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2)
122.
“불렀어?”
재익이 형은 한달음에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일찌감치 짐작한 눈치다.
“다 썼나보네?”
“네.”
“봐도 돼?”
“물론이죠.”
“그럼. 난 종이로 읽는 게 익숙해서.”
재익이 형이 노트북을 돌려 세웠다. 블루투스 프린터로 프린팅 한 뒤, 종이뭉치를 하나로 묶어 쇼파에 앉았다.
“쉬고 있어. 시간 좀 걸릴 거야.”
“….”
아무래도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는걸.
채점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재익이 형 옆 자리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오늘 저녁에 간단히 맥주 어… 응?”
우당탕! 거실로 내려온 영미 씨와 초희 씨는 우리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감지하고는 쇼파 앞으로 몰려왔다.
“뭐야, 뭐야. 다 쓰신 거예요?”
“으음. 그렇다고 할까.”
“나도! 나도!”
영미 씨와 초희 씨도 제각각 대본 프린팅을 하더니 쇼파에 앉아 종이뭉치를 들어올렸다.
“이래봬도 현장 경력만 몇 년 인데요.”
“저는 순수하게 관객의 시선으로 봐드릴게요!”
졸지에 내 시나리오 감평 시간이 되었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내가 만들고, 내가 주연을 연기할 영화.
한국 팬들에게 일종의 선물이 될 이 영화는- 조금 뻔할 수는 있지만 극장가에서 확실히 먹히는 신파 코드에 판타지를 접목 시켰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판타지지만, 뜬금없이 강남 시내에서 다 때려 부수는 영화는 아니다.
특별한 존재가 들려주는- 추억과 인연에 대한 ‘인간 동화’
“우와, 내 이름이 등장하네? 푸하! 영미래!”
처음에는 재잘재잘 떠들며 읽기 시작하던 세 사람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사락-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려온다.
침 삼키는 소리. 입술을 부르르 떠는 소리. 호흡이 조금 씩 불안정해 지고. 팽- 코를 푸는 소리.
이 소리들이 마치, 노곤 노곤한 몸을 재워 줄 자장가처럼 들려왔지만 나는 눈을 부릅뜨고 기다렸다.
대본을 가장 먼저 읽은 재익이 형이 나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정말 네가 쓴 거야?”
“…. 이상한가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재익이 형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아직 영미 씨와 초희 씨가 다 읽지 않은 상태라 말을 아꼈다.
대신, 재촉하기 시작했다.
“영미 씨. 아직 멀었어?”
“네.”
“그럼 먼저 말해도 돼?”
“기다려요. 스포일러 하지 말고.”
“으음, 그럼 빨리 읽어줄래?”
“말 걸지 마요. 지금 완전 집중했으니까.”
“영미 씨, 현장 경력이 몇 년인데 너무 느린 거 아냐?”
영미 씨는 당장이라도 ‘닥쳐욧!’ 이라고 쏘아 붙이고 싶은 눈빛으로 변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는 듯 보였다.
“….”
어이, 이봐요. 싸우지들 말아요.
“다… 읽었다.”
내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 초희 씨는 힘이 풀린 듯 손에 들린 대본을 쇼파 위에 사라락 놓더니, 티슈를 들어 올려 힘차게 코를 풀었다.
“프에엥! 팽!”
닭똥 같은 눈물은 덤으로.
가장 마지막에 대본을 다 읽은 영미 씨는 있는 힘껏 울음을 참는 얼굴로 변했고, 이를 본 재익이 형이 깔깔 거리며 웃었다.
“푸흐히! 얼굴 좀 봐!”
“닥쳐요!”
영미 씨의 손바닥이 재익이 형의 등짝에 날아들었다. 그 덕분에 눈물로 어색해질 뻔 했던 거실 공기가 확 풀렸다.
“좋아. 그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얘기 해 볼까? 솔직하게 말해 줘야 재희가 수정할 때 도움 되는 거 알지?”
“알거든요.”
“좋아. 재희는 마음의 준비 끝났지?”
“네.”
