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6)
126.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불화만 가득한 집에서 자란, 나.
속에 있는 화(火)를 다스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런 집안에 염증을 느껴 밖으로만 도는 어머니의 이혼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 모른다.
“아빠랑 같이 살자”
“무슨 소리야? 애는 내가 다 키웠어.”
“…..”
내 선택은, 둘 다 아니었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 지방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설강식) 손에 맡겨진다.
어려서부터 줄곧 옛날이야기며,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 믿지 못할 전설 따위를 자장가 삼아 들려주시던 할아버지.
이젠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런 이야기를 믿을 나이는 지나버렸지만.
여전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즐겁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부모님과는 연락을 두절한 채 동네 목공소에서 일하며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어느새 80세가 넘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치매 환자의 넋두리가 대부분이고, 자신이 뱉은 말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점점 어린아이로 변하시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는 한 가지 말씀만을 반복해서 하셨다.
“고향이 그립다. 그런데, 생각이 안나.”
할아버지의 고향.
그만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
“할아버지 모시고 고향에 한 번 다녀오시는 건 어떠세요?”
“….”
요양원의 간병인이 내게 권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이기 이전에, ‘석명호’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왜 이제껏 단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지?
부끄럽다.
한 참을 주저하다 꺼내든 휴대전화에서 아버지는, 끝끝내 내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어떻게 찾아야할까.
내 할아버지의 추억.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고향을 함께 찾고 싶다.
그 때.
이상한 사람(조승희)이 나타났다.
“저는, 당신 할아버지의 친구입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멀쑥한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네? 그, 그게 무슨….”
“지하철에서 우연히 봤어요. 당신이 명호를 요양원으로 데리고 오는 것. 제가 명호를 처음 본 날은 1953년입니다.”
“….”
미친놈.
분명, 미친놈이 분명하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케이.”
그러자, 스탭들이 썰물 빠져나가듯 우리 주변에서 빠져나갔고, 연출부가 소리쳤다.
“오케이 입니다!”
“….”
아, 적응 안 된다.
*
내가 연기하고.
연기를 마치면 직접 코멘트 하고, 모니터에 와서 영상을 돌려본다.
그림 콘티가 없기에 직접 스크립터와 현장편집기사에게 설명한다.
“여기 풀 샷에서, 각각 대사 부분만 바스트로 가고. 처음 대면하는 장면은, 방금 찍은 달리 컷. 여기, 여기가 포인트.”
그럼, 편집 기사들이나 스크립터들은 벙찐 얼굴로 이렇게 묻고는 한다.
“이걸 어떻게 다 외워서 하세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지.
“후후, 150억이면 이럴 수밖에 없어요.”
이게 내 작업 방식이다.
다소 불편하지만, 빠르게 찍으려면 내가 일당백을 하는 수 밖에 없지.
힘들지만,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작업 방식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에 떠도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뭉쳐 영화라는 이름으로 ‘규정’ 짓는 일.
물론, 적당히 하면 안 돼.
잘 해야 해.
‘도재희’라는 이름 값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 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스탭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관객 역시 설득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몸을 지배하는 이 알싸한 긴장감은, 촬영이 지속될수록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특히,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스크린 비율’을 스탭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가 방점이었다.
“대박, 이런 거구나.”
영화에는 음악이 있지만, 인생에는 BGM이 없다.
현실 역시, 화려하지 않았다.
우리네 인생이 다 그러하듯,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1:1 비율로 보여주는 것.
내 스스로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지만, 시장에서 크게 먹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도박이었음에도 현장에서는 호평을 받았다.
“속이 다 뚫리네!”
1:1의 다소 갑갑한 화면에서 2.76:1 와이드 비율로 넓어지며 영화 속 분위기와 관객들의 기분이 환기되는 장면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지기도 했다.
으음, 이래서 감독을 하는 구나.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이렇게 조금씩 증명하고 있지만, 내 본직은 결국, 배우다.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섭외한 배우들이 바로, 설강식과 조승희.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배우들이자, 동반자이며 매일 매일을 하얗게 불태웠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멋지게 싸울 수 있는 선의의 경쟁자들.
