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3)
123.
“하, 한국이요?”
“네.”
“하지만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이러다 일이 뚝 끊기기라도 하면…”
UAA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내 선택은, 내가 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 수년 간 굴렀던 몸이라고.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아닐 것 같은데요.”
피부로 느껴진다.
돌아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비영어권’ 작품이 고작 800여 개의 상영관으로 개봉 3일 만에 뚜렷한 실적을 내었다.
또, 드라마 [데드 매니악>은 시즌 2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의 욕심대로 시즌 8까지 나와도 될 만큼, 거세게 성장 중이다.
동 시간대 방영자 수, 천만 명.
“내년 상반기 1월 말. [아다지오>가 개봉하면…”
거기다 대형 배급사와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아 실질적인 상영관 수는 적지만, 개봉 시기가 빠르고 남다른 네임 벨류를 자랑하는 오웬 형제의 [패브리케이터>까지 가속을 붙는다면.
“일은 끊이질 않을 겁니다.”
“… 아.”
“이렇게 까지 했는데 끊긴다면, 제 능력이 이것 밖에 안 되는 거겠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최소한 내가 배짱을 부릴 수 있는 [데드 매니악 시즌2>가 존재하니 할리우드 활동은 계속 된다는 건 확정.
그나저나 재계약 때 개런티를 얼마를 불러야 할까.
… 천천히 고민하지 뭐.
에이전트 빌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듯 했다.
개봉 시기, 적절하게 터지는 작품들. 거기다 할리우드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일으킨 반향을 생각해 본다면.
“좋아요.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
“그런데 재희. 그래서 미국 활동을 언제 재개할 건가요?”
너희들이 최대한 안달 난 타이밍.
…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글쎄요.”
아마도, [데드 매니악> 시즌2 촬영 전에는 돌아오겠지.
*
박진우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최대한 덤덤하게 시나리오를 쥐었다.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처음, 도재희가 자신에게 ‘제작’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만 하더라도 흔쾌히 허락했지만, 이를 아주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도재희를 나쁘게 보지는 않지만.
배우들이 연달아 흥행을 하고 연기에 자신감이 생기다 보면 으레 감독으로 눈을 돌리기도 하니까.
그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잘 나가는 스타의 재미있는 ‘취미’ 정도로 여겼다.
물론, 함께 작업하며 ‘제작’ 분야를 익힌다면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지금 같이.
할리우드 초대형 영화사, 하이마운트에서 ‘영화 입봉’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도재희에게 비밀로 하며 애초에 미국을 방문한 ‘진짜’ 목적은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진지한 자세로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갔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가며 ‘망각’하지 않는 특별한 존재.
그가 들려주는, 인간들의 아름다운 추억.
LA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처음 박진우가 대본을 다 읽어냈을 때는, 의심부터 했다.
정말 직접 썼다고?
그래서 SAFA(서울영화아카데미) 때부터 자신과 쭉 함께했고 영화사[너울>의 제작부장을 맡고있는 김민희에게 대본을 건넸다.
“이것 좀 읽어봐.”
“응? 재희 씨가 쓴 대본?”
“응.”
김민희가 대본을 다 읽을 때 까지 비행기는 한국에 도착하지 않았고. 박진우는 머릿속에 들어서있는 이 흥분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물을 수 있었다.
“어땠어?”
“… 이거, 재희 씨가 직접 쓰신 거 맞아?”
“그렇겠지. 잘 썼지?”
“자, 잘 썼다마다… 너무 놀라워. 어떻게 이렇게…?”
“줘 봐. 다시 읽어야겠어.”
박진우는 다시 꼼꼼하게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텐데 ‘기본’을 충실하게 지켰다.
대사 위주인 드라마 대본과 지문 위주인 영화 대본의 차이점을 매우 잘 이해한 상태. 간결하게 쓴 문체에는 쓸모없는 지문이 없다. 서사부터 결말까지 완벽한 구조에. 관객이 환장할 수밖에 없는 코드 또한 가미되었다.
