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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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먹는 배우님 – 14화. >14.
송문교는 큰 딜레마에 빠졌다.
이제라도 감독님의 성향을 파악했으니, 자신이 조금 굽힐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컨셉을 유지할 것인가.
“성질 조금만 죽이자. 응?”
회사에서는 무조건 전자를 외치고 있지만, 송문교는 전자를 택하기 힘들어졌다.
이유는, 물론 ‘나’ 때문이다.
자신에게 배역을 구걸하던 ‘내’ 앞에서, 문병철 감독에게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쪽팔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거다.
그게 내리막길인 줄도 모르고.
“…. 감독님. 하, 저 진짜 모르겠어요.”
“제 말이 이해하기 힘든가요?”
“여기 대본 지문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도대체 뭘 더하라는 말씀이죠?”
본격적인 [청춘 열차> 1회 촬영에 들어갔다.
장소는 수원시 팔달구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사전 섭외가 따로 없는 골목길 촬영의 경우, 차량도 통제해야하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주의를 주어야 한다.
괜히 현장을 ‘펼친다.’ ‘접는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펼쳐서’, 민원이 들어오기 전에 빠르게 찍고 ‘접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송문교와 문병철 감독의 트러블 때문에 도통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앞 상황은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시죠?”
문병철 감독의 표정이 묘해졌다.
“바로 전 씬이 뭔지 잊으셨어요? ‘김도훈’ 이랑 좋았던 일 회상하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바로 다음 씬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무슨 분노조절장애에요?”
“감독님.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누누히 말씀드렸죠. 문교 씨. ‘우진’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중심이에요. 지문이 이렇게 적혀있어도, 앞 뒤 생각 없이 날뛰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숨기는 그런, 어떤… 눈빛! 액션! 호흡! 알맹이 같은 단단함! 그런 걸 원하는 거라고요. 이해가 안 됩니까?”
“그럼 그렇게 지문을 적으셨어야죠.”
“… 뭐요?”
문병철 감독님은 마치, 이런 것도 배우라도 데려다 놓은 머저리 새끼가 누군지 찾는 듯한, 원망스러운 눈으로 제작PD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하… 환장하겠네.”
“예?”
“문교 씨. 캐릭터 분석은 안합니까? 일일이 다 적어줘야 해요? 그거 배우 몫이잖아요.”
송문교의 매니저인 명길 씨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명길 씨 대신, 재익이 형이 박찬익 팀장과 통화를 했고, 곧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찬익이 형 곧 올 거야.”
“휴.”
명길 씨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영미 씨는 어디서 구했는지, 정말로 한 손에 팝콘을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대에-박! 완전 썰전 보는 느낌.”
이 여자 뭐야.
… 팝콘을 미리 준비한 거야?
나는 얌전히 서서 잠자코 이 싸움의 끝을 지켜보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문병철 감독님이 결국, 폭발해 버렸으니까.
“로맨스라고 연기가 우습게 보입니까! 최소한 촬영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지!”
그리고는.
“야! 조연출! 문교 씨 대본 더 보고 오시라 하고! 이 씬 넘기고 다음 씬 먼저 찍어!”
촬영 순서를 바꾸기를 요구하셨다.
송문교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덩달아 폭발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가버렸고.
“형!”
명길 씨는 그런 송문교를 따라 쫓아갔다.
마치 폭풍이라도 한 바탕 휘몰아 친 것 같다.
“분위기 오졌다.”
영미 씨의 한 줄 평에 이어, 조연출이 내게 다가왔다.
“아아. 죄송합니다. 재희 씨 씬 먼저 찍어야 할 것 같은데. 준비는 끝나셨죠?”
“아, 네.”
진즉 준비 끝내고 구경 중이었으니까.
“그럼 대기해주시고, 저는 청아 씨 얼른 모시고 올게요.”
다음 촬영 씬은 나와 박청아 배우가 나오는 장면이다.
내가 감독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니, 멀찍이서 박청아 배우가 매니저와 함께 걸어왔다.
박청아.
나 보다 나이는 세 살 어리지만, 방송 데뷔는 더 빠르다.
여자 비중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지만, 소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오래된 연인이라는 컨셉이기 때문에, 내가 촬영이 있다면 매일 같이 부딪혀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셨어요?”
내가 인사하자 청아 씨가 깎듯 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이,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불편해요.”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드라마만 세 작품 째인데, 오히려 내가 선배라고 불러야할 판이다.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요?”
“네. 좋죠.”
“그럼 오빠도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확실한 것은, 앞으로 자주 마주칠 테니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 부분은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는다.
“아.에.이.오.우우우우.”
어색한 듯 턱을 바짝 당기고 입을 푸는 모습이 너무 웃겨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푸흡. 아, 죄송해요.”
“에에, 이상했어요?”
“아뇨. 아니에요.”
아니라는 말에 또 입을 양쪽 끝으로 쭉 당기며 풀기 시작한다.
“으으으으으으”
“풉.”
확실히, 여러 가지 의미로 인상이 나쁘지 않다.
아마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고, 갑자기 씬 순서가 바뀌어서 죄송합니다.”
그 때, 감독님이 많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괜찮습니다.”
“그럼, 리허설 해볼까요? 어디보자… 몇 페이지…”
“32페이지요. 1회 12씬.”
감독님은 이 정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셨다.
“허허, 고마워요.”
찍을 내용은 간단하다.
고등학교 회상 장면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둔 교복을 입고 분장도 최대한 어려 보이게 해 둔 상태다.
손을 잡고 걸으며, 몇 년 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지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달리(이동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하는 씬.
“손, 잡아도 괜찮아요?”
내 질문에 박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손을 잡고 걸으며 대사를 주고받았다.
