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33)
133.
영화 [7년의 기억>은 내게 있어 일종의 효자손이다.
가려웠던 곳을 벅벅 긁어주는 시원함이 있고, 이제껏 내가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비교하여 최소 한 단계씩 이상을 보여주는 강렬한 캐릭터다.
부수고, 터지고, 달리고, 넘어지고.
피와 눈물이 낭자하지만, 그 사이에는 낭만이 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사무치는 복수극.
몰입도 높고 강렬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에게 소위 말하는 ‘먹히는’ 영화.
30초 내외의 짧은 하이라이트 영상이 지나갔다.
이 영상이 지나갈 때, 아카데미 시상식장 안에 파다하게 퍼진 긴장감이 나는 좋다.
모두가 숨도 쉬지 못하고 몰두한 이 30초가 뿌듯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에 소개된 영화는 비교적 담담하게 회사원의 삶을 그려낸, 이란 영화 [커리어 맨>.
하지만 [커리어 맨>의 영상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채우는 묘한 기대감 때문이다.
3분 뒤 공개될 ‘외국어영화상’의 두터운‘벽’을 [7년의 기억>이 넘어설 수 있을까?
기대감, 호기심.
이 두근거림의 끝에- 나와 함께 시상자로 선 여배우 카넬 리슨이 내게 말했다.
“다섯 작품을 모두 만나보았습니다. 재희, 이를 지켜보는 감정이 특별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셨나요?”
특별하지.
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 어떤 작품이 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맞아요. 어떠신가요? 더 긴장되시나요?”
“말할 것도 없죠.”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보이자 시상자인 내가 무대에 서 있는 마음을 이들이 공감하는 것일까.
아무렴.
“그럼, 수상작을 만나보도록 하죠.”
사회자의 진행에 내가 손에 들려있는 봉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봉투에 감겨있는 끈을 풀어 금장이 붙여져 있는 흰색의 두꺼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 장면이 매우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던 찰나의 시간도 잠시.
나는 뽑아 든 종이에 쓰여있는 글귀를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커리어 맨>이란 영화.
오스카의 선택은 이란에서 온 70대의 노장이었다.
내가 아니다.
박진우 연출도 아니고, 설강식 선배도 아니다.
“…. 축하합니다.”
묘하게 퍼져나가던 뜨거운 긴장감이 삽시간에 차갑게 식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이는 생방송이고. 전 세계 영화팬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아찔한 순간이지만.
나는 억지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박진우 연출이 내게 했던 부탁처럼, 마이크를 움켜쥐고 끌지 않고 시원하게 내질렀다.
“[커리어 맨>!”
펑-! 퍼버벙!
팡파레가 터지고 꽃가루가 휘날렸다.
카메라맨들이 빠르게 움직여 이란에서 날아온 70세 노장을 비추었다. 그러자 스크린에 있던 [7년의 기억> 포스터는 사라지고 [커리어 맨>이 풀 와이드 화면으로 들어찼다.
객석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쩍 벌린 채 앞으로 걸어 나오는 이란 감독.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자기 일처럼 환호해 주는 할리우드 배우들.
모든 장면들이 아주 찰나의 시간처럼 흘러 지나갔다.
각인되듯 아주 천천히 뇌리에 박힌다.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박진우 연출과 눈이 마주쳤다.
꽤 먼 거리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표정으로 후련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 모습을 보자 내 마음이 편해졌다.
“홀라!”
이란 감독이 계단을 올라 무대 전면에 있는 내게 인사했고,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축하드립니다.”
승자에게는 축하를.
“고마워요.”
그리고 패자에게는.
내가 손가락을 튕기며 박진우 연출에게 손을 뻗었다.
술 한잔 하면 그만이다.
*
시상이 끝나고, 나는 원래 내 자리로 돌아왔다.
박진우 연출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제 작품 이름이 불렸으면, 심장이 멎었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다행이죠.”
설강식 선배나, 박진우 연출의 얼굴에는 그 어떤 일말의 씁쓸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잖아요.”
“그럼!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지. 껄껄!”
“…..”
그래.
이들 말처럼, 애초에 수상은 기대하지 않았다.
… 처음까지는.
한국에서 매 년 수상을 휩쓸고 다녔던 내 이력.
터지는 미국에서의 내 포텐.
‘외국어영화상’ 시상자라는 타이틀이 내 속에 숨어있던 기대감에 불을 지폈고, 점점 그 불이 번져나갔다.
그랬기에 잠시 씁쓸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의 말마따나.
“다음에 잘 하면 되죠.”
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 제일 생각나는 게 뭔지 아세요?”
“뭡니까?”
“소주 한잔하고 모니터 앞에 앉고 싶어요. 뭐든 쓰고 싶고, 뭐든 그리고 싶어요.”
술, 그리고 일.
박진우 연출은 오늘 일을 심기일전하여 다음을 노리겠다는 각오를 비추었다.
“덕분에 자극을 많이 받고 갑니다.”
“….”
제대로 말했다.
나 역시,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니까.
당장 품에 안지 못한 오스카 씨를 제외하고도, 이곳.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가 경고한 ‘검독수리 새끼들의 경연장’은 온통 자극제로 가득하다.
고개만 돌리면 어려서부터 보았던 ‘미국 영화’ 주연 배우들이 앉아있고. 한 회차당 100만 달러 개런티를 받는 배우들이 즐비하다.
