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38)
138.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
한때는 할리우드에서 유명 사설 주간지를 운영하며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배우’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락으로 끌어내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남자.
일간지를 해체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금요일 황금시간에 방영되는 [게라드 쇼>를 통해 할리우드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이 백발의 노인은 고민에 빠졌다.
“요즘은 정말 쓸만한 주제가 없군.”
방송 작가들이 준비해온 이 주의 ‘핫토픽’에는 쓸모있는 소식이 전혀 없었던 것.
“그런데 말이야….”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템 기획안을 들어 올렸다.
“짐머 에이니의 결혼 소식? 영화 [골든 레이디스>에 나온 그 여배우 말하는 거야? 그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뭐 어떻다고? 제기랄! 아무리 특별한 소식이 없다고 해도 이딴 쓰레기를 방송하자고? 내가 전에 파파라치 운영할 때도 이딴 아이템은 쓰지 않았다고.”
“하, 하지만 결혼하기도 전부터 임신을 먼저…”
“입 닥쳐. 그딴 건 방송할 곳 많으니까. 내 방송이 뭔지 잊었어? 우리는 [게라드 쇼>라고! 미국 토크쇼의 자존심이야. 우리 쇼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해! 마약을 생수처럼 달고 다니는 팝스타. 감독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운 여배우. 매춘부와 열애 중인 할리우드 영화감독. 뭐든 좋으니까 나가서 물어 뜯어오라고!”
“….”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없는 죄 만들어 뒤집어씌울 수도 없고, 그런 사건 사고를 당장 어디서 구해오겠는가.
“제기랄. 나도 고민해보지.”
과장되고 괴상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
그의 노골적이면서도 솔직한 방송철학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자극적인’ 방송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또 대중들이 [게라드 쇼>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주 잘.
하지만, 요즘 할리우드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레오파드 비트리오. 그 친구 소식은 없는 거야?”
게라드의 질문에 방송 작가가 말했다.
“네. 이번에 있었던 오스카 관련 인터뷰는 절대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 아쉽군. 레오파드 그 친구만 섭외된다면, 2주 치 방송 분량은 뽑을 텐데 말이지.”
‘오스카에 올해에도 낙방하셨는데. 벌써 12년째입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런 질문에 레오파드 비트리오의 일그러진 얼굴 하나만 뽑을 수 있다면, [게라드 쇼> 동영상 클립은 수천만 뷰 정도는 가뿐히 넘고 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 될 것이다.
하지만, 꿈일 뿐이다.
제아무리 [게라드 쇼>라고 하더라도 게스트가 원치 않는 질문을 할 수는 없지.
그때.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으면 어때? 레오파드가 응할까?”
“어떻게요?”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단독으로 말고. 레오파드 비트리오 외에 배우를 몇 명 뽑아보는 거야. 내년 남우주연상 후보로 가장 유력한, 현재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 배우들을 한 자리에 초대하는 거지. 이름하여! 아카데미 특별편! 그 두 번째 이야기! 22년 아카데미 차기 남우주연상은 누가 될 것인가!”
“… 오.”
방송 작가들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가 의도한 ‘자극적’이고 대중들이 원하는 방송에 제격이지 않은가.
문제는, 얼마나 배우들이 이 초대에 응하느냐 하는 것.
“레오파드가 초대에 응할까요?”
“레오파드 비트리오는 무조건 있어야 해. 그가 없는 남우주연상 후보 편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야, 그렇죠.”
“수상 실패에 대한 질문은, 가볍게 유머로 넘기고. 내년 아카데미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소개해주겠다고 말해. 방송의 포커스를 아예, 레오파드 비트리오 쪽으로 몰아주겠다고.”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배우들은 특별히 생각하신 배우가 있습니까?”
방송 작가의 질문에 게라드가 야심차게 말했다.
“재희.”
“… 예?”
“그 친구에게 연락해 봐. UAA 소속이야.”
“아, 네. 그럼 다른 배우들은?”
방송 작가의 질문에 게라드가 언성을 높였다.
