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37)
137.
영화 세트의 기본은 CG다.
뉴욕을 배경으로 찍던, LA를 배경으로 찍던, 실제 그 공간에서 찍을 수 있는 장면은 한정되어있다.
LA 전체가 물바다가 되는 장면을 찍겠다고 LA에 수백 만리터의 물을 들이부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CG를 지극히 혐오하여 병원 건물에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해 실제로 터트려버리는 감독도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CG.
촬영은 오렌지 카운티의 건물 모형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세트 블록(Block)에서 진행되었다.
영화는, 온통 컴퓨터 그래픽 덩어리다.
이 블록들은 CG라는 옷을 입고 건물로 재탄생할 것이고.
물살에 부서지는 건물들은 약간의 특수효과를 거치고 이미 부서져 있는 모형 건물로 대체될 것이다.
“준비되셨죠? 갑니다!”
자, 여기.
카메라 앞에 있는 것들 중, CG가 아닌 것은 딱 두 가지뿐이다.
배우와 물.
연기는, 어떻게 CG로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인간은, 하늘을 날지도 광선빔을 쏘지도 않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가시죠.”
펼쳐진 대자연재해를 ‘직접’ 몸으로 받아내는 수밖에.
“자! 갈게요!”
슛 사인이 들렸다.
동시에 분무기에서 물이 튀어 올라왔고, 크레인 차량 위. 물탱크의 물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서 나를 향한 카메라들에 불이 번쩍였다.
거대한 물탱크가 아가리를 벌렸고.
쾅! 콰과과과광!
이내 거침없이 물이 쏟아지는 괴성이 들려왔다.
그 괴성에 묻힌, 확성기 가득 앤소니 옐친 감독의 악에 받친 목소리.
“액션!”
찌릿찌릿, 피부가 먼저 반응한다.
내가, 내 속의 또 다른 나로 변하는 시간.
*
그 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잘 구운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우유와 베이컨을 곁들여 먹었고.
“아빠!”
“읏차! 잘 잤니?”
아침에는 우리 공주님을 번쩍 안아 들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와이프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경악했다.
“무슨 일이야?”
“여, 여보. 저기…”
TV에서는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긴급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속보입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동쪽 324km 떨어진 대서양에서 시작된 지진의 영향으로 강도 높은 해일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항구를 집어삼켰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관통하는 플라타 강은 대서양과 밀집해 있으며 이번 해일의 영향으로 도시 전체에 피해가 확산될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
해일이다.
나는 들고 있던 토스트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동시에.
– 삐이이이이이이이이!
귀를 찌르는 비상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바로 쇼파로 달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내가 일하는 해양구조대에서 온 연락.
“여보…”
불안한 표정을 짓는 와이프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가봐야겠어.”
오늘이 비번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상이다.
나는 황급히 외투를 챙겨 입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영문도 제대로 모르지만, 나와 와이프를 따라 덩달아 불안감을 느낀 딸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아빠! 안 가면 안돼?”
“….”
나는 그제야 오늘 딸 아이와 놀아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일찍 오겠다며, 뭐가 먹고 싶냐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겠지만.
오늘 따라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나 역시, 가고 싶지 않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
우선, 가봐야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집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나는 금세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 아.”
평소와 다른 것은 내 마음 뿐만이 아니었다.
샌클레멘테 해안이 요동치고 있었다.
저렇게 높은 파도를 언제 본 적이 있던가.
철썩! 철썩!
해안 부두벽을 강타하는 바다에 놀라고, 전 세계를 강타한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스 속보에 놀란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왔다.
“저게 뭐야?”
“방금 속보 들었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
우리 동네는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캘리포니아 사이에는 남아메리카가 가로막고 있지만.
전 세계의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 젠장”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 내 머릿속을 채우던 그 흐릿한 망상들이 점점 현실화가 되어가고 있다.
온몸의 털들이 곤두서는듯한 두려움.
나는 그대로 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얼른 집에서 나와!”