이들에 비한다면, 나는 아직 멀었고.
그 누구도 나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있고.
내가 저 무대에 설 기회는 올해 끝나버렸지만.
우리는 아직 젊고, 할리우드에 입성한 지 이제 고작 1년 이다.
지금 내게 가장 자극이 되는 사람은.
“여우주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시상자들.
오스카는 전통적으로 전 년도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수상자들이 직접 시상을 한다.
자신의 뒤를 밟는 후배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전통.
그렇기에 진정으로 넘어서야 하는 사람들은, 저기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설강식
미국의 조승희
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드디어 아카데미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남우주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시상에는 전년도 수상자이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백미.
남우주연상.
오스카는 누구? Who is the owner of Oscar?
11년 동안 매년,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단 한번을 수상하지 못한 레오파드 비트리오.
그가 드디어 올해 수상을 할 것인가?
다수의 평론가들이 레오파드 비트리오의 수상을 점쳤다.
나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살짝 깨문 채, 조용히 오스카의 대미를 즐겼다.
역시, 이야기는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
5분 후.
우리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남우주연상! 영화 [블루 오션스>의 지미 니콜라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는, [디트로이트 피플>의 레오파드 비트리오가 아니었다. 연기 경력 35년에 오스카 2회 수상에 빛나는 노배우 지미 니콜라이였다.
스크린에는 당혹스러운 레오파드 비트리오의 얼굴이 아주 짧게 지나갔고.
지미 니콜라이가 영화인들의 박수를 받으며 황금빛 오스카를 높이 들어 올렸다.
나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아카데미의 결과에 경악하면서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스카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고.
‘검독수리 새끼들의 경연장’에 새로운 두목이 탄생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지미 니콜라이는 오스카를 들어올린 상태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 부럽다.
직접 눈으로 보니, 더 굉장하다.
이건 단순한 ‘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전 세계 배우들의 왕!
왕이 바뀌었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즉위식을 지켜보고 있다.
시야가 흐릿하게 변했다.
저 자리에서 오스카를 손에 꽉 쥐고 무대 위에 서 있는 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1년 뒤를 곱씹었다.
… 가능할까?
이것저것 재지 말자. 가능성만 생각하자.
단지, 지금은.
“지미 니콜라이!”
승자에게 박수를!
*
‘1년 뒤’라는 숫자를 떠올리는 배우는 도재희 뿐 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새로운 할리우드의 왕을 축하해주는 자리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분노와 아쉬움을 삼키는 배우.
“레오파드. 괜찮아. 내년이 있잖아?”
“… 시끄러워.”
오스카를 한 번도 품에 안지 못한 할리우드 탑스타 레오파드 비트리오는, 또 다시 1년 뒤를 기약해야 했다.
31세에 처음 후보에 들었고.
‘벌써 12년.’
내년에는 반드시.
올해에는 반드시.
이것만 벌써 몇 년인가.
물론, 단순히 오스카를 품에 안지 못했다고 그의 배우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스카를 들었던, 들지 못했던.
그는, 레오파드 비트리오 였으니까.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중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대중들에게 당당해질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다.
‘오스카의 저주’를 받았다는 둥, 죽기 전까지 오스카와는 절대 인연이 없을 것이라는 악담을 듣고 있자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래.
‘콤플렉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아마, 이 ‘짐’은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오스카 남우주연상.
배우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들어올려야 하는 상임은 틀림없다.
‘반드시, 내년에는.’
레오파드 비트리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아카데미의 마지막.
작품상은 [디트로이트 피플>이 받았다.
레오파드 비트리오는 남우주연상의 주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작품상을 수상 하게 되면서 자존심을 챙겼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는 사람.
박진우.
그는 도재희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광경을 보며 똑같은 자극을 받고 있었다.
‘오스카라.’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재희 효과일까.
그와 함께 한 영화는 연일 대박을 거둔다.
작품 상을 수상하는 [디트로이트 피플>의 감독을 바라보며 박진우는 상념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미국시장에서 성공한 [7년의 기억>은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도재희가 연출했던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의 제작을 맡으며 고사했던 하이마운트의 할리우드 데뷔 기회는.
“미스터 박. 이번 작품은 저희와 함께 하시죠.”
“하이마운트는 박 감독과 언제나 함께하고 싶습니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받은 수많은 영화사의 ‘러브콜’로 모두 보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데뷔할 수 있다.
‘외국어영화상’이 아니라.
미국에서 영어로 영화를 찍고, 할리우드 최정상을 넘볼 수 있다.
‘할 수 있을까.’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도재희가 쓴 ‘시나리오’에 박탈감을 느꼈던 박진우다.
하지만 이 박탈감은, 오늘에서야 ‘투지’로 바뀌었다.
‘해 보자.’
도재희가 쓴 시나리오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을 써 보자.
그리고, 정말 제대로 한 번 찍어보자.
후회 없이 도전해 보자는 욕심, 자신감, 의욕. 자신에게 꺼내든 ‘분발’이라는 이름의 채찍.
속으로 거세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 전에.’
오늘은 일단, 술 한잔을 해야겠다.
도재희, 박진우, 레오파드 비트리오.
모두가 똑같은 아카데미 무대를 바라보며, 똑같은 꿈을 꾸었다.
내년에는 반드시, 오스카를 들어 올리겠다는 욕심.
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의 밤이 저물어갔다.
[ 책 먹는 배우님 – 13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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