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30)
130.
인클루전 라이더 (inclusion rider)
주연 배우가 제작진에게 다양한 배우를 섭외할 것을 요구할 권리.
즉, 나를 섭외하고 싶으면 불필요한 백인 위주의 캐스팅을 줄이고 배역의 다양성을 인정할 것.
갑질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개런티 처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리우드 시장은 백인들만의 시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자, 인지도를 가진 유색 배우들이 권장하는 하나의 운동이다.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감독 앤소니 옐친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은 커다란 파마머리를 연신 흔들며 웃어댔다.“으하하, 당신이라면 그런 제안을 할 것 같았어요. [게라드 쇼>에서도 그렇고. [아다지오adagio>에서 보낸 메시지도 그렇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게라드 쇼>, 보셨습니까?”
“네. 모르긴 몰라도, 당신의 아이덴티티를 저만큼 잘 이해하는 백인은 없을 겁니다.”
“….”
내 아이덴티티.
대체 뭘 말하는 걸까?
나를 동양인의 구원자 정도로 여기는 걸까.
뭐가 되었든.
앤소니 옐친은 나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데드 매니악>을 통해 재희를 처음 보았어요. 마침 제가 준비하던 이 영화에 동양인이 필요했죠. 딱 보고 홀딱 반했어요. 퍽킹! 저 배우 도대체 누구야? 눈이 휘둥그레졌죠. 더스트들에게 쫓기며 모두가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끝까지 ‘인간성’을 버리지 않던 그 순수함. 그 얼굴!”
앤소니 옐친은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내 [데드 매니악> 시즌1 1화에서 16화까지의 연기를 한 장면 장면마다 곱씹는 듯했다.
“제가 정확하게 찾던 배우였어요. 그 뒤로 알아봤죠. 한국에서는 이미 어마어마한 지지를 얻은 탑스타. 거기다, 찍었다 하면 흥행. 지난 3, 4 년간 성공만을 달려온 배우. 한국기사도 봤죠. 도재희가 선택한 영화는, 흥행한다.”
앤소니 옐친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재희, 제 영화에서 흥행을 보셨습니까?”
“….”
“그랬으면 좋겠어요. 퍽킹!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요. 나와 당신의 천재성을.”
감독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설프고 거친 언행.
신인이라고 하기엔 과한 자신감.
UAA 말 대로 그는, ‘괴짜’ 였다.
그의 영화를 아직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젊은 천재’ ‘괴짜 감독’이라는 호칭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아 실력파임은 확실한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좋아요. 인정할게요.”
“무엇을요? 나와 당신의 천재성을?”
“…. 뭐. 잘은 모르겠지만.”
[94/100] (+5)“당신의 시나리오에서 힘을 느꼈습니다. 그 점은 부인할 수 없겠군요.”
“퍽! 예쓰!”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앤소니 옐친이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 뛰었다.
“그 말씀은, 저와 함께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미팅일 뿐이니까요.”
그러자 앤소니 옐친의 세상 다 가진듯한 얼굴이 무너져내렸다.
“…. 이럴 수가.”
아직 난,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않았고, 이런 내 말이 ‘거절’로 느껴졌는지, 앤소니 옐친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며 아주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부디, 부디. 제게 한 시간만 줘요.”
“그러죠. 그 전에.”
“…. 말씀하세요.”
“아시다시피 LA에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있습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인클루드 라이더. 제 조건을 들어줄 준비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앤소니 옐친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
앤소니 옐친은 크게 세 가지 조건을 내게 걸었다.
“첫째, 인클루드 라이더. 이는, 재희를 첫 번째로 섭외하면서 스스로가 다짐했던 것 중 하나입니다. [게라드 쇼>에서 재희의 모습이 큰 자극이 되었죠.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보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
“둘째, 섭섭하지 않은 개런티. 이는 제가 확답을 드릴 수는 없는 문제지만, 이미 제작사와는 얘기가 끝났습니다. 재희를 처음 섭외하겠다? 퍽! 끝났죠.”
처음 섭외되는 배우는,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얼굴이다. 내 이름이 할리우드 전역에 돌아다니며, 내 얼굴과 내 이름값을 걸고 다른 배우들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작업.
즉, 개런티는 걱정하지 말 것.
“셋째, 재희의 스케줄을 100% 고려하겠습니다. 기다릴 수 있어요. 한국에서 연출한 영화, 편집 작업이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끝내세요.”
“촬영 스케줄에 차질은 없나요? 개봉 예정일이 잡혀있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서둘러서 찍으면 되죠.”
일전에 UAA 에이전트 빌이 내게 말했었지.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팀이 촬영일정을 서두르고 있다고. 그렇기에 내 일정과 맞지 않아 빨간 포스트잇이 붙었었다.그 이유가 바로, 개봉 예정일이 잡히는 경우 때문.
이렇게 개봉 예정일이 제작 전부터 미리 잡히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JW 미디어’ 처럼, 배급과 제작을 동시에 하는 굴지의 대기업의 투자를 받을 경우.
혹은, 워낙 큰 흥행을 거둔 영화의 시리즈물이거나, 감독의 이름값이 큰 경우.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경우는 철저한 전자다.19세기 무비베어.
세계 최정상의 영화 제작사 중 하나.
대체 이 젊은 러시아계 미국인을 ‘천재 괴짜’로 만들어준 데뷔작이 어떻길래 저런 대기업에서 이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일까. 한번 챙겨봐야겠다.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예. 별 것 아닙니다.”
“… 그렇군요.”
