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35)
135.
19세기 무비베어 같은 대형 영화사의 배급 담당 기획자는 ‘프로’다.
A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미국시장에는 맞는지 등을 고려한다.
자연스럽게 전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보아왔고, 그 나라만의 고유한 문화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영화에는, 사람마다 제각각 ‘취향’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장르의 호불호, 좋아하는 시퀀스, 대사의 아름다움 같은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영화를 접근하는데, 이들은 개인적인 사견이나 취향은 철저하게 배제한 체 ‘편견’ 없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
일반 관객이 아니라, ‘프로’니까.
이렇게,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이들이, 그런 계산마저 잠시 잊어버리고 러닝타임 127분 동안 푹 빠져들었다.
“어떠셨나요?”
“… 아.”
영화가 끝나고 솔직한 의견을 묻는 도재희의 얼굴을 보자, 배급 담당 기획자는 그제야 멍한 기분에서 빠져나왔다.
“재밌었나요?”
“….”
말을 골라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젊은이가 할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과정. 할아버지의 인생을 경험하고, 그의 추억을 엿본다는 점에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이 떠오르네요.”
[시네마 천국> 같은 세기의 명화와 비교되었다.이 영화는 고전영화도 아니고, 소년의 이야기도 아니고, 영화라는 매개체도 없지만.
제일 먼저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그랬다.
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질까.
“… 아름다웠어요. 정말로. 특히 그… 1:1 스크린 비율에서 풀 와이드로 확장되는 그 장면.”
“맞아. 그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어. 보여? 지금도 그 장면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아나는군.”
19세기 무비베어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열며 공감했다.
매우 아름다운 스토리와 영리한 연출.
그럭저럭 봐줄 만한 CG에, 거기다 언어의 장벽 따위는 다 깨부숴버리는 배우들의 연기력.
“그런데, 눈에 익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던데요.”
“네. 한국이 자랑하는 배우들입니다.”
도재희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 느껴졌다.
“이런,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군요. 표정에서 티나요?”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얼굴이군요.”
“맞아요. 재희, 그래도 잠시만 시간을 주겠어요? 우리끼리 얘기를 좀…”
“좋아요.”
“우리는 나가서 얘기 좀 하지.”
19세기 무비베어 배급담당자들이 스튜디오 문을 열고 로비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한 명이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
“나 역시 마찬가지. 대단한 흥행이 보장된 영화는 아니지만, 이건 반드시 사람들이 보아야 하는 영화야.”
“그럼, 다들 동의했군.”
“… 자네도?”
“당연하지. 내 팔을 봐. 아직도 소름이 채 가시질 않는군.”
이견은 없었다.
모두가 이 영화를 구매하고자 원했고, 스튜디오 안으로 다시 들어선 배급 담당 기획자가 도재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재희, 이 영화를 저희가 사겠어요.”
*
영화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는 다분히 ‘한국적’인 영화다.
영화의 배경으로는 1953년 6.25 전쟁 직후부터 70, 80년대 격동의 대한민국이 주를 이룬다.
이런 격동의 인생을 살다 시들시들해진 할아버지의 인생을 따라가는 손자.
벌써부터 한국적인 색이 매우 짙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무비베어가 영화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효’는 국경을 부수는 힘이 있다.
이는, 인종과 국적을 막론하고 먹히는 소재였고, 도재희는 이를 아주 영리하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미국에 1주일 먼저 개봉하는 것으로 하고, 제목은 그대로 직역한 [Buy your memories>로 하는 것이 좋겠어요. 으음, 문제는 돈인데. 아마 절대 섭섭하지는 않을 겁니다. 계약 조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 대단하네요. 정말.”
박진우는 그 자리에서 당장 계약서를 들이밀며 도장을 찍으려는 19세기 무비베어 직원들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형 영화사인 무비베어 측이 저렇게 적극적일 수가.”
판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박진우는 제작총괄을 맡았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편집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편집은 도재희가 직접 했고, 할리우드의 편집팀은 도재희의 머릿속 이미지를 구연하는 ‘손’ 역할만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왔다.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감독인 자신이 봐도, 대단한 영화였다. 부족한 점을 찾기 힘들 정도.