“아예 전부 떠먹여 달라지 그래? 제기랄!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내가 정해줘야 하나? 시장 돌아가는 상황보고 적당히 맞추라고. 누가 더 오든, 어차피 둘 중 한 명일 테니까.”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
영화와 배우를 보는 안목 하나는 타고난 그가 보증한 두 명의 후보.
레오파드 비트리오 X 도재희.
어차피 수상은 둘 중 하나.
“알겠습니다!”
방송 작가들이 섭외 미팅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며 비릿하게 웃었다.
투견장에 소고기 한 덩어리만 던져둔 채 투견들을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나도 궁금하군.”
그리고 금세 정신을 차리며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았다.
“이제 이것도 끊어야지. 끄응.”
*
“재희 너, 몸이 좀 좋아진 것 같은데.”
“네? 제가 보기엔 똑같은데요.”
“아냐, 분명 요즘 옷맵시가 달라. 영미 씨, 안 그래?”
“제가 오빠 몸을 매일 보잖아요.”
영미 씨가 시선을 갑자기 아래로 내려깔더니 수줍은 듯 말했다.
“… 원래 좋았어요.”
얼굴을 아주 살짝 붉히기까지 한다.
어, 어이. 이봐요.
갑자기 왜 그래요.
“… 흠흠흠.”
빨간 홍시처럼 얼굴을 붉히는 영미 씨의 모습을 본 재익이 형은 본인이 다 민망한 듯 투덜거렸다.
“흠흠. 뭐야, 왜 자기가 부끄러워하고 그래?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왜 실장님이 화를 내세요?”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그냥 황당하다는 거지.”
“대체 뭐가 황당한데요? 오빠 몸이 원래 좋았다고 말했을 뿐인데?”
“….”
궁지에 몰린 재익이 형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 어쨌든 내 눈은 못 피해가. 요새 몸이 좀 마르면서 탄탄해진 느낌이야. 워낙 많이 뛰어서 그런가?”
“…. 아마도.”
“요즘 운동 많이 했잖아. 결과가 나오나 보다.”
뭐가 어쨌든.
좀비들에게 쫓기는 [데드 매니악>을 찍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뛰어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는 촬영 자체가 해군 훈련이나 다름없다.뛰고, 구르고, 싸우고, 헤엄치고, 잠수하고.
극한의 촬영환경 속에 몸을 극한으로 던진다.
이렇게 몸을 잔뜩 쓰다보니, 어느새 액션이 몸에 익숙해져 버렸고, 액션 장면 없이 감정연기만 하고 나면 몸이 찝찝할 지경이었다.
그럴 때면, 틈틈이 푸시업이나 윗몸일으키기 등을 하곤 했는데, 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난 것이다.
“….”
나는 잘 모르겠지만.
영미 씨는 아는 모양이다.
“확실히… 오빠 몸이… 좋던 게 더 좋아졌어요.”
“알았다고요. 그만하시라고요.”
그나저나, 재익이 형과 영미 씨의 분위기가 이상한데.
“실장님! 왜 자꾸 저한테 화 내세요? 제가 싫으세요?”
“영미 씨가 자꾸 실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제가 언제요?”
“… 그, 그건.”
으음. 왜 내 눈에는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까.
응? 왜 그럴까?
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재익이 형을 바라보자, 재익이 형이 내 눈치를 보곤 땀을 삐질 흘리며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아! 빌!”
“….”
갑자기 전화 받는 척을 한다고?
이것 참 수상한데.
영미 씨 반응도 이상하다.
원래 같았으면, ‘실장님 재수 없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중얼거리며 껌을 씹어야 하는 영미 씨가,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재익이 형 뒤통수를 얌전히 쏘아보기만 한다.
마치, 연인들끼리 ‘너, 나한테 사과해.’ 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듯.
“… 아.”
나는 의심을 혼자 속으로 삼키며 피식, 웃어버렸다.
“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뭘.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향살이를 하면서 영화 촬영현장과 숙소를 계속 오가다 보면.
없던 마음도 생기고 그러지 않겠는가.
뭐,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때 재익이 형이 멋쩍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어, 전화가… 왔었어.”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빌이에요? 빌이 뭐래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재익이 형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게라드 쇼>. 출연제의가 왔어.”
“… 네?”
잠깐만. [게라드 쇼> 출연제의라고?
