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45)
145.
첫날부터 액션 촬영이라니.
“와아-!”
하지만 NG 하나 없이 깔끔하게 끝내버리는 연기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런 감정은, 익숙하지만.
항상 기분 좋은걸.
“괜찮아요?”
오케이 사인이 들리자마자 내게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던 백인 배우 ‘폴’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요.”
나는 미약하게 웃으며 폴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나를 일으켜 주었다.
“폴, 한 번에 오케이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저도 이런 폭력적인 장면은 싫어한다고요.”
“응? 액션 전문 배우이신데도요?”
“액션을 전문적으로 찍기는 하지만, 저는 비(非) 폭력주의자입니다. 모르셨어요? 하하!”
전직 유명 레슬러이자, 현재는 할리우드 액션 전문 스타로 유명세를 떨치는 폴이 비폭력주의자 라니.
“그럴리가요?”
“정말인데요?”
“하하하!”
이 또한 코미디나 다름없다.
폴은 [알카트라즈>에서 나를 괴롭히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악역이자 비중 있는 조연이며, 할리우드에서 다작(多作)을 하기로 유명한 배우기도 하다.
그에게는 특정 이미지가 존재하는데.
190cm 장신에 거대한 체구. 무식할 정도로 강력해 보이는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캐릭터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캐스팅 1순위라고 볼 수 있다.
폴이 할리우드에서 얼마나 독보적인 캐스팅 인지도를 자랑하냐면.
“최근에 [리벤지 아메리카>에서도 7회차 촬영을 나갔죠. 비중은 여기보다 좀 적은데, 그래도 대사가 많아서 좋았죠.”
폴은 레오의 작품에도 출연했다.
똑같이 레오를 구타하는 근육 덩어리 악역으로.
“아, 그래요?”
할리우드도 한국도.
배우는 많지만, 정말 자주 쓰이는 배우는 한정되어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여주인공 어머니.’
‘올림픽 대표팀 코치.’
‘연쇄살인마’
이런 이미지를 놓고, 떠오르는 배우를 정해보라고 묻는다면, 아마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배우 한 명씩을 떠올릴 거다.
우리는 이를 ‘믿고 보는 배우’라고 부르지만.
정작 본인들은 ‘고착된 이미지’에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
폴처럼.
“매번 비슷한 영화만 들어오는데, 저도 로맨스 하고 싶다고요. 그런데 안 들어와요. 이 근육으로 강하게 껴안아줄수 있는데 말이야. 하하!”
폴은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는 근육 덩어리다.
내가 물었다.
“[리벤지 아메리카> 촬영 분위기는 어떤가요?”
일종의, 적지 분위기는 어떤지 확인하는 ‘정찰’
“좋아요. 좋아요.”
폴은 가볍게 대답하면서도-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좋아요… 좋은데, 레오가 조금 예민하게 굴었죠. 아마 재희와 출연했던 그 라이브 쇼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는 해요.”
“… 이유라도 있나요?”
“네. 제 촬영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 가진 술자리에서 제가 말했거든요. 다음 주부터 호주에 와서 [알카트로즈>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이 영화 주연 배우가 재희라고.”
“….”
“그러니까 저한테 묻더라고요. 자기도 대본 읽어볼 수 있겠느냐고.”
응? [알카트라즈> 대본을 읽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요?”
“박 감독과 하이마운트에게 물어봤죠. 보여줘도 된다고 하기에 보여줬어요. 그게 끝이에요. 뭐, 별일 있겠어요.”
폴은 여유롭게 웃었다.
“듣기로는 두 영화 개봉 시기가 비슷할 것 같은데. 극장에 제 얼굴이 잔뜩 걸리겠군요. 아무나 이겼으면 좋겠네요. 하하!”
“….”
폴의 입장에선 그렇지만.
나와 레오 두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자존심이 걸려있는 싸움이다.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나저나, 대본을 보고 싶어 했다고?
왜지?
내가 무슨 영화를 찍는지, 단순히 궁금하다는 건가?
나는 너무 궁금했지만, 이 궁금함을 속으로 삼켰다.
굳이 속으로 끙끙거리며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고.
“도 배우님.”
박진우 연출이 이 문제를 가지고 제 발로 나를 찾아왔으니까.
“상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레오의 문제를 가지고.
*
첫날 오전 촬영이 끝났다.
점심시간.
식사는 뭍에서 추진해서 온 밥차를 통해 세트에서 배식을 했다.
나와 박진우 연출은 식사를 담아 내 캠핑 트레일러로 들어왔다.
“상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어젯밤 레오파드 비트리오 측 에이전트가 하이마운트에 문의했다고 합니다.”
문의?
“무슨 문의요?”
“레오파드 쪽에서, 배우 본인이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더군요. 특별출연으로.”
“….”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일어났다.
대본을 보고 ‘이 영화 재미있네? 나도 하고 싶어!’ 이런 순수한 호의로 접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 잘 알기에 박진우 연출도 내게 상의를 하려는 것이다.