박청아는 내가 생각한 이미지대로 연기를 곧 잘 했다. 뒷 말끝을 가볍게 흐리면, 정확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오는 센스도 있고, 준비를 많이 했는지 대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느낌, 나쁘지 않다.
촬영감독님도 그림이 마음에 드셨는지 엄지를 치켜드셨고, 촬영이 재개된 지 10분 만에 곧 바로 슛 사인이 떨어졌다.
“좋아요,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자! 갈게요!”
메인 FD의 외침에, 곧 바로 FD들이 골목을 막아서기 시작했고, 보조출연자들은 반장들의 신호에 맞춰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나와 박청아만 잘하면, 이 많은 스텝들이 여러 번 고생하지 않고 한 번에 끝난다.
“슛!”
말해 뭐할까.
“오케이! 바스트 땁시다!”
한 번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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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다시 한 번 갈게요!”
촬영장에서는 또 다른 씬의 촬영이 이어졌지만, 그 뒤 한 켠에서는 제법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다.
재익이 형의 전화를 받고 도착한 박찬익 팀장은 곧 바로 송문교를 찾아갔고, 졸지에 송문교 카니발 뒤편에서 L&K의 작은 회의가 열리게 된 것.
“그래서, 지금 못하겠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박찬익 팀장.
송문교를 비롯해, 임주원, 그리고 나까지. 수많은 신인들을 발굴해 데뷔시킨 능력자이며, L&K 배우 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아 몇 번을 말하게 해. 하기 싫다고.”
하지만 그 동안은 송문교의 말 한 마디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러니까 하기 싫다는 거지?”
오늘 만큼은 조금 달랐다.
마치, 칼을 갈고 온 것 같았다.
“….”
“확실히 말해. 엎으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제법 강수를 둔다.
박찬익 팀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송문교가 조금 어물쩡 거렸다.
“진심이야?”
송문교의 질문에 박찬익 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진심 아니지!”
그리고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크게 내뱉더니,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애쓰며 말했다.
“후-! 문교야. 내가 작품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 성격 보통 아니니까 성질 조금만 죽이자고 분명 이야기 했지?”
“했지. 그리고 내가 로맨스 하기 싫다고도 말했고.”
“야 송문교! 네가 지금 작품 가릴 때야? 툭 까놓고 솔직히 말해 줘?”
“….”
“하, 됐다…. 문교야. 촬영장 10, 20분씩 늦는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감독님 앞에 계시는데 성질 못 죽이고 욕한 것도 그렇고! 재희한테 이상한 자존심 부리는 것도 그렇고!”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송문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존심을 부려? 내가? 왜? 저 새끼가 뭔데? 대체 뭐가 잘났는데?”
그리고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발, 아무리 꿈틀거려봤자. 어차피 주연은 나야.”
마치, 다짐하듯 읖조리고는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아이고, 머리야.”
박찬익 팀장이 사라지는 송문교의 뒤를 바라보며 뒷목을 부여잡았고, 재익이 형이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하겠다는 의미겠지?”
박찬익 팀장이 말했다.
“해야지. 엎을 수도 없어. 알잖아. 이거 쟤 전작에서 손해 본 거 메꾸려고 집어넣은 캐스팅이라고.”
“그래도 형이 쌔게 나가니까, 경고는 좀 된 것 같은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약간의 ‘욕심’이 느껴지긴 했다.
‘시발, 이게 나를 열 받게 해? 나도 진짜로 해 봐? 어디 두고 봐!’
이런 오기.
하지만 박찬익 팀장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렸다.
“아, 근데 생각할수록 열 받네. 뜬지 얼마나 됐다고 작품을 가려 가리긴! 지가 송범호야? 최태식이야? 이 자리 탐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할 수 있는 연기와, 하고 싶은 연기.
중견 배우나, 작품을 마음껏 골라 먹을 수 있는 탑 스타가 아닌 이상, 이 둘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를 좁히는 것은 온전히 배우의 몫이다.
실력으로 이런 장르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지만, 기회가 온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한 작품 한 작품에 착실히 임해야 한다. 문병철 감독이 [청춘 열차>로 대박을 터뜨리고, 다음 작품으로 100억짜리 대작 스릴러에 들어갈지도 모르지 않은가.
“문교가 배가 불렀다.”
“그건 그렇지.”
이 바닥은 좁다.
그렇기에 이미지가 중요하다.
박찬익 팀장이 나를 바라보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재희는 요즘 칭찬 밖에 없더라. 오미란 선배님도 너랑 붙는 씬 없다고 투덜거리시고. 아주 인기가 좋아.”
“아, 하하. 그래요?”
“그래. 재희 넌, 문교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알았지?”
그럴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는 감독님한테 가봐야겠다. 어휴, 우리 아들 아직 네 살 밖에 안됐는데, 애 학교에서 사고치고 교무실에 끌려가는 부모 마음을 알겠다니까?”
박찬익 팀장은 장난스레 말을 던지고는 촬영장 쪽으로 걸어갔다.
재익이 형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으아아-! 우리 재희는 알아서 잘 해 줘서 다행이다. 덕분에 이 형이 현장에서 할 게 없어.”
나야, 항상 신인의 마음으로 임하니까.
하지만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의바른 신인의 얼굴 뒤에 감쳐 둔 욕심 하나.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대로 골라내는 배우’ 가 되는 것.
내가 가면을 쓰고 웃어보였다.
“저야 뭐… 그럴 ‘급’이 되나요. 아직 멀었죠.”
자꾸만 조급함이 고개를 쳐들지만, 나는 목표 정도는 정하기로 했다.
1년.
그 안에, 무조건 뜬다.
[ 책 먹는 배우님 – 1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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