적어도 우리 세 사람은 알고 있다.
아니, 비단 우리 셋 뿐만 아니라 이 현장에 모여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선배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어, 요 앞에 콩나물밥 집 괜찮더라. 너는 먹었어?”
겉으로는 이렇게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을 것을.
이 작품이, 일종의 ‘분기점’이 될 것임.
적의 목을 베어버리겠다 던지, 박살내버리겠다 따위의 감정이 아니다.
모두가 세대와 공감하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지금.
새로운 왕좌를 향해 싸우는 것이다.
여기서 얕보이거나, 내공이 부족해 보인다면- 관객들에게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
웃고 있지만, 혼신의 힘을 다 해낸다.
그랬기에 현장이 주는 열기는 1월 신년(新年)의 칼바람으로도 얼리지 못했다.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
하지만, 알고 있잖아.
어차피 이는 누가 순위를 매겨주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조승희, 설강식 선배가 돋보이는 장면에서는, 내가 감정을 조금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 ‘연출’도 함께 산다.
“자! 다음 씬 빠르게 가겠습니다!”
이 선의의 경쟁의 결과는.
결국, 세상에 공개된 다음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았고 또, 얼마나 많은 상을 휩쓸게 될 지.
또, 누가 ‘남우주연상’에 오를지.
*
2020년 연말은, 조승희에게는 조금은 씁쓸한 한 해였다.
이제껏 찍은 영화들이 줄곧 흥행에 실패해왔기 때문이다.
‘작품 보는 눈이 없다.’
‘조승희, 감 떨어졌다.’
시나리오 보는 눈이 없다, 망할 작품에만 참여한다는 둥.
대중들의 관심에서 시들해졌다.
한국에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영화제가 있지만, 이들 가운데 유달리 상복이 없었다.
2019년에 도재희가 대종상에서 처음 남우주연상을 탔던 그 날. 조승희는 자기 일처럼 도재희를 축하해 준 일을 떠올렸다.
정말 순수한 축하였다.
위기감은 없었다.
원래 ‘상’ 이란 돌고 돌기 마련이니까.
호날두와 메시가 수년 간 발롱도르를 양분하였듯, 조만간 다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조승희는 2020년에만 총 세 편의 영화를 공개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도재희는 단 ‘하나’의 작품으로 2020년 왕좌에 올랐다.
[배우 도재희! 2년 연속 영화인이 뽑은 최고의 배우 선정!]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의 남자 도재희, 그 끝은 어디?]국내누적 흥행 기록 4위.
미국에서도 대 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7년의 기억>.
남우주연상 후보에서 압도적인지지 차이로 도재희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2년 연속 남우주연상.
골랐다 하면, 흥행에 수상까지.
돈과 명예 모두를 놓치지 않는 도재희를 향해 일각에서는 ‘도재희가 도재희 했다.’ 라고 말하며 모든 의구심을 압축시켰다.
‘도재희가 도졌다.’
현장에서는 일종의 아침 인사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설강식까지 농담 삼아 ‘3연속 남우주연상’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번 작품으로 3년 연속 남우주연상! 어때? 전무후무한 기록 한 번 남기자.”
“에이, 아닙니다. 선배님도 아직 건재하신데.”
“나? 껄껄, 나는 이제 지는 해고. 나나 승희는 옛날에 받을 만큼 받았는데 뭘.”
질문의 화살이 조승희에게 향했다.
“안 그래, 승희야?”
“아… 네, 물론이죠.”
이를 바라보는 조승희는 미약한 불편함을 느꼈지만 끝끝내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축하해주었다.
“재희야. 기왕이면 감독상이랑 남우주연상까지 한 방에 노려보는 건 어때?”
욕심을 버린다면, 이렇게 축하해 줄 수 있다.
“오! 그거 멋진데. 역시 승희야. 흐흐흐.”
“아아, 선배님들. 놀리지 마세요.”
쩔쩔 매는 도재희를 보며 조승희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결과는 올 해 연말, 시상식 시즌.
