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40)
140.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학교 다닐 때 보면, 어느 반이든 싸움을 제일 잘하는 대장이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인데.
어느 날 듣도 보도 못한 전학생 한 명이 대뜸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거지.
‘여기 대장이 누구야? 나랑 한 번 붙자.’
대장 입장에서는 기분이 어떻겠어.
‘….’
전학생이 가소로워 보일 수도 있고, 귀여워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전학생에게 정말 겁을 집어먹을지도 모르지.
사람에 따라 다를 거야.
하지만 분명한 건.
‘반 애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돼.’
반 친구들에게 겁먹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강해 보이고 싶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껏 이 친구들 위에서 군림하던 우리 반 대장이니까.
[게라드 쇼>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최적화된 무대를 만들었다.할리우드 고등학교 체육관 뒤 공터.
구경꾼은 전교생이며.
싸우는 주인공들은, 할리우드 최정상에서 군림하는 대장들과 당돌한 전학생 한 명.
전교생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치러진 ‘예비 반장 선거’
물러서면, ‘쫄보’라고 인증하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지상 최대의 토크쇼! [게라드 쇼>가 찾아왔습니다!”
금요일 밤의 시작을 알리는 게라드의 힘찬 외침과 함께 방송이 시작되었다.
“지난주에 예고해드린 대로, 이번 주에는 그 어떤 방송에서도 본 적 없었던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합니다. 각각 방송에서 얼굴을 비춘 적은 있지만, 함께 나오는 것은 최초입니다. 오스카 특별편! 그 두 번째 이야기. 내년 오스카의 주인은 누구? 소개합니다. 지미! 레오!”
지미 니콜라이, 레오파드 비트리오.
이름만 들어도 어깨가 들썩이는 거물들 사이에 끼어버린.
“그리고 재희!”
도재희.
‘쫄지마.’
할리우드 최정상급 스타 지미와 레오 사이에서 잔뜩 주눅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들러리로 나온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발걸음에 힘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발걸음이 조금 투박해지고, 살짝 말아진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지미, 레오, 나.
순서대로 기다란 쇼파 가장 오른쪽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물병을 들어 올리자, 게라드 윌리엄 주니어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모 기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게라드 쇼>가 이 조합으로 방송을 하는 것만으로, 올해 예정되어있는 다른 토크쇼들은 다 죽여버렸다고. 난 웃으며 말했죠. 그딴 건 관심 없어요.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는 겁니다. 우리 쇼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이 자리로 불렀겠어요. 안 그런가요?”
“네!”
“좋아요. 손님들과 인사 한번 나눠보죠.”
게라드의 능청스러운 질문과 방청객들의 열띤 호응으로 쇼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가벼운 소개였다.
이름부터 시작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최근 근황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게라드의 말처럼.
“세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요. 한 명은 오스카의 주인, 또 다른 한 명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마지막은 할리우드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외국인 배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어느 토크쇼에나 있는 지리멸렬한 초반 탐색전일 뿐이다.
여기는 [게라드 쇼>고, 이 쇼의 MC를 맡은 게라드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어서 채찍을 꺼내 서커스의 사자들을 무대 위로 올려보내고 싶은 눈치였다.
“특별한 게스트를 맞이하여 아주 특별한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이름하여! ‘O/X 토크!’”
그래서 예정되어있던 시간보다 5분 이른 시간에 O/X 팻말을 꺼내 들었다.
“룰은 간단해요. 제가 질문을 드리면, 게스트들은 이 O/X 팻말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주시면 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O/X로 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 모든 논리가 흑백으로 떨어지지 않듯, 세모도 있고, 네모도 있으면요?”
지미의 질문에 게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대답하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들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 말 뒤에는 ‘시청자들이 실망하겠지만’이라는 전제가 붙어있었다. 적당히 조절하는 것은 게스트의 몫이다.
“첫 번째 질문드리겠습니다. 아주 간단해요.”
게라드가 말했다.
“Q1. 이 자리에 내년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있을 것 같습니까?”
자신감 어필, 혹은 이 자리에 없는 다른 배우들이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는 질문.
“오….”
질문과 동시에, 방청객들에게서 ‘오’ 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런 반응과는 다르게, 대답은 아주 쉬웠다.
“들어주세요!”
O / O / O
셋 모두 동그라미를 들어 올렸으니까.
“와우!”
여기 사람들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이미 가득한 자신감을 안고 이러한 ‘어필’을 하기 위해서다.
자, 닥치고 나를 지켜보라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말이야.
이런 의도가 진하게 깔려있다.
현직에 있다 보면, 자신이 들어가는 영화를 제외하고도 비슷한 시기에 진행 중인 다른 영화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현재, 가장 수상이 유력한 작품은.
레오의 [리벤지 아메리카>.
내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것은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와 이미 개봉한 [패브리케이터>.
전문가들 의견으로는 내 쪽이 조금 약세다.
시나리오가 가지고 있는 힘이 [리벤지 아메리카> 쪽이 더 파워 풀하고 크다는 분석.
하지만, 아직 내게는 할리우드의 감시를 피해 해외에서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알카트로즈>라는 ‘결정구’ 하나가 더 남아있다.
자신감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다음 질문 가겠습니다. Q2. 음, 이 질문은 조금 더 흥미롭네요. 내년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방청객들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O를 드는 순간, ‘내년 오스카는 내 것’이라는 문구로 내일 일간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박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내가 가장 선택하기 어려워하던 질문이다.
패널티를 줄이는 방법은, X를 들고 겸손을 포장하는 방법이지만.
“들어주세요.”
나는 O를 들어 올렸다.
모르겠다.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 같은 것.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발현되었다.
단순한 치기는 아니다.
