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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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먹는 배우님 – 143화. >143.
박진우 연출은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체육관으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운동을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호흡을 골라냈다.
“감독님. 오셨어요?”
“네. 이야, 연습 많이 하셨네요. 요 보름 사이에 얼핏 보기에도 몸이 단단해진 느낌인데요.”
“괜찮나요? 조금 더 불려야 할까요?”
“아뇨. 지금이 과하지도 않고 딱 좋아요.”
‘근육질’ 이미지가 고착된 액션 배우가 아닌 이상에야 몸을 만드는 작업도 일정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젊음이 무기인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나, 비주얼 배우에게는 보기 좋은 몸은 강점이 되지만.
연기할 스펙트럼이 넓은 전문 배우들은 오히려 신체 밸런스만 잘 유지하지, 아름다운 몸매에 대해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배역에 따라 종종 근육을 빼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작품에 들어가기 몇 주 전부터 운동에 집중해서 배역에 맞는 체형을 ‘만드는 것’이 빠르다.
지금의 나처럼.
또한, 머리카락 역시 마찬가지다.
“대신에 머리카락은 조금 정리했으면 하는데.”
나는 평소에 기본적으로 머리카락을 자주 자르지 않는다.
헤어스타일은 배역의 이미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장치인데, 감독이 긴 머리를 원할 경우 짧은 머리를 길게 만들 수 없으니 일단은 기르는 것이다.
지금도 앞머리가 눈꺼풀을 찌를 만큼 내려왔지만, 박진우 감독의 헤어스타일 컨펌이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었고.
“생각하신 스타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데, 그 헤어 컨펌이 오늘 떨어졌다.
“좀 더 강렬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타일리스트님은?”
“아, 잠시만요.”
곁에 앉아있던 영미 씨가 내게 다가와 앞머리를 정리해주더니.
“으음.”
심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영화 [알카트라즈>에 대해 분석한 내 캐릭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극 중 캐릭터가, 불명예 퇴역한 군인이었죠. 퇴역하고 정확히 3개월 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음. 삭발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삭발.
필요하다면 필요한 절차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이 손사래 쳤다.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십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한 군인이라면, 퇴역을 당하더라도 머리를 기르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오빠 머리가 생머리라, 너무 짧으면 떠서 보기 싫거든요. 짧게 자른 뒤에 다운 펌으로 옆머리는 살짝 죽이고, 윗부분 기장은 조금 살리는 게 어떨까요?”
“좋아요. 일단 보여주세요.”
“네. 촬영 일에 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영미 씨는 서둘러 나가더니.
“따라와요.”
재익이 형을 잡아끌며 근처의 미용용품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응? 나?”
“그럼요. 그럼 혼자 보낼 생각이에요?”
“아, 알았어. 자, 잠시만!”
두 사람이 빠져나가고 주위를 둘러보니 체육관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나는 의자 두 개를 가지고 와 박진우 연출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앉으세요.”
박진우 연출이 옆자리에 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훈련은 할만 하십니까?”
“생각보다 재미있던데요.”
“자이라 첸 코치의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네? 그 호랑이 코치가요? 그럴 리가. 매일 저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걸요.”
“하하! 아니에요. 정말 칭찬했습니다.”
그의 눈이 묘해졌다.
마치, 자랑스러운 동생을 보는 듯 대견하다는 눈이었다.
“아까 정말 멋지던데요. 자이라 코치 말처럼, 정말 재능있으신가 봅니다. 보름 만에 이 정도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와이어 덕분이죠. 다른 분들은 와이어 없이 맨몸으로 하시는데요.”
“그분들은 맨몸으로 무술을 하실 수는 있겠지만, 절대 도 배우님 같은 그런 눈빛을 내지는 못 할 겁니다.”
“….”
내가 가진 눈빛.
“정말, 제가 생각하던 눈빛이었어요. 도 배우님은 어쩜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십니까?”
그야, 책 대본을 먹었으니까.
난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촬영은 언제 들어갈 예정이십니까?”
“세트가 완료되는 즉시 바로요. 저도 아직 세트를 둘러보지 못했습니다만, 곧 완료될 예정입니다. 배우님은 세트에 가보셨습니까?”
“아뇨.”
매일 아침, 하이마운트 픽쳐스 직원들은 분주하게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리틀 아이랜드(악마 섬)로 이동하고는 했는데.
나는 이곳 ‘포트스티븐즈’에 도착한 뒤로 체육관과 숙소만을 오가며 운동만 했다.
나 역시, 세트 상황이 매우 궁금한 상태지만 내가 가서 본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호기심을 죽이며 운동만 하는 거지.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아, 그럴까요?”
하지만 박진우 연출이 함께 간다면 얘기가 다르지.
가고 싶다.
“가시죠.”
“그럼 해지기 전에, 얼른 출발하시죠.”
박진우 연출, 나. 하이마운트 픽쳐스의 제작 PD는 차량으로 인근 선박장인 넬슨 베이 포인트로 이동했다.
포인트에는, 시드니 국제공항 화물을 통해 들여온 촬영 장비, 소품 대도구 따위가 바닥에 잔뜩 쌓여있었다.
크고 작은 보트를 이용해, 이 짐들을 모두 ‘악마 섬’ 안으로 들이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
걔 중에는.
“이건 혹시… 제 캠핑 트레일러인가요?”
“네. 도 배우님 집입니다. 하하.”
거대한 캠핑 트레일러도 있었다.