“감독님, 어땠나요?”
도재희의 질문에 박진우는 엄지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최고였습니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영화보다 낫다.’
영화의 값어치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박진우가 느끼는 감정은 그랬다.
이 영화가 아마, 몇 달만 일찍 세상에 공개되었으면 아카데미 시상식의 ‘외국어영화상’은 분명 도재희가 받았을 것이다.
“도 배우님, 계약 마무리 지으시는 동안 저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네.”
박진우는, 자신을 따라 미국행을 함께 한 SAFA 출신 김민희와 함께 스튜디오 로비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김민희가 박진우에게 물었다.
“박 형, 한 방 제대로 먹은 얼굴인데.”
박진우가 피식 웃었다.
“맞아. 완패야.”
완패를 인정하면서도 박진우의 표정은 가벼웠다.
“완벽한 영화였어. 불필요한 장면도 없었고, 전개도 세련되었지. 단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야.”
“맞아. 미국시장에서도 먹힐 것 같은데.”
“자극은 확실히 되는군.”
“응?”
박진우는 할리우드 정식 입봉 준비를 위해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할리우드 데뷔.
이제는 진짜 시험대에 섰다.
할리우드에서 데뷔작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지 못한다면, 어쩌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박진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 작품은, 정말 최고의 영화를 만들 거야. 도 배우님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 지금 완전 의욕 충만!”
박진우의 당당한 말에 김민희가 피식, 웃음 짓더니 그의 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 박 형이지!”
“아얏”
박진우는 여전히 조금은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LA의 거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꼭, 찍는다.’
*
미국에서 1주일 선 공개.
이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11개국에 동시 개봉.
그 이후에는 유럽을 비롯해 170여 국가로 확장 진출 예정.
“후, 정신없네.”
“그래도 이제 끝났잖아.”
“그러니까요. 역시, 연기만 신경 쓰는 게 좋다니까요.”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의 편집 및 판권 계약이 마무리되자, 꽤 여유가 생겼다.이제는 할리우드 작품들 촬영에만 집중하면 되는 상황.
그 사이,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의 앤소니 옐친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끝장나는 라인업이 대기 중입니다. 카메라 켜기만 하면 됩니다. 후후.”
캐스팅이 완료되고 촬영 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달 초에 진즉 촬영에 들어갔어야 하지만, 내 스케줄을 기다려준 것이다.
이들이 내게 보내는 긍정적인 시그널에 답신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우 및 크루 분들 모시고 제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요.”
“오! 식사요!”
식사를 한 끼 대접하기로 했다.
“네. 토요일 점심 어떠신가요.”
날짜를 잡고 식당을 예약하는데, 식당 선정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배우들에게 쏘는 식사.
값비싼 레스토랑도 물론 좋겠지만.
“한정식 어때요?”
내가 제안한 것은 한정식.
“한정식? 좋아할까?”
저들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인클루드 라이더(다양성 존중)를 선언하고 모여든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에게 꽤 괜찮은 메시지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 좋아할 수밖에 없을걸요.”
싫은 티를 내겠어?
“그렇게 하자. 원래 공짜 밥은 뭘 먹어도 맛있는 법이지!”
한인타운에서 가장 큰 한정식집 중 하나인 백양식당으로 정했다.
토요일 점심.
약속된 시간에 맞춰 한인타운에 도착했다.
K Town이라 불리는 한인타운은, 한글로 적혀있는 간판은 많이 보이지만 확실히 한국의 색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건물 외관부터가 LA 느낌을 확 풍기니까. 당연히 한국에서 30년을 살아온 내게는 이곳은 여전히 ‘미국’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오우.”
한 흑인 여배우가 식당 입구로 들어서며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들어섰다.
“한식당이 이런 분위기군요.”
저들이 느끼기에는 이곳은, 미국이 아닌 한국.
미국 속의 한국에서, 나는 방문객들을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어서 오세요.”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섰다.
배우, 제작자, 촬영감독, 에이전트 등등.
