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5)
125.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지문은 조연출이 읽겠습니다.”
영화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감독과 배우를 겸하게 된 나는, 영화사 [너울> 미팅 룸에서 가장 상석에 앉았다.
“….”
감독 자리.
새삼, 느낀다.
이 자리는 참으로 무거운 자리라는 것을.
감독과 배우를 겸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첫째는, 모든 장면을 배우가 아닌, ‘연출가’의 시각으로 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장면을, 치밀하게 계산하며 읽어야 한다.
“#1. 가정집 / 낮 / 내부. 블랙스크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투는 사운드가 흘러나오며 네임타이틀이 나타나고 이내 곧 접시 정도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들의 귀가 나타난다. 소리를 듣기 싫은 듯, 귀에 손가락을 꽂는 아들. 적막이 감돈다. 그때 들려오는 아들의 나레이션.”
둘째는.
“NA) 가끔은, 이렇게 귀를 막아야 편하다.”
내 연기에 대해서 스스로 무서우리만치 냉정해야 한다는 점.
“귀에 꽂았던 새끼손가락이 빠지며 어머니의 비명소리와 함께 부엌과 거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작고 소박한 가정집이 드러난다. 부엌에서 콘푸로스트 정도를 입에 우겨놓고 있는 아들의 모습과 그 뒤 거실에서 말다툼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과외 선생은 무슨! 너, 내가 등신 같아 보이지?”
“이거 놔! 아들! 이리 와서 말 좀 해봐! 아들!”
마지막, 셋째.
“….”
연출의 시각에서 ‘선배’의 연기도 지적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
나는 설강식과 조승희의 연기를 주목했다.
한 마리의 뜨거운 호랑이와,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늑대.
두 마리의 야수가 필드를 휘어잡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단역급 배우들의 눈에는 ‘경외심’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둘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닮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다. 호랑이건 늑대건, 이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마지막 셋째 항목에 대해서는 적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이들은 자신의 100%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대신, 선배들이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를 고민했다. 느낀 부분이 있다면 즉석에서 메모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내 대사는 잊지 않는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
이 자리에 모인 배우들은, 최소한 ‘검증’이 끝난 배우들이다.
최상위 등급의 도재희, 조승희, 설강식을 제외하고서도, 어지간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 조연을 놓치지 않는 실력파 배우들.
산전수전에 공중전 까지 다 겪었던 이들이지만.
지금.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진귀한 풍경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바, 방금 감독님. 메모하시면서 대사 친 거 맞지?”
“그렇지? 맞지?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네. 대본에는 눈길 한 번 안줬어.”
“와, 대본 통째로 외워서 연기한다던 말이 사실이었어?”
감독으로서의 모습과, 배우로서의 모습.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해내는 도재희의 모습에 끝없는 박탈감마저 느끼는 배우도 있었다.
“나… 그동안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나 완전 쓰레기였네.”
이런 감정은, 비단 조연들 뿐 만이 아니었다.
설강식.
그는 배우로서 도재희의 모습은 인정했지만, 감독으로서의 모습은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보여준 것이라고는 ‘그럴 듯하게 쓴 대본’ 뿐이니까.
‘대본 잘 쓴다고 연출까지 잘 하겠어? 작가랑 감독은 다르지.’
분명,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리딩을 진행하면서 조금 씩 바뀌었다.
“촬영 감독님. 이 씬에서는 영화 스크린 비율 자체를 줄 일 겁니다. 스크린 비율 1:1. 기억해두세요.”
일반적인 스크린은 와이드(가로2.76:세로1) 비율의 크기다.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정사각형(1:1)이라는 흔치 않은 스크린 비율까지 못박아놓고 들어가는 강단.
“1:1이요? 정사각형?”
“네. 인물이 감정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는 스크린 비율을 줄일 겁니다.”
3:1에 가깝던 널찍한 스크린 비율을 1:1로 줄이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갑갑함을 느낀다.
인물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이를 극대화 시키는 방법이지만, 해외에서도 시도된 사례가 몇 없는 양날의 검으로 뚜렷한 ‘확신’ 없이는 선택하기 힘든 방법.
“… 정말요?”
“네.”
이를 밀어 붙이는 배짱.
거기다.
“선배님. 감정이 제가 생각한 감정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이 장면에서는 오히려 화를 내기보다는, 민망해 하지 않을까요.”
“아아. 예.”
배우들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전달하면서.
“잠시 만요. 저는 이 장면을 아주 가벼운 실소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입술을 크게 안 움직이셔도, 호흡으로 느낌만 주셔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 느낌도 좋았어요. 근데, 제가 디렉팅 드린 모습을 연기하는 배우님 모습도 매력적일 것 같습니다.”
배우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최대한 절제한다.
“그럼, 다시 해볼까요?”
“아, 네!”
그러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낸다.
마치, 우는 아이를 우쭈쭈 사탕으로 달래주는 엄마 같이 보이기도 했다.
“… 호오.”
설강식이 보기에도, 도재희가 디렉팅하는 방향의 그림이 훨씬 더 그럴 듯 해보였고.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희, 쟤 정체가 뭐야 도대체?”
미국에서 글만 쓰고 살았던 것 같은 수준이지 않은가.
설강식이 조승희에게 물었다.
“재희 쟤, 미국에서 촬영 안하고 글만 쓴 거 아냐? 아니면 영화 학교에서 연출 공부를 했다거나?”
“아뇨. 엄청 바빴다고 하던데요. 촬영 중이던 드라마랑 영화 다 끝냈잖아요. 드라마는 지금 미국에서 반응 엄청나던데.”