내가 기존에 쓰던 것과 똑같은 최고급 모델.
아마, 현지에서 준비한 듯했다.
“마음에 드시나요?”
“….”
악마 섬 안에 들여놓고 촬영 중간중간마다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
어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을까.
“그야, 물론이죠.”
“하하, 다행입니다.”
해가 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짐을 옮기는 것이 시급했다. 급한 짐들을 먼저 실어 보내고 난 뒤에, 우리는 넬슨 베이 포인트 선박장에서 10인승짜리 새하얀 연출용 보트를 타고 섬으로 이동했다.
쌔애애애액.
시원한 여름의 바람이 이마를 가르며 내게 날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던 트레이닝 복이 환기되며, 시원해진다.
육지에서도 보이는 ‘악마 섬’은, 실제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크고 작은 섬 두 개를 지나고 정 가운데 보이는 작은 섬 하나.
악마 섬.
약 20분여를 달려 작은 부둣가에 보트가 정박하자마자 보트는 짐을 옮기기 위해 포인트로 돌아갔다.
우리는 하이마운트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언덕길을 올라갔는데, 초입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깡깡!
망치질 소리.
“이봐! 비키라고!”
“아, 예예!”
“이것 좀 같이 옮길게요!”
소품 옮기는 소리.
“여기! 키 라이트 하나 더 달자.”
조명 설치하는 소리.
드륵! 드르륵.
외벽 페인트 칠하는 소리.
촬영 감독들이 섬 곳곳을 둘러보며 앵글을 확인하는 소리.
이 모든 사람들이 왁자하게 움직이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세트를 짓고 있었다.
이들의 염원이 담긴 세트는, 그야말로.
“어떠세요?”
“… 미쳤네요.”
환상적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대본에 기재된 그 자체였다.
「감옥 내부의 조그만 창문 너머로는, 마치 폭격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한 황폐한 시가지가 드러난다.」
[알카트로즈>는 판타지 영화다.감옥이지만, 그 안에는 간수들을 위한 거처가 마련되어있다.
일종의 작은 사회다.
「벌레들끼리 모여 살아봐.」라는 극 중 대사처럼.
법전 아래에 죄수가 깔려있고, 법 위에 간수가 있는- 철저한 계급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감옥, 집, 시가지, 건설현장, 작업장, 채굴장.
거무튀튀하고 더러운 것들은 죄다 모여있는 공간.
박진우 연출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그 공간이 악마 섬 안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박진우 연출이 하이마운트 픽쳐스에 얼마나 대단한 신뢰를 얻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
박진우 연출 역시, 흡족한 얼굴이었다.
“괜찮은데요. 아직 미흡한 부분은 채굴장 쪽인 것 같은데… 저쪽은 일단 촬영을 먼저 진행하고, 중간중간에 작업 해도 늦지 않겠어요.”
“네, 맞아요.”
“이거. 생각보다 일찍 촬영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도 배우님이 먼저 와서 준비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겠어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작업 중인 세트를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역시 근사하다.
와이어를 타고 저 건물 지붕에서 점프하고, 벽을 넘나들며 이곳 세트를 휘저을 상상을 하니 피가 뜨거워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트 구경에 빠져있던 우리를 향해 다가온 사람.
박진우 연출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김민희 PD님이셨다.
김민희 PD는 나란히 서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말씀하셨다.
“우리도 참 오랜 인연이네요. 그렇죠?”
“입대 동기나 다름없죠. 한 명은 입봉. 한 명은 영화 데뷔.”
“꺄르륵! 그 말, 정말 맞네요.”
김민희 PD님은 나와 박진우 연출을 가리키며 푼수처럼 웃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세트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 참 이상하죠?”
“네?”
“봐봐요. 저-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
할리우드 영화의 메카, 하이마운트 픽쳐스.
그제야 김민희 PD님의 말을 이해한 나와 박진우 연출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네요. 참, 이상하네요.”
“네. 저도 기분이 조금 이상해지네요.”
몇 년 전, SAFA 건물에서 처음 만나던 날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입대 동기 이등병’이나 다름없던 업계 초보들이.
당당하게 한국인 감독과 한국인 주연 배우가, 할리우드 사람들을 이끌고 호주에서 영화를 찍는다.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맞아요.”
제작비는 1,700억 원이 훌쩍 넘어가는 초대형 블록버스터에, 대규모 해외 로케이션.
이 영화의 중심에 우리가 서 있다.
박진우 연출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 배우님. 이번 작품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감독님도 참.”
나 역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김민희 PD님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 다 보는데.”
“앗, 그런가.”
가녀린 두 팔로 우리를 벌떡 일으키시더니, 계속 깔깔거리며 웃으셨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시원해, 나도 모르게 계속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감시에서 잠시 벗어나, 비상을 준비하는 잠룡(潛龍).
이 잠룡의 비상을 축하해주듯,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남반구의 석양.
그 석양을 등지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자, 감독님 한마디 하시죠.”
내 제안에 박진우 연출이 쑥스럽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는 이제껏 듣지 못한 아주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지만.
“할리우드. 이 자식들 제대로 한 번 씹어 먹어봅시다.”
“푸하하!”
박진우 연출이 말하니, 귀엽게 느껴진다.
맞는 말이지.
“할리우드가 뭐 별건가요.”
그래.
이제 그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할리우드?
레오?
아카데미 시상식?
모두 기다려.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사악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다 씹어 먹어버리죠.”
[ 책 먹는 배우님 – 14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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