“믿을 수가 없군.”
평생 영화 일을 해온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
어느새 이륙 시간은 1시간 앞으로 다가왔지만, 손에서 시나리오를 놓지 못했다.
잠 한숨을 자지 못할 만큼 신선하게 몰아치는 충격.
이륙 직전까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박진우는, 이륙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곁에서 잠들어있는 김민희를 흔들어 깨웠다.
“민희야. 일어나봐.”
“으, 응? 도착했어?”
“응. 그것보다 나, 전화해야겠어.”
“갑자기? 어디에?”
“하이마운트. 그 제안, 거절해야겠다고.”
단순한 우정으로 선택한 문제가 아니다.
할리우드 입봉 기회를 걷어차면서도 놓치지 않고 싶은 영화.
“도 배우님이랑, 이 영화 해야겠어.”
“… 진지하게 고민한 거 맞지?”
“응.”
김민희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럼 그렇게 해. 나는 박 형 하자는 대로 항상 따라갔으니까.”
시나리오를 꽉 움켜쥔 박진우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도착하자마자 스탭 꾸리자. 아니, 먼저 L&K에 다녀와야겠어.”
이들은 같은 대본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이 영화, 된다. 무조건.”
흥행할 것이라는 ‘확신’.
*
[스탭들은 [7년의 기억>에서도 합을 맞췄던 분들, 그대로 모시려 합니다. 촬영 철 감독님. 조명은 신 감독님. 괜찮으세요?] [네. 저야 좋죠.] [이건 이렇게 진행하도록 하고… 우선 대본 몇 군데 돌려본 결과 반응이 괜찮아요. 일단은 도 배우님 실명을 밝히지 않고 신인작가가 썼다고 했는데도 벌써부터 투자하겠다는 곳이 상당합니다.]“….”
작가가 이름을 숨겼다.
깜짝 공개? 뭐, 의도한 것은 아니다.
나는 마지막 문자를 전송함과 동시에, 문자 한 통을 더 보냈다.
[이제 비행기 시간입니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동시에 휴대전화를 항공모드로 변경하고,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어이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지.”
올 하반기는 정말 미국과 한국을 계속해서 이리저리 오가는 느낌이다.
그 때문에 재익이 형이나 영미 씨 같은 내 크루들의 피곤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안해요 형. 저 담당 안했으면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 할 텐데.”
“무슨 말이야? 내가 너 따라와서 얼마나 덕 보고 있는데.”
“… 무슨 덕이요?”
“흐흐. 네가 커야 나도 잘 되는 거라고.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좀 쉬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석을 뒤로 기대 몸을 뉘였다.
뭐,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애초에 한국 활동과 미국 활동, 두 가지 꿩을 다 잡고 싶은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감수해야겠지.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영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같은 두려운 감정은 아니다.
뭐랄까.
현장 스탭들을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같은 걱정에 가깝다.
내게는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콘티뉴이티’가 없다.
콘티 전문가를 데리고 일찌감치 작업에 들어갔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지 않은 이유는 내게는 콘티가 필요 없으니까.
그냥, 머릿속에 대본을 집어넣었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 이미지들을 그대로 구현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콘티를 만드는 일은, 적어도 내게는 시간만 잡아먹는 쓸데없는 짓 인 것이다.
이런 나를 스탭들이 믿어줄까.
이들이 하던 익숙한 작업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 될 지도 모른다.
왜냐면.
이미 섭외할 배우부터, 로케이션까지 내 머릿속에 확고하게 존재하니까.
고심과 서류를 통해 느릿하게 작업하던 기존의 방식에 비교해본다면 내 방식은 즉흥적인 선택으로 보일 테니까.
“으음.”
지금 내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는, 대왕 문어다.
내가 요구하는 바를, 확실하고 빠르게 도와줄 날랜 손과 발이 필요하다.