“그건 아는데… 스크린 비율을 1:1로 하자고 얘기하는 감독은 처음 봤네. 쟤 얼굴 좀 봐라.”
“….”
“무슨 몇 달 연출 준비한 애처럼 날이 바짝 서있냐. 이거, 원래 써놓은 대본이야?”
“아뇨. 최근에 썼데요. 두 달 걸렸다고 하던데.”
“두 달? 두 달 만에 글 쓰고, 또 두 달 만에 찍어버리자는 거야 지금?”
설강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조승희도 모르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조승희는 설강식의 말에 공감하며 시선을 슬쩍, 상석에 앉아있는 도재희에게 옮겼다.
조승희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 그러게요.”
모르긴 몰라도.
뭐지? 뭐야.
도재희에게 지금 느끼는 감정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다.
데뷔 이 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빠르게 커리어를 쌓아올렸다. 그 과정에서 할리우드 실패라는 꼬리표가 달라붙기는 했지만,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그의 적수는 없었다.
‘질투? 내가?’
질투, 견제, 위기감.
이제껏 조승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이고, 그 만큼 믿기 힘든 상황이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너무나 쉽게 툭툭, 던지는 도재희의 연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서 일까.
‘연기 말고, 감독 재능까지 타고난 건가?’
모르겠다.
“….”
하지만, 조승희는 결코 이런 감정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독님! 오늘 회식 있습니까!”
넉살 좋게 손을 들며 물었다.
그 속에 ‘악의’는 없었다.
어차피 정상을 찍어본 이에게 남은 것은, 내리막길 뿐.
애초에 ‘권력’에 대한 집착 따위는 없다.
“아, 회식이요? 그럴 예정은 없었습니다만….”
“하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오! 오! 조승희. 조승희!”
그 어떤 매체도 정하지 않았지만, 배우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일컬어지던 왕좌.
언젠가는 물러날 각오를 하고는 했던 그 다.
도재희가 조승희를 보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2차는 제가 쏘겠습니다. 전원 참석하세요.”
“와아!”
그 기세를 몰아 설강식이 말했다.
“그럼 내가 3차를 쏴야하나? 으하핫”
순식간에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조승희! 도재희! 설강식!”
주연 배우 3인방을 연호하는 조단역 배우들 틈바구니에서 쓴 웃음을 짓는 조승희는, 차라리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자가 도재희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차라리 너라 다행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웃으면서 히히 호호 물러날 생각은 없다.
‘해 보자.’
악의도 선의도 아니다.
딱히, 자존심을 걸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싸움을 붙이지 않았고, 공식적인 심판도 관중도 없다.
하지만, 이미 이쯤 되면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
프로들의 싸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뒤에서는 서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이 상황을, 조승희는 즐기기로 했다.
“… 재밌겠네요.”
“응? 뭐가?”
“아, 회식이요.”
절대, 티는 내지 않는다.
*
조승희.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이 업계에 막 발을 들인 신인배우였던 내게.
아무런 흑심 없이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탑 스타’
승희 형을 내 영화에 캐스팅한 것은, 내게 있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준다.
대한민국에서 연기파 배우로 가장 인지도 높은 배우들을 모조리 투입시킨 유일한 영화라는 ‘상징’
그리고 절대 호락호락하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경고. 내 스스로에게 가하는 일종의 ‘채찍’
그를 넘어서고 싶다는 싸구려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뭐.
이런 것을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나 스스로 만족을 위한 영화다.
내 ‘만족’을 위한, 내 사람들과의 추억 만들기.
조승희, 설강식을 제외하고도.
나와 함께 L&K에서 연기에 대한 꿈을 꾸며 활동을 시작하다 포기라는 아픔을 맛보았던 ‘문성이 형’부터.
[7년의 기억>에서 내게 팬임을 고백했던 하윤 까지.한국에서 나와 맺은 ‘인연’ 들이 대거 출연하는 ‘내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하는 영화.
또, 내 팬들에게 바치는 깜짝 선물.
“오빠. 팬들에게 주는 선물 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요. 안 그래요?”
영미 씨의 말마따나, 스케일이 좀 크지?
무려 150억 짜리니까.
총 제작비 예산 150억 원.
추정 손익분기점 관객만 500만 이상.
내 출연료 12억 개런티.
손익 분기점을 넘을 시 받는 +@ 연출 러닝개런티는 1명 당 120원. 미니멈 개런티 1억.
관객 수 최소 500만은 넘겨야 내 면(面)이 선다.
“부담스럽지 않아요?”
“당연히 부담스럽죠. 남의 돈으로 찍는 영화인데.”
“으웩, 저라면 손 떨려서 못할 것 같은데.”
“그만큼 부담스러우니, 더 잘 해야죠.”
그래.
내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상징성’과 함께 반드시 ‘흥행’으로 증명할 거다.
목표는 최대한 높게.
과정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서.
“자, 다 됐어요.”
“고마워요.”
나는 의상을 마저 입고 남양주 촬영장 컨테이너를 빠져나왔다.
진녹색 야상 점퍼에 싸구려 청바지.
하지만 값 비싼 명품 부럽지 않은 자신감을 안고 내 필드를 향해 걸었다.
“빨리 와요! 감독님!”
어느새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모여 있었고,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렬로 늘어서있는 배우들과 스탭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진사와 기자들까지.
“어서 와. 도 감독.”
조승희가 웃으며 센터 자리를 내게 비켜주었고, 나는 이들을 대표하듯 대열 정중앙에 섰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다 같이 외치는 겁니다.”
“하나!”
“둘!”
“셋!”
“크랭크업!”
찰칵-!
카메라 셔터가 터지고.
내 영화가 시작되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12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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