이들 대체적으로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한식당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다니!”
“그러게요. 할리우드 생활 오래 하면서, 종종 들려보긴 했지만, 이렇게 단체로는 처음이네요.”
신기하다는 반응.
아무래도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질 예정이지만.
“제가 마지막입니다!”
앤소니 옐친 감독이 마지막으로 내부로 들어서면서, 모든 사람들이 도착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재희입니다.”
“워우!”
짝짝짝짝!
한식당을 가득 메운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 팀들에게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몇 달 전 박수를 받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지금은 이곳 조촐한 한식당으로 무대가 바뀌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은 이곳이 더 편하다.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친숙한 공간이라는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할리우드에서 내게 호감을 표시하고 내 얼굴을 보고 들어온 ‘내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제가 쉬는 날 종종 들리던 한식당입니다. 제게 고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음식 맛이 썩 훌륭한 곳이지요. 마음껏 드십시오.”
“예!”
“아,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로 촬영 기간에 종종 이런 자리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보다 다양한 식당에 가보고 싶은데, 추천해 주실 분 없으신가요?”
내 말에 아주 짧은 침묵이 오갔다.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 너를 이해하고 싶다.
인클루드 라이더.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며 식사를 나누는 방법.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이보다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내 말에 재빠르게 반응하며 중국계 여배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왜 없겠어요? 안 가서 몰랐지.”
“그거 정말 좋은 제안이군요! 제가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기막힌 인도 요리전문점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아요! 좋아!”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맛있게 즐겨주세요.”
*
1인당 9만원 가량의 고급 정식 요리.
스프를 닮은 뜨끈한 호박죽에 한바탕 난리가 나고, 연어샐러드에 청포묵으로 만든 탕평채가 나왔다. 칠절판과 메로구이. 궁중 갈비찜에서는 방점이었다.
“이야!”
베지테리언과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입맛을 모두 사로잡은 음식들.
이 정도면, 10점 만점에 만점인걸.
음식에 소주를 간간히 곁들이며 진행된 오후 만찬.
내 테이블에는 앤소니 옐친 감독과, 벤자민 찰리가 앉았다.
“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옐친 감독은 음식 맛에 감탄했고.
나는 옐친 감독의 능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캐스팅이 정말, 화려하네요.”
내가 제안했던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일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서 저마다 한 가락씩 제 기반을 닦은 배우들이다.
하지만 앤소니 옐친 감독은 웃으며 그 공을 내게 돌렸다.
“재희가 합류해 주신 덕분이죠. 재희 얼굴 보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 아.”
“이제 촬영만 들어가면 됩니다! 예쓰! 촬영할 생각을 하니 정말 신나는군요!”
“하하!”이렇게 다재다능한 배우 라인 중, 가장 인지도 있는 배우를 꼽으라면 역시, 벤자민 찰리.
[게라드 쇼>를 통해 내게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현했던 백인 배우.벤자민이 말했다.
“정말, 화기애애 하군요!”
“예?”
“여기 분위기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가 행복하다는 듯 웃어 보였고, 내가 물었다.
“다른 현장은 분위기가 달랐던 모양이군요.”
“네. [디트로이트 피플> 촬영장은… 끝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정말 지옥이었죠.”
“네?”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디트로이트 피플>.
그리고 레오파드 비트리오.
“레오파드의 오스카 욕심 때문이죠. 올해에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얼마나 들들 볶던지.”
“….”
아.
“지금도 이를 갈고 있어요. 내년에는 반드시 받을 거라고. 재희. 만약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고를 때, ‘레오파드 비트리오’ 라는 이름이 들어간다면 한번 고민해보세요. 그 현장, 엄청 힘들테니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에는 꽤 무게가 있었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지미 니콜라이’라는 새로운 할리우드 왕의 등장에 잠시 잊고 있었다.
레오파드 비트리오.
매년, 오스카를 노리는 만년 2인자.
그가, 내년에도 오스카를 노리는구나.
“… 충고 고마워요. 벤자민.”
나처럼.
[ 책 먹는 배우님 – 13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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