“에, 에?”
“당장!”
“아, 으, 으응!”
“….”
바다가 흔들리고 있다.
내가 알던 세계가, 단 하룻밤 만에 흔들리고 있다.
*
– 속보입니다! 역사에 유례없는 태풍 ‘플라가’가 산토스를 강타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스페인. 일본. 그 어느 곳도 가릴 곳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
치익!
– 전문가들의 예측에 따르면 지구온난화의 악화로 남북극에 있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짐에 따라 이상기후들이 연속적으로…
치익!
돌리는 라디오 채널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재앙’, ‘바다가 노했다.’, ‘과학적으로 분석한 원인’ 등등을 분석한 전문가들이 쉴새 없이 떠들어댔고, 아무런 필터링 없이 퍼져나갔다.
“제기랄!”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때문에 내 딸은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고.
하루 만에 바다가 뒤집혔고.
세계 곳곳에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데.
“괜찮아, 괜찮아.”
와이프가 뒷좌석에서 딸을 안심시키고, 나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음악을 틀었다.
은은한 클래식 반주가 흘러나왔지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륙을 향해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샌디에이고 하이웨이를 타고 북상하여 빠르게 캘리포니아를 빠져나가려는데, 도로가 꽉 막혀버렸다.
“제기랄! 뭐야!”
뻥뻥 뚫려있어야 할 차선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빵! 빠아앙-!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전 세계의 부두가 동시다발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는 속보. 지진의 영향으로 미약하게 흔들리는 땅.
전복당해 도로 한가운데를 막아버린 차량.
이 모든 이유들이 한데 뭉쳐 캘리포니아 도로 전체가 마비 상태였다.
나는 운전석 문을 박차고 나가 줄지어 서 있는 차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때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바로 옆에서 들려온 여인의 비명 소리에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부두 방향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도로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부두를 향했다.
“….”
아, 이걸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오전 10시 30분.
점심 식사도 마치지 않은 평화롭던 해안 마을이 일순간.
“… 밤?”
밤으로 변했다.
작렬하는 태양을 가린 거대한 쓰나미가 위로 솟구쳤고, 낮이 밤으로 변하는 기적과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아주, 짧은 정적.
그 누구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입을 다물었고, 이 정적은 아주 빠르게 깨졌다.
“꺄아아아아악!”
“…..”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우리 가족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했다.
이건, 직업병이지만.
내가 일하는 해양구조대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덜컹!
차 문을 닫고 창문을 위로 끌어올리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빠”
… 내 딸.
나는 재빠르게 뒷좌석으로 몸을 날려 딸 아이의 머리를 내 가슴에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콰과과과과과광!
거대한 쓰나미가 강타했고, 차량이 뒤집히며 거대한 급류에 휩쓸려 내려갔다.
나, 살 수 있을까.
*
“여긴 지옥이야!”
“하하하!”
풀샷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내가 던진 조크에 현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괜찮아요?”
“제가 원래 놀이기구를 무서워 하거든요. 근데 이제 롤러코스터나 아쿠아 웨이브는 탈 수 있겠어요.”
“하하! 그것 참 다행이군! 얼른 재희 좀 일으켜 달라고!”
그래. 웃자.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 실상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요 며칠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극 중에서 도로 표지판을 잡고 한 손으로 수천 리터의 물을 맨몸으로 받아낸 적도 있었고, 물에 휩쓸려 내려간 딸을 구하기 위해 잠수와 헤엄을 반복하는 장면에서는 물을 너무 많이 마셔 하루종일 헛구역질만 했다.
“물 좀 마셔.”
“어우, 괜찮아요.”
재익이 형이 건네주는 생수조차 생각나질 않는다.
어디, 그뿐 인가.
오열하는 감정연기까지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여기가 영화 촬영장인지 재난의 현장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
[데드 매니악>은 ‘좀비’ 라는 설정 때문에 가끔 귀엽게라도 느껴졌지.이건, 정말 공포 그 자체다.
