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29)
129.
[데드 매니악> 제작 PD는 매우 냉철한 인물이다.제작 PD라는 직책은, 필수불가결하게 ‘돈’에 의해 움직인다.
돈이 안 되는 작품은, 빠르게 회수하고 돈이 되는 작품은 그 이유를 분석해서 끌어올린다.
HBS라는 걸출한 방송국에 꼭 어울리는 인재라는 평가.
그랬기에 도재희와 시즌1에서 진행했던 ‘조건부 계약’은 불이익이 없었다.
40만 달러라는 개런티를 보장해주고 드라마가 흥행할 수 있다면, 훨씬 큰 이득이 되니까.
무엇이 되든 회사에게는 이익이다.
그런데 60만 달러라는 개런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액수가 조금 늘어난 ‘실질적’ 이유보다는 ‘상징적’인 이유가 크다.
미국에 족적을 뚜렷하게 남긴 동양인 배우에게 이런 개런티를 지급한 적이 있던가.
전례가 없는 일.
일종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두꺼비.
개런티는 암묵적인 비밀이지만, 으레 돌고 돌기 마련.
도재희보다 개런티가 적은 배우들이 항의하지는 않을까, 이런 비슷한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개런티 최종 협상을 위해 찾은 CP실에서 금세 그런 걱정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CP가 단호하게 말했다.
“재희? 시즌 2에서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데, 달라는 대로 줘 버려.”
“…..”
괜한 우려였던가.
아니면, 자신이 시대와 동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걸까.
“배우들이 항의하면, 시즌2에서 그만큼 보여주라고 해. 어줍잖은 것들이 그렇게 나오면, 알잖아. 좀비로 만들어서 잘라버려. 근데, 재희는 안돼. 무조건 붙들고 있어야해.”
“… 아.”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YES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때가 아닐까. 라는 고민이 스쳤다.
‘주류’가 바뀌어가고 있다.
그에 따라, 아카데미 시상식 분위기도 자연스레 바뀌고 있다.
몇년 전, 오스카 시상식의 배우 후보가 모두 백인들로 구성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시상식 자체를 보이콧하는 유색 배우들이 늘어났고, 점차 유색인종이나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패널티가 눈에 띄게 사라지는 추세다.
최근에 도재희를 주축으로 있었던 #Do. 역시 이 연장선.
‘골치 아픈 배우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할리우드에 불어오는 새바람을 타고 오히려 순항중이다.
[게라드 쇼>에서 있었던 논란을, 결과물로 증명해내고 있다.언더독 신분으로 호시탐탐 오스카를 노리는 외국인 배우가 아니라, ‘주류’가 되기 위해서.
“… 알겠습니다.”
PD는 CP와의 만남 이후,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새끼 PD에게 말했다.
“UAA에 전화해.”
“네! 뭐라고 말할까요?”
그의 얼굴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계약 조건대로 하자고.”
*
[아다지오Adagio>가 개봉했다.영화 아다지오는, ‘다양성’에 의미가 있다.
여성, 성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미국 사회에서 항상 주류가 되지 못하던 존재들이 하나로 뭉쳐,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낙천적인 희망을 노래하는 영화.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는 요즘 흘러가는 ‘아카데미’ 분위기와도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게라드 쇼>에서 내가 호소했던 말.‘도와주세요.’
게라드가 이렇게 내게 말했었지.
‘당신, 영화 이야기군요.’
영화와 관통하는 내 메시지의 진심이 닿았을까.
2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동시에 개봉한 이 영화는 아주 서서히 세계 각지에 울려 퍼졌다.
[Railway sing>, [Drawing drive> [Alone House>, [Stay with You>엘라니 오코너가 만들고, 내가 불렀던 위의 노래들의 경우에는, 흥행 여부에 따라 정식 음원 발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거의 확정적이지만.
이로써, 올해 상반기에 준비된 내 연쇄폭탄 모두가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오빠, 어떤 기분이에요?”
“아직 뭐.”
유명한 말이 하나, 있지 않은가.
거스 히딩크 감독의,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라 던지.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차기작 들어오는 걸 봐야 알 것 같아요.”
조금 개선될 여지가 생겼다는 것.
예년과 내 인지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모르는 거지.
UAA에이전트 빌이 베벌리힐즈를 방문했다.
“후아,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집이로군요.”