업계 왕좌의 주인이 바뀐다.
*
‘도재희 영화 연출 준비.’
‘한국의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받은 2연속 남우주연상.’
한국에서 일어난, 이 작지만 대단한 이야기는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구글, ASK, MSN 등 미국 포털사이트에서는 이미 ‘JaeHee’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다. HBS에서 서비스하는 [데드 매니악>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도재희라는 동양인 배우에게 이목이 집중되니 ‘JaeHee’라는 검색어는 이미 실시간 핫토픽에까지 등장했고,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의 기사들이 전해졌다.
에이전시 UAA와 [아다지오>의 영화사 하이마운트 픽쳐스, [데드매니악>의 HBS는 공식 홈페이지에 까지 관련 게시물을 올리며 공개적으로 축하를 보냈고.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재희 매니지먼트에 연락해서 꽃을 부탁했는데.” 할리우드 대표 회사 로고들이 박힌 화환이 L&K 사옥 로비에 걸리는 진풍경까지 만들어냈다.
“2연속 남우주연상이라니. 그 정도 스타인 줄은 몰랐는데.”
“아뇨. 전 알아봤어요. 거 봐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미국 현지 방송국에서도 꽤나 비중 있게 다루는 이유는 따로 있다.
HBS.
[데드 매니악> 시즌1이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드라마 방영 직전까지 예상치도 못한 폭발적인 반응이 연일 들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제작진은 시즌2 대본 수정을 요구했다.
“더 재밌어야 합니다. 결말을 암시하는 이런 느낌은 모조리 지우고, 시즌10까지 이어갈 수 있게 복선들 계속 던져요.”
길어야 시즌3 정도를 예상하며 짜놓았던 결말로 향하는 에피소드를 지우고, 더 길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 네네.”
“그리고.”
“네?”
“재희 비중 좀 늘려 봐요.”
거기다, 시청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 내었던 도재희의 비중 증가는 당연한 수순이다.
“알겠습니다.”
시즌 2를 준비하는 제작진들은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배우들의 재계약이 남아있다.
“조지 쪽은 어때요?”
“개런티 상향은 확실한데, 최고 대우를 받길 원하고 있어요.”
“최고대우라… 구체적인 액수는?”
“아직입니다.”
“주인공이니 그렇다 치고, 다른 쪽은?”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그럴 수밖에.”
긍정적일 수밖에.
지금 얻은 인기는 향후, 몇 년의 배우생활이 보장된 인기니까.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모르는 배우들에게는 일종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촬영 일정 조율도 원활할 것 같습니다. 배우들이 최우선을 [데드 매니악>에 두고 있어요.”
대머리 PD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즌2 촬영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문제없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응?”
“재희 쪽 에이전시에서는 아직 말이 없습니다.”
대머리 PD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
계약조항이 떠오른 것이다.
시즌2 재계약 시, 회당 최소 40만 달러.
한화로는 4억 이상.
“그 친구, 에이전시가 UAA던 가요?”
“네.”
“연락해 봐요. 아니, 그럴게 아니라. 언제 한번 회사로 오라고 얘기하세요. 만나서 얘기하자고.”
“아, 이미 접근을 시도해봤습니다만….”
“그런데요?”
“기다리라고 합니다.”
“… 응?”
“재희 한국 스케줄 끝내고 재계약 협상하겠다고 합니다.”
일단, 기다려.
“그, 그게 무슨….”
[데드 매니악>에서 주연보다 뜨거운 감자가 도재희가 아니었던가.드라마에서 ‘핵심’이 된 도재희다.
재계약에서 놓치면 끝난다.
대머리 PD는 아차, 싶었다.
“…. 이런.”
최소 40만 개런티를 원하는 배우.
배우라인 중 최고의 개런티를 받길 원하는 주연배우 ‘조지.’
둘 사이에서 저울질할 생각에 골치가 아파 올 지경이다.
그냥, LA에서 흔하디 흔한 동양인 배우인 줄 알았는데.
“제기랄.”
제대로 물렸다.
[ 책 먹는 배우님 – 12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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