24시간 중 16시간 이상 홀딱 젖어있는 내 모습을 보며, 영미 씨가 말했다.
“어휴, 이 작품 진짜…. 역대급 재수 없어요!”
촬영 내내,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헤어드라이기를 달고 살았고 그녀의 손에는 핫팩과 이불이 들려있었으며, 의상을 말리고 적시기를 반복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덕분에 감기는 걸리지 않았지만, 영미 씨 입장에서는 아마, 나와 함께했던 모든 작품 중 가장 고생하는 작품일 것이다.
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초희 씨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나 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많은지 분장이 지워지면 수정하랴, 아예 씻고 처음부터 새로 분장하랴.
“저는 괜찮아요. 오빠. 제일 힘든 사람이 오빤데요 뭘.”
그러면서도 항상 웃고 있는 그녀들의 노고에 박수를.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확실히 이 촬영장은 분위기가 좋다.
“크하하! 재희! 물맛이 어때요? 물에서 오스카의 맛이 나나요?”
“…”
가끔은 돌 아이 같이 유쾌한 성격의 감독이나.
“정말,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군. 재희, 솔직히 말해봐요.”
“뭐가요?”
“연기하는 기계 아닙니까?”
“음, 제가 기계였다면 아마 진즉에 고철 덩어리로 변했을걸요.”
“으하하! 그건 그래!”
내게 호의적인 배우들.
벤자민이 내게 다가와 뜨끈한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재희는 왜 항상 싱글벙글하고 있어요?”
“음, 촬영이 재밌잖아요.”
“매일 홀딱 젖어서 울부짖는 게 재밌어요?”
“그럼요.”
“에이, 설마요.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벤자민. 그렇게 궁금하다면 직접 들어와 보지 그래요?”
“후후, 아쉽지만 전 그런 장면이 없어요. 아시잖아요?”
극 중, 해양관제센터에서 일하며 세계적으로 닥친 이 재난을 해결하는 에이스 역할을 맡은 벤자민 찰리는, 아쉽지만 물벼락을 맞는 장면이 없다.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것 참, 아쉽네요.”
“하하!”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현장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현장 분위기를 움직이는 사람은, 다수의 스탭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주연 배우.
이 ‘주연 배우’인 내가 이 현장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이 말했다.
“가끔 보면, 재희는 참 이상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응? 제가요?”
“네. 뭐라고 비유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유토피아를 찾아 온 개척자 같다고 할까. 자신들의 무리를 이끌고, 할리우드에 정박한 선장. 후후.”
“….”
유토피아라.
할리우드가 유토피아던가?
내겐 아직도 전쟁터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야.
벤자민이 커피를 들어 올렸다.
“여하튼, 대단합니다. 진심이에요.”
그래.
여기 모여있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내게 거는 기대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게, 내가 이 현장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원동력이 된다.
내가 쓰게 웃자, 벤자민 찰리가 말했다.
“제가 일전에 레오파드 비트리오와 함께 작품을 했잖아요.”
“아, 네.”
“그와 재희의 차이점 하나를 극명하게 느꼈어요.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와 나의 차이.
단순히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에서 오는 차이가 아니다.
그는, 자타공인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니까.
단지.
“제가 느끼기에 그는… 즐기지 못했어요.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죠. 강박증이랄까.”
마음 가짐.
벤자민이 숨을 한번 골라 내쉬더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에 반해, 재희는 항상 즐기고 있어요. 제 눈에도 보일 만큼. 이게 재희와 레오파드의 차이입니다.”
레오파드 비트리오와 나의 차이.
“… 그런가요.”
나는 문득, 아카데미가 끝나고 술자리에서 설강식 선배님이 내게 한 조언을 떠올렸다.
욕심 대신, 꿈.
“… 이런 말씀이셨구나.”
“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카메라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나는 내년의 오스카를 꿈꾼다.
[ 책 먹는 배우님 – 13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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