손에는 갈색 서류가방이 들려있었는데, 그곳에서 두터운 종이뭉치들을 잔뜩 꺼내들었다.
“이 모두, 재희 이름으로 들어온 작품들입니다. 분류는 두 가지로 해두었어요. 주연이냐, 조연이냐.”
‘주연’으로 묶여있는 파일은 비교적 얇았다. 몇 작품 안 들어있다는 의미.
그에 반해 ‘조연’은 두텁다.
“빨간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작품들은, [데드 매니악> 시즌2 촬영 여건상 공존이 불가능한 작품들입니다.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지만, 혹시 몰라 챙겨왔어요. 그러니 마지막에 보시면 됩니다. 파란 포스트잇은, 여름 이후에 들어갈 하반기 작품들이구요. 추정 개런티도 파악해 두었으니 찬찬히 확인해 봐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재익이 형과 함께 이들을 찬찬히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 영화를 떠나 다양한 장르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는데 재미있는 점은.
“뮤지컬이네요?”
브로드웨이 대형뮤지컬에서도 러브콜이 들어왔다.
“네. 가장 최근에 들어온 겁니다. [아다지오>가 시장에서 호응을 얻고 있으니까요.”
내 모자란 보컬 테크닉이 그대로 드러난 영화다. 그랬기에 더욱 아마추어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는 평가지만.
“뮤지컬은 좀.”
가볍게 패스.
“음료수 한 잔씩 드시면서 하세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초희 씨가 시원한 아메리카노 네 잔을 들고 우리들 틈바구니에 스며들었다.
“초희 씨도 봐요.”
“앗, 그래도 될 까요.”
그렇게 한참을 시놉시스를 뒤적거렸다.
“이건 어때?”
재익이 형의 제안에 추천한 시놉시스를 확인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또 한 번 느꼈지만, 역시 오웬 감독의 [패브리케이터>같은 영화는 없었다는 점이다.
꽤 비중 있는 ‘주조연’으로 출연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배역에 선입견이 끼어있거나, 에피소드가 엉성한 것이 다수.
동양인은 대부분 겉저리 취급.
“전부 별로인데. 이거 봐도 되죠?”
나는 빨간 포스트잇을 뒤적거렸다.
“아, 물론입니다.”
메인 촬영지가 캘리포니아가 아니거나, 시기가 정확히 맞물려 [데드 매니악>과 공존이 불가능한 영화들.
오히려, 그곳에서 한 작품을 건질 수 있었다.
“이거 재밌는데요. 일단, 킵 해두고.”
다음은 파란 포스트잇을 확인했다.
여름 이후에 들어갈 하반기 영화. 이 중에서 두 작품을 건졌다.
그렇게 총 세 작품 정도가 추려졌다.
[헤일럿 카페테리안> [황혼의 드리프트>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각각 면목을 살펴보자면.
[헤일럿 카페테리안>은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장르다. 밴드 영화이기도 한데, 주인공 밴드가 일하는 카페의 젊은 동양인 사장 역할이자, 밴드 매니저의 역할. 이 영화의 장점은, LA를 배경으로 찍기 때문에 ‘공존’이 가능하다는 점이지만, 결정적으로 하반기에 촬영 예정이다.감독은 나 역시 대표작을 들어봤을 정도로 인지도 있는 여성 감독이고, 희망과 낭만, 사랑을 노래한다는 점은 장점.
[84/100] (+3)조금 뻔하고 아쉬운 전개와 내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은 단점.
“이거, 일단은 킵 할게요.”
“오케이, 다음은?”
“이거. [황혼의 드리프트>”
이름에서 예상이 가능하듯, 블록버스터 액션 레이싱 영화다.
국내에서도 이니셜 시리즈나, M맥스 시리즈 등, 액션 레이싱 영화가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었다.
이렇게 시리즈로 나온다는 의미부터가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을 했다는 소리고, 소위 말하는 ‘평타’는 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점수 역시 나쁘지 않은 점수다.
[88/100] (+4)역할은,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동양인 레이서.
조승희가 비슷한 영화에 비슷한 역할을 7,8년 전에 맡았었는데, 그와 똑같은 캐릭터다.
아마도, 이들에게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모양새다.
이 영화는 촬영지가 전미에 걸쳐져 있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촬영 스케줄이 여유롭다. [데드 매니악> 촬영이 모두 끝난 이후에 들어갈 수도 있다.