전화 받는 척하던 게 아니었던 거야?
“정말요?”
“응. 말 그대로야. 근데, 너 혼자는 아냐.”
“그럼요?”
“레오파드 비트리오. 그도 함께 출연한 데. 오스카 특별편으로.”
“….”
레오파드 비트리오가 함께?
*
할리우드 최상위 포식자.
올해만큼은 반드시 오스카를 들어 올리기 위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배우, 레오파드 비트리오.
그가 선택한 영화는 [리벤지 아메리카>라는 서부극 영화.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을 배경으로, 간악한 죄수를 이송하는 카우보이 역할을 맡았다.
죄수를 이송하는 도중, 거센 눈보라를 피해 들른 산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철저하게 1인칭 카우보이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관객들이 ‘레오파드 비트리오’와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리벤지 아메리카>의 제작을 맡았고, 연출도 직접 섭외했다.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할리우드에서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이지만, 비중이 크지 않다.애초에 그런 작품을 고른 것이다.
혼자 다 해 먹기 위해.
“근데, 뭐라고?”
[리벤지 아메리카>영화 준비에 한창인 그에게 섭외의뢰 하나가 들어왔다.토크쇼의 패왕.
[게라드 쇼>.이름을 들은 레오파드가 거드름을 피웠다.
“아아, 그 프로그램 뭔지 알아. 게라드 그 영감, 아직도 현역인가?”
“맞아요.”
“옛날엔 나를 찍기 위해 내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던 영감이었는데. 웃기지도 않는군. 근데 그 영감이 왜? ‘오스카 수상 실패’를 가지고 날 놀려먹으려고? 정말 그런 이유라면, 그렇다면 사람 잘못 봤는걸.”
레오파드의 말에 에이전트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스카 관련은 맞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라요.”
“어떻게 다르지?”
“올해에 주목받은 영화들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 뭐?”
“아카데미 후보를 미리 뽑아보겠다는 거죠. 극장 개봉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윤곽은 나왔을 테니까요.”
“아아.”
그제야 이해한 레오파드가 손가락을 튕겨냈다.
“그런 자리에, 내가 빠질 수는 없다. 뭐, 이런 건가?”
“맞아요.”
“글쎄. 내가 거기 나가면 무슨 이득이 있지?”
에이전트가 말했다.
“영화 홍보 효과도 있고, 또 모든 대화의 방향을 레오파드에게 맞추겠다고 했습…”
그러자 레오파드가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시끄러워. 방송국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내겐 아무런 이득도 없다고. 홍보 효과? 아직 찍지도 않은 영화를 가지고 뭘 홍보해? 그리고 내 위주로 돌아가는 쇼? 이제껏 아닌 방송도 있었던가?”
“…. 아.”
“이득은 없어. 이건 확실해.”
“…. 네.”
에이전트는 레오파드의 말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거절.
이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게라드 쇼> 제작진과 통화할 일만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오파드가 싫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지만, 레오파드는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득은 없어. 그런데, 참석하지 않으면 손해는 있겠군.”
웃음을 참기 힘든 얼굴이었다.
“하, 그 간악한 영감. 그렇다고 막상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지?”
방송국이 하라는 대로 놀아줄 생각도 없지만.
‘오스카 후보’들이 모이는 쇼라면, 자신이 빠질 수는 없다. 레오파드가 참석하지 않아도 진행될 쇼라면?
애초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그물인 것.
거기다.
“누가 참석한데?”
“지미 니콜라이. 그리고, 재희.”
오스카 2년 연속 수상을 노리는 미국의 설강식이나 다름없는 ‘지미 니콜라이’와 무서운 기세로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한 도재희 까지.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배우들을 만나 탐색전을 벌일 수 있는 자리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단 말이지.”
레오파드의 머릿속에 이득을 따지려는 계산기보다, 순수한 호기심이 동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도재희?”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인데.
올해에 왜 이렇게 이름이 귀에 많이 들리는 걸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테니, 확답은 주지 말라고. 게라드 그 영감탱이가 잔뜩 달아오를 때까지 말이야.”
레오파드가 결정을 내렸다.
“얼굴 한 번 보러 가지.”
[ 책 먹는 배우님 – 13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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