. 어차피 늦었으니까.”
“….”
엄청 불편한데요.
일상과 영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지지.
마치, 지킬 앤 하이드를 보는 것 같다.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나에 반해 스탭들이나 전작을 이미 경험한 마이클 같은 배우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도면 아직 괜찮으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
아, 그러세요.
도대체 뚜껑이 열리면 어떻게 변하는 거지?
부디, 그 모습을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잘 하자.
애드립 없이 연기하는 것.
온전히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힘’ 만으로 연기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 익숙한 방법이다.
또,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방법.
“갈게요!”
차갑게 식어버린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내가 잘하는 것 뿐이지.
나를 고정하고 있는 ENG 카메라에 빨간 불이 번뜩였다.
곁눈에 들어오는 빨간 불과 동시에 나는 텍스트에 완벽하게 살고 있는 ‘세인트 리’의 삶에 녹아들었다.
액션 사인과 동시에 열리는 내 입술. 감정이 들어간 호흡, 삶의 흔적을 옅볼 수 있는 눈. 은은하게 풍기는 힘까지.
“…..”
나와 마이클의 연기가 끝났다.
그러자 코너 오웬이 말했다.
“컷! 다시 갈게요!”
컷? 다시?
“…..”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모니터 방향을 바라보았다.
NG라고?
분명, 이상한 부분은 없었는데.
그 순간 코너 오웬이 끼고 있던 헤드폰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젠장!”
코너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메가폰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싸해졌던 분위기를 180도 반전시켰다.
“너무 훌륭해요! 그런데, 명백한 내 실수에요. 인정합니다. 재희! 다시 한 번 더 갈게요! 이번에는 빌어먹을 애드리브 따위 신경쓰지 말고 재희가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해요! 똥을 싸던 뭘 하던, 지금 당신 감정에서 하고 싶은 그대로!”
“아.”
하이드가 지킬로 변하는 순간!
“뭔가, 더 나올 수 있을 것 같군요. 안 그래 오너?”
“그걸 말이라고 해? 마음대로 날 뛰어요 재희!”
코너 오웬의 극찬에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마이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라고…”
그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오웬 형제가 내게 애드리브를 허락했다.
[ 책 먹는 배우님 – 12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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