다른 것은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
이런 나를 이해해줄까.
처음에는 의심할 지도 모르겠다.
결과로 보여주면 되지 뭐.
*
한국에 돌아왔다.
재밌는 사실은, 한국 기자들은 내가 차기작 행선지를 한국으로 낙점했다는 내용만 알지, 어떤 작품에 들어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차기작 러브콜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떤 작품에 들어가고 싶으신 건가요? 도 배우님!”
“[데드 매니악>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방영 중인데 벌써 돌아오신 것은, 할리우드에서 활동은 중단하신건가요!”
“차기작에 대해서 다들 궁금해 하는데! 한 말씀만 해주시죠!”
나는 이런 질문들에 일절 답하지 않은 채, 차량에 탑승했다.
차 안에는 박진우 연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 바로 물었다.
“감독님. 기자 분들이 제가 영화 찍는 거, 아무도 모르네요?”
그러자 박진우 연출은 고개를 으쓱했다.
“네. 말 안 했습니다.”
“왜요? 공개하셔도 괜찮은데.”
그러자 박진우 연출은 아주 음침하게 웃어보였다.
“후후, 직접 하셔야죠.”
“네?”
“그래야, 반응이 더 뜨거울 테니까요.”
“….”
아, 이제 제작이지.
박진우 연출은, ‘제작’ 파트를 맡게 되며 아주 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금 확보’, ‘흥행’, ‘이슈’ 에 중점을 두고 나를 서포트 한다.
“콘티는 준비하셨습니까?”
박진우 연출이 물어왔다.
“아뇨.”
박진우 연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보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전작에서 저와 콘티 작업하던 분이 있는데, 잘 하십니다. 지금부터 작업 들어가면 적어도 내달 안으로 결과물을….”
“아뇨. 괜찮습니다.”
“음, 네?”
“콘티, 필요 없습니다.”
내 대답이 오만하게 들렸을까. 박진우 연출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더 빨랐다.
“감독님. 이번 영화, 준비기간 한 달. 촬영 한 달로 잡고 싶습니다.”
“…. 네?”
“지금부터, 두 달 만에 끝내 버리시죠.”
한 달 만에 촬영을 마치는 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주 잘 준비한다면 한 달 만에 촬영을 털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잘’ 준비했을 경우다.
박진우 연출이 되물었다.
“하, 하지만… 콘티도 없는데요?”
“콘티는…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내 말에 박진우 연출이 되물었다.
“드라마처럼 휙휙, 찍으실 생각이십니까?”
미니시리즈나 드라마의 경우 제대로 된 콘티 없이 촬영하는 경우도 많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감독이 촬영 직전 샷 사이즈 정도만을 설정하는 경우가 다수.
하지만 이는 ‘대사’ 위주인 드라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용 전달’이 목적인 드라마는 콘티 없이도 기본 개념만 안다면 술술 찍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샷 사이즈, 앵글 각도, 달리 인&아웃. 카메라를 어떻게 쓰고, 조명을 어떻게 쓰고. 배우가 어떻게 서느냐에 따라 영상의 색이 무한히 달라지며. 최고의 영상을 찾아내는 장르.
그리고 나는, 이를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아뇨. 대충 찍지 않습니다.”
“…”
“아주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박진우 연출에게 물었다.
“도와주실 거죠?”
“… 아, 네, 네. 물론이죠. 그런데 세트는….”
박진우 연출이 진이 빠진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제 지어야죠. 야외 촬영 먼저 끝내면 됩니다.”
“…. 혹시, 생각해두신 캐스팅도 있으십니까?”
“네. 머릿 속에는요.”
“벌써…”
돈과 세트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내 영화의 장면들을 다시 한 번 배열했다.
이 장면을 뒤로 넣고.
이 장면은 앞으로 넣고.
나는 씨익- 웃어보였다.
“음, 그 전에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네요. 제 차기작에 대해서.”
[ 책 먹는 배우님 – 12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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