“그럼, 자유롭게 손들고 얘기해보자. 누구부터 할래?”
영미 씨가 잽싸게 손을 들어올렸다.
“저요! 우선, 신? 도깨비? 이런 특별한 존재가 있다는 것에서 조금 냉정해지긴 했는데, 사람들의 추억을 공유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너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맞아요. 추억이라는 매개체를 주고받는 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로맨틱하고 아름답다고 할까.”
“특히 각각의 사람들이 인연이 마지막에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에서 소름이 쫙.”
영미 씨는 팔을 걷어 올리며 부르르 떨었고, 재익이 형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너무 재밌게 읽었어. 솔직히 놀랐다니까, 이정도로 써낼 줄이야.”
“맞아요. 그냥 다음 달에 촬영할 시나리오라고 해도 될 듯.”
“인정.”
칭찬 릴레이가 이어지고, 재익이 형이 안 되겠다는 듯 마무리했다.
“자, 이제는 칭찬 말고. 각자 부족했던 부분을 말해보자.”
그러자 재잘재잘 떠들던 영미 씨와 초희 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없는데.”
“그러게. 저도 못 느꼈어요.”
으음, 그래?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형은요?”
그러자 재익이 형이 당황스럽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나, 나도.”
일단은 합격이다.
하지만.
[영화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가 흡수 가능합니다.] [흡수 하시겠습니까?]프린팅 된 대본은 은밀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얼른 나를 수정해줘!
고쳐줘!
“밥 먹자! 시나리오 초고 완결 기념으로 파티 어때!”
“아싸! 좋아요!”
나는 내 크루들이 자리를 떠난 틈을 타 쇼파 위에 올려진 대본 한 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수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박진우 연출이 미국에 왔다.
방문 목적은, 영화 [7년의 기억>의 현지 배급을 담당하는 영화 배급사이자, TV 채널까지 보유하고 있는.
UMC(United Movie Cinema)와의 계약 문제. 현지 인터뷰 등등 다양하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배급사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이 복수로 존재하듯.
미국에도 UMC, AMT, US씨어터 등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영화 [7년의 기억은> UMC 로고를 달고 있는 영화관에서만 상영을 한다.
하지만, UMC는 전미에 상영관을 보유하고 있는 메이저로 미국 어디에서나 [7년의 기억>을 볼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응원 차, 또 인터뷰 차 박진우 연출이 머물고 있는 웨스트 할리우드의 어느 비즈니스 호텔을 찾았다.
이미 호텔 프레스 존은 취재를 온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와, 사람 봐. 박 감독님이 이 정도신가?”
“아마, UMC에서 부른 기자들이겠죠.”
“어떻게 하지? 정문으로 들어가?”
“아뇨.”
이 자리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기에, 나는 눈치껏 후문으로 입장한 뒤, 박진우 연출이 있는 6층에 도착했다.
VIP룸.
배급사에서 특별히 지급한 넓고 쾌적한 룸에 들어서니 박진우 연출이 서 있었다.
“도 배우님!”
그는 손에 인터뷰를 진행할 쪽 대본을 들고 있었는데, 빼곡하게 친필로 적힌 영어 스펠링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하려니, 평소와는 달리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한국에서요? 그냥 한량처럼 지냈습니다. 못 만나던 사람들도 좀 만나고. 술도 마시고. 으하하! 도 배우님은 드라마 방영 앞두고 계시다면서요?”
“네. 내일 모레요.”
“축하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눈도장 제대로 찍으시겠어요?”
영화 [7년의 기억>이 이번 주에 미국에서 개봉한다.
그 전인 내일 모레.
드라마 [데드 매니악>이 채널 HBS를 통해 일부 유럽을 포함한 전미에 방영을 시작한다.
전미, 아니 세계무대에 내 얼굴을 알릴 준비가 끝난 것이다.
물론, 이것뿐이면 섭섭하지.
내 남다른 비상도 준비를 끝냈다.
“시나리오 준비는 잘 되어 가시나요?”
“네, 그럭저럭. 부끄럽지만… 나중에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메일로 보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들고 왔습니다.”