내가 선택한 영화와 드라마 = 흥행이라는 공식.
“재희만 섭외할 수 있다면 더 한 조건도 들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
내 팬이라는 이유도 한 몫 한듯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나를 원하는 진짜 이유는, 이렇게 철저히 계산적인 이유다.
나 역시, 계산적인 이유다.
이 영화는, 될성부른 영화다.
거기다 내게 모든 조건을 맞춰주겠다고 안달 나 있는 상태라면.
“괜찮네요.”
긍정적일 수밖에.
*
‘19세기 무비베어’와 앤소니 옐친 감독은 도재희와의 만남 이후, 언론에 알리지 않고 최대한 비밀리에 할리우드 에이전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UAA를 비롯해 UTA, Hollywood Actor Guild, LA Factory 같은 곳들.
그 중, Hollywood Actor Guild 라는 에이전시는 인지도 높은 유명한 배우들이 즐비하게 모여있었는데, 이곳이 가장 최우선 타겟이었다.
“캐스팅 제의로 찾았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19세기 무비베어.”
“아, 지금 나가겠습니다.”
에이전시를 찾은 앤소니 옐친은 ‘19세기 무비베어’라는 후광을 등에 입고 VIP 접견실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에이전트들과 만난 그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그 어느 때 보다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벤자민 찰리’를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벤자민 찰리’
할리우드에서 떠오르는 차세대 라이징 스타.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 수상이 유력한 ‘레오파드 비트리오’ 가 출연했던 [디트로이트 피플>에서 조연을 맡았고. 인상 깊은 연기력으로 극찬을 이끌어 내며 흥행에 일조한 또 다른 1등 공신.
“벤자민이 휴식을 원하고 있긴 합니다만… 어떤 영화입니까?”
앤소니 옐친이 시놉시스를 꺼내 들었다.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얼핏 보기에는 무난해 보이는 재난 영화.
사실, 시놉시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이전트는 ‘19세기 무비베어’ 라는 이름을 보고 이 자리에 나왔기 때문이다.
제작사가 어디인지, 배역의 비중이 어떤지, 개런티는 얼마인지.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벤자민에게 건네 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역할입니까?”
주연이냐, 조연이냐.
벤자민 찰리는 최근 ‘주연급’으로의 성장이 확실시되고 있고 이를 굳히기 위한 작품에 투입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관계자들이 그렇게 인지하고 있고, 최근 밀려드는 영화들 모두가 주연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주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연입니다.”
“…. 네?”
“뭐, 굳이 따지자면 주조연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비중이 가장 크지는 않습니다.”
“…..”
에이전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희, 몇 번째로 찾아오셨습니까?”
“두 번째입니다.”
“그럼, 첫 번째가 주연이겠군요. 대체 주연이 누굽니까?”
앤소니 옐친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도재희입니다.”
“… 네? 아, 그 동양인 배우요?”
“동양인이 아니라, 한국입니다만…. 어쨌든.”
앤소니 옐친이 아주 익살스럽게 웃으며 손뼉을 탁! 쳤다.
“죽이지 않습니까? 뎀잇! 캐스팅 끝났다고요!”
“….”
에이전트의 얼굴이 묘해졌다.
한국인 배우가 가장 먼저 섭외되고, 그를 얼굴마담으로 세워 할리우드 굴지의 에이전시에 당당하게 찾아온 이 괴짜 감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최 감이 오질 않는 것이다.
[데드 매니악>이 시장에서 대형 성공을 거두고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했음은 인정하지만.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 일단, 벤자민에게 보여주겠습니다.”
하지만 앤소니 옐친 감독은, 그딴 쓸데없는 전례 따위는 다 개나 줘버리라는 듯 보였다.
“벤자민에게 꼭 전해주세요. 참여하지 않으면, 오 마이 갓! 내가 이런 빅 애플을 놓쳤어? 젠장! 에이전시 당신들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확신해요.”
이렇게 웃고 있지만, 사실 앤소니 옐친의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우리가 우스워 보여?’
신인 감독. 아니, 실력보다는 괴짜로 소문난 감독.
최근 급부상했지만,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동양인 배우.
이 조합이 주는 이런 애매한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자신 있게 ‘도재희’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입니다.”
앤소니 옐친이 도재희에게 반한 결정적인 이유.
‘네. 모르긴 몰라도, 당신의 아이덴티티를 저만큼 잘 이해하는 백인은 없을 겁니다.’
앤소니 옐친이 도재희에게 했던 말.
자신의 위치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며 증명한 실력.
치명적인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실력.
앤소니 옐친은 도재희가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에이전시 미팅이 꽉 잡혀있습니다. 일어나보도록 하죠.”
“아, 네.”
앤소니 옐친이 등을 돌렸다,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주 단호한 어조였다.
“잠시만. 명심하세요. 제 성질머리가 지랄 맞아 오래 기다리지는 못합니다. 다른 에이전시로 가는 길에, 아 이 배우는 벤자민 보다 블라블라가 어울릴지 몰라, 이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그리고 피식 웃어주고는 등을 돌렸다.
그의 언행은 거침 없었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얼마나?’
이렇게 대놓고 비웃어주는 것만 같았는데.
또 에이전시 입장에서는 마냥 화내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상대가 19세기 무비베어다.
거기다 저 자신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
에이전트들은 앤소니 옐친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황망히 중얼거렸다.
“…. 벤자민 연락 넣어.”
영화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캐스팅 바람이 LA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 책 먹는 배우님 – 13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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