결과는 X / O / O
다행스럽게도, O를 들어 올린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가운데 앉아있는 레오였다.
방청객들이 그야말로 환호성을 지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고, 게라드도 잔뜩 흥분했다.
“O가 두 명이군요! 이렇게 제대로 격돌하게 됩니다. 자! 인터뷰를 하기 전에, 지미에게 먼저 묻죠. 지미. 왜 X를 든 것입니까? 자신 없으신 겁니까?”
그러자 지미는 아주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올해 이미 들었으니까요. 아마도, 협회가 제게 2년 연속 주지는 않을 테니, 눈치껏 빠진 거죠.”
“그렇군요. 꽤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지미. 혹시 모르잖아요. 하하! 그럼 여기 두 사람 중 한 명이 남우주연상을 들어 올린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내년에 제가 오스카를 넘겨줄 사람은, 아마 제 생각에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게라드의 노골적인 질문에 지미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건, 노코멘트 하지요.”
분위기를 잔뜩 띄워놓고 결정적인 알맹이는 던지지 않은 채 지미가 퇴장했다.
하지만 장내 텐션이 쳐지지는 않았다.
게라드가 피치를 계속해서 올렸으니까.
“그럼, 이제 O를 들어 올린 스타들에게 물을 차례군요.”
레오가 나를 흘낏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나 역시 그런 레오를 바라보았고,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레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옅게 흘리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제가 받을 것 같습니다.”
레오의 한 마디에 방청객들이 뒤집어 졌다.
그의 팬들은 환호했고, ‘오스카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 자신감에 놀라워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디트로이트 피플>을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훨씬 강렬합니다. 서부극이죠. 황야에서 나고 자란 남자의 아주 처절한 분투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주 걸작이죠.”
게라드의 요청대로 ‘걸작’이라는 표현에 유독 힘을 준 레오는, 특유의 여유만만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촬영 준비는 모두 끝났고, 다음 주면 촬영에 들어가는데 아마 늦어도 연말에는 공개될 것 같습니다.”
“….”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질문.
‘지난 12년간, 받지 못했던 상을, 올해에 꼭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 질문이 나올 타이밍이다.
하지만 게라드는 침묵했다.
대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겨버렸다.
“흥미진진한데요. 이제야말로 세간에 떠도는 ‘오스카의 저주’를 풀 때로군요. 부디 그 카우보이가 쥔 리볼버 방아쇠로 족쇄를 부숴버리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게라드.”
“….”
아마도, 약속된 듯 보였다.
가장 맛있는 먹잇감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파드의 수상 실패’를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니까.
대신 그 화살이 내게 넘어왔다.
“이번에는 재희에게 묻죠. 레오의 인터뷰를 들으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자신감은 여전하신가요?”
나는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네.”
그리고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렌즈 속에는 머나먼 한국에서 나를 응원해 주고 있는 사람들. 아카데미 시상식에 새로운 ‘기적’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 주변에 내 편이라곤 아무도 없지만,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저는, 제가 받을 것 같습니다.”
질러 버렸다.
방청석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환호가 들려왔다.
레오X재희.
이쯤 되면 자존심 싸움이다.
*
“꿈이죠. 작년 [게라드 쇼>에 나와서 했던 얘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동양인도 미국시장에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 시작이 바로 아카데미죠.”
하지만 오만방자한 태도는 아니었다.
보다, 높은 꿈을 꾸고 있는 한 명의 작은 동양인 배우.
내가 품고 있는 청운(靑雲)의 꿈.
영화 사정에 어두운 현지인들이 듣기엔 ‘저 새끼는 뭐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를 알고 있는 방청객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휘이이익!”
휘파람을 불며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이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고 박수갈채를 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게라드가 방청석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작년 저희 쇼에서 보여준 재희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강단 있고, 배짱 있는 모습이요. 그 사이에 사적인 자리에서 몇 번을 보았습니다만. 이 친구는 한결같아요. 그래서 좋아하죠.”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최근 재희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들을 연출해내고 있습니다. [아다지오>, [데드 매니악>, [패브리케이터>. 그가 참여한 작품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하고 있죠. 이렇게 시장에 빠르게 적응한 동양인 배우는 역사상 드물어요. 그게 재희를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입니다. 당신은 언더독의 자격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남우주연상을 노리는 언더독.
게라드는 꿈을 먹는 몽상가가 아니다.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말한다.
“하지만 ‘남우주연상’은 분명 어려운 도전이 될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국의 많은 액션 스타들도 할리우드에서 많은 작품을 ‘주연’으로 참여했지만. 결국, 할리우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고국으로 돌아갔죠. 그들은 지금의 재희보다 더 유명했고요.”
“맞아요.”
모두 맞는 말이다.
이 액션 스타들이 할리우드를 떠난 이유도, 동양인에게 주어지는 한정적인 역할에 질렸기 때문이다.
연기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액션 잘하는 배우로 그쳤기 때문.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
이미 참여하고 있는 작품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저는 자신 있어요.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강렬하게 자신감을 내비치자, 게라드가 씨익 웃었다.
“[게라드 쇼>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자신만만한 신인으로 나를 포장하기엔, 이 정도면 딱 좋다.
하지만 그때.
내 옆에 앉아 내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레오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게라드가 발언을 허가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레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자신 있어요?”
“…..”
대본에 없던 돌발상황이다.
레오는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내게 묻고 있다.
‘너, 정말 나보다 잘할 자신 있어?’
이 정도 도발은 내게 우습지.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물론이죠. 레오.”
‘네가 뭐라고.’라고 말하는 듯한 내 눈을 조용히 바라보던 레오가 쓴웃음 지었다.
“….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전학생 한 명이, 신고를 마쳤다.
ⓒ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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