재익이 형이 가방에서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 프린팅 대본 한 부를 꺼내 박진우 연출에게 건네주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95/100] 이라는 수치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거 찍을 수는 있는 대본인지, 아닌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제가 제작을 맡았는데, 당연히 꼼꼼히 살펴야죠.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 제목 느낌은 좋은데요.”
박진우 연출이 미국에 도착하면서, 그간 밀려왔던 스케줄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다.
드라마 방영, 영화 2개 연달아 개봉.
거기다- 내가 준비할 영화 프리 프로덕션 까지.
우리는 반드시 미국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가슴 속에 ‘뜨거움’ 한 조각씩을 품고 호텔 1층의 프레스 존으로 내려갔다.
미국의 저명한 영화 잡지, 신문사 등에서 나온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빠르게 눌렀고. 질서 정연하게 질문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영화 반응이 상당했는데, 미국에선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미국 영화 산업의 중심, 할리우드에서 두 명의 한국인이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좋은 반응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내 가슴 속에 품은 ‘뜨거움’은 본질적으로 조금 더 노골적이다.
겸손 뒤에 숨겨진 본심.
다 씹어 먹고 싶습니다.
*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국과 시청률 스케일 자체가 다르고 집계방식도 많이 다르다.
결론을 말하면, [데드 매니악>의 1화 시청률은 790만 명으로 12월 첫째 주 시청률 순위 4위를 기록했다.
그에 반해 [라스팔마스의 휴일 시즌2>는 시청률 1,100만 명을 동원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둘째 주에 이변이 일어났다.
한 주 늦게 입소문을 탄 [데드 매니악>은 북미 전역을 시끄럽게 달구며 역주행을 시작했고.
둘째 주에 시청률 천만을 돌파하며 2위를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내 배역 에피소드가 있는 3회, 4회 분량이었다.
[미친! 믿을 수가 없어! 지금 기사 봤어요. 재희?] [데드 매니악> 크루들은 쉴 새 없이 내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왔다.모두가 축하해주는 가운데.
유독 잠잠한 쪽은, 내 개런티를 가지고 ‘협상’을 시도했던 대머리 제작 PD 였다.
그는 소리 없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게 연락하기 무안해서 입을 다무는 것일까.
어쨌든 내게는 즐거운 상황이다.
더더욱 재미있는 점은.
이 둘째 주에 [7년의 기억>이 UMC를 강타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미국 영화시장은 관객이 영화를 보며 ‘자막을 읽어야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높은 진입장벽이 존재하는 시장이다.
미국 스크린 점유율이 높은 영화는 모두 ‘영어권’ 영화들이고, 비영어권 작품 중 흥행작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7년의 기억>이 미국에서 먹힐 것이라는 반증은, 그냥 하는 예측이 아니었다.
미 영화 집계 방식은 관객 수가 아니라 ‘수익’으로 따지게 되는데.
“벌써?”
“아직 개봉 한지 얼마 안 되었잖아?”
개봉한 지 3일 째.
벌써부터 7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동양인 배우에게 흔치 않은, 드라마와 영화로 이어진 연쇄폭탄 때문이다.
그리고 이 폭약은 더욱 강해질 전망.
내 에이전시인 UAA의 에이전트 빌은 설레발을 치며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거,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찮아요. 이번 시기를 발판 삼아서 제대로 뛰어 올라야 합니다.”
“….”
아, 그러세요.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그 발판은 준비 중이다.
당신만 몰랐을 뿐이라고.
“해일이 몰아칩니다! 파도가 클 때, 지금 서핑 보드를 들어야 해요! 주연급 오디션 하나 준비할까요?”
“아뇨.”
해일이 불어칠 때, 급하게 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욱 거세게, 미친 듯이 불어 닥칠 때 까지 기다릴 것이다.
왜냐고.
내게는, 엘라니 오코너의 음악이 담긴 또 다른 흥행 카드가 하나 더 존재하니까.
“차기작은 한국에서 합니다.”
“….”
에이전트 빌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 책 먹는 배우님 – 12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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