빌이 내 안목을 칭찬했다.
“잘 고르셨어요. 가장 화끈한 캐릭터이자, 가장 후한 개런티를 보장한 팀입니다.”
그래.
그만큼 뻔한 캐릭터이기도 하지.
개런티는 한화로 약 14억 이상.
국내 영화배우의 할리우드 최대 개런티를 훌쩍 갱신하는 수치다.
“이건 어때요?”
마지막에 들어 올린 작품은,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
[데드 매니악>의 열풍 효과를 톡톡히 본 섭외라고 할 수 있다.의문의 거대한 쓰나미가 캘리포니아에 들이닥치고, 이 전대미문의 재난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생존기.
나는 그중에서 한인 타운에 거주하는 주인공 급 ‘한도’를 연기한다.
[94/100] (+5)점수가 훌륭해서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데드 매니악>과 닮아도 너무 닮은 캐릭터.장점이라면, [데드 매니악>의 낙수효과를 그대로 받아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지만, 단점이라면 역시 이미지의 고착화.
가장 큰 문제점은, 빨간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영화다.
포스트잇을 본 빌이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이유는요?”
“음,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재희, 영화 편집을 해야 한다고 했죠? 그 시기와 절묘하게 겹칠 겁니다.”
“아, 그렇군요.”
내 스케줄과 촬영 예정 시기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더 큰 문제점이 뭔지 아십니까?”
“뭐죠?”
“아직 배우 캐스팅이 전혀 안되었습니다.”
“네?”
배우 캐스팅이 안 되었다고?
“이유가 뭐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지도 모른다.
배급, 시나리오, 자금 등등.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아니라고 말했다.
“배우 때문이죠.”
“… 배우요?”
조금 ‘상징적’인 예를 들자면.
기본적으로 할리우드를 비롯한 대한민국 어떤 영화계든.
제일 처음으로 ‘캐스팅’된 배우를 중요시 여긴다.
일반적으로 배우들에게 영화 제의가 들어오면 대부분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누구랑 하는데?’
어떤 배우와 하느냐, 그 배우가 A급인지, B급인지.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이게 캐스팅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감독은 업계에서 천방지축이나 다름없었다.
“이 감독, 재희를 처음으로 캐스팅 하고 싶어 해요.”
“예?”
위와 같은 예시로, 나를 캐스팅 보트로 삼겠다는 말이다.
‘도재희가 영화에 참여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재희가 첫 캐스팅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재희를 위해 스케줄 조정도 불사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추천 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왜죠?”
“러시아계 신인 감독입니다. 작년 선댄스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젊은 감독의 메이저 데뷔작이죠. 진짜 문제는, 이게 아닙니다.”
“뭐죠?”
“[데드 매니악>의 엄청난 팬이라고 하더군요.”
젊은 신인 감독. 거기다 드라마 덕후.
최근 보았던 드라마를 통해 홀딱 반하게 된 동양인 배우. 그를 처음으로 캐스팅하기 위해, 다른 섭외를 진행시키지 않는 돌연변이.
“…. 독특하네요.”
“그렇죠. 저희와 통화를 나누었는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퍼킹! 이 사람이라고요!’ 어쩐지, 믿음이 가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한 마디로 ‘괴짜’의 냄새를 풍긴다는 거잖아.
하지만, 가장 비중이 크고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에이전시에서 빨간 포스트잇으로 경고했음에도.
“궁금한데요.”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은 숨기기 어려웠다.
그래.
난 항상, 하고 싶은 연기만을 해왔고, ‘될성부른’ 작품만을 골라왔다.
이 작품은 그 떡잎이 보인다.
아주 크게.
“이 감독, 한 번 만나볼게요.”
*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감독과 처음 만난 자리.그는 나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퍽! 제기랄! 와주셨군요!”
보글보글 파마한 머리에, 두꺼운 뿔테안경. 러시아식 억양인지 어딘가 빡세게 느껴지는 영어 발음.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범상치 않은 괴짜’로 단정 짓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딱 한 마디를 했다.
“인클루전 라이더 (inclusion rider)”
일정 비율이상의 여성, 유색 배우 등을 집어넣을 것.
주연배우가 제작진에게 요구하는 조건.
그 말을 들은 괴짜 감독 ‘앤소니 옐친’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내가 사람을 아주 제대로 봤네!”
[ 책 먹는 배우님 – 12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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