“하이마운트 측에서는, 좋아하고 있어요. 레오가 참여하는 순간, 이슈가 될 테니까요. 물론, 결정은 제가 하지만.”
“[리벤지 아메리카>는요?”
레오 역시, 본인 주연의 영화를 현재 촬영 중에있다.
[리벤지 아메리카> 쪽이 몇 주 더 빠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와 촬영 일자가 거의 겹친다.LA에서 뉴욕으로 날아가도 모자를 시간에.
호주와 미국을 오가며 촬영을 한다?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더 뻔뻔하게 나왔다.
“레오가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달라고 요구했다더군요. 미국에서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호주로 넘어오겠다고 합니다.”
“…..”
스케줄을 맞춰달라고?
그게 말인가?
“스케줄에는 지장이 없나요?”
“계획되어 있는 순서를 조금 바꾸면 되긴 합니다. 레오가 약속한 날짜에 오기만 한다면.”
“….”
그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김민희 PD님이 말씀하셨다.
“뻔히 알잖아요? 왜 오려는지? 만약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의도적으로 촬영에 불참하기라도 한다면?”
“….”
그 역시 프로기 때문에 아마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작정하고 호주행 비행기에 타지 않는다면 스케줄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
급하게 배우를 찾아야 하고, 어쩌면 늦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러겠어? 업계에 소문 금세 퍼질 텐데.”
“….”
그래. 의심만 해볼 뿐이지,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 싸구려는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대답을 아꼈다.
이 의도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대체 이유가 뭘까?
왜 나와 같은 작품에 출연하겠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정면 승부’.
나는 일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임강백.’
영화 [피셔>가 손익분기점 돌파에 실패하자, 러닝 개런티로 계약했던 임강백은 제 몫의 개런티를 제대로 챙겨 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피셔> 팀 중 유일하게도 독보적 성공을 거둔, 내게 화풀이를 했고.
내 도발에 분개한 임강백은 내게 [삭제>라는 영화의 특별출연을 제안하며 한바탕 싸웠었지.
같은 작품에서 실컷 만나는 것.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상대가 임강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연기파 배우라는 점과.
이번에는, 내 홈그라운드라는 점.
“도 배우님.”
“… 아, 네.”
“도 배우님이 불편하시다면,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박진우 연출이 내게 제일 먼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나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게라드 쇼>에서 공개적으로 도발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감독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 배우님 의견이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아, 이런 착한 사람 같으니라고.
감독님 입장에서는, 더군다나 할리우드에 정식으로 데뷔할 감독에게는 충분히 탐낼만한 배우다.
그가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정받는 셈이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속내를 감추며 내 의견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 레오가 무슨 배역을 원하나요?”
“교도소장 2요.”
“…”
영화 [알카트라즈>에는 교도소장이 총 2명 등장한다.
교도소장1은, 극 초반에 죄수들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새롭게 부임하는 사람이 바로, 교도소장 2.
촬영 분량은 몇 회차 없지만, 능글능글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요구한다.
우습게도, 캐릭터만 보자면, 레오에게는 제격이다.
아마 ‘자신’에게 적격인 것을 알고 본인 역시 인지한 상태로 의도적으로 이 역할을 골랐을 것이다.
왜냐면, 그가 소화하기엔 역할이 너무 작으니까.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지는 거다.
그리고 이 미끼는, 나 역시 거절하기 힘들었다.
“원래 예정되어있던 배우는요?”
“저희 영화에서 하차하는 대신, [리벤지 아메리카>에 캐스팅하겠다더군요.”
“….”
캐스팅까지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탑스타.
이 모든 리스크를 책임지려 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시커멓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 그가, 호주에 오려고 한다.
나와 싸우기 위해서.
나는 피식 웃으며, 던지듯 말했다.
“좋아요.”
“네?”
“레오, 섭외하시죠. 저도 궁금하던 참입니다.”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 자는 임강백 같은 하수도 아니고, 조승희처럼 내게 우호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마치, 최종 보스 하나만을 남겨둔, 용사가 된 기분이군.
아니.
할리우드 입장에서는 어쩌면, 내가 마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
마왕이라도 좋다.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입니다.”
넘을 수만 있다면.
*
첫날 촬영은, 그렇게 어영부영 끝이 났다.
‘레오파드 비트리오’가 섭외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들었어? 레오파드 그 양반, [알카트라즈>에 섭외 요청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아, 정말? 역시, 감독님이 말씀해주셨구나?”
재익이 형까지 어디선가 주워들어 내게 물었으니, 현장의 거의 모든 크루들이 다 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성격 참 이상하네. 적진에 직접 찾아와서 감시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 양반, 무슨 생각이야 도대체?”
재익이 형의 투덜거림에 영미 씨가 맞장구쳤다.
“결투 신청? 그런 건가 보죠. 으으!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오빠한테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오, 영미 씨. 오랜만에 나랑 의견이 좀 맞는데? 그런데 어쩌겠어. 할리우드에 왔으니, 할리우드 법을 따라야지.”
“그러니까요. 완전 재수 없어요. 지가 여기 오면, 왕이라도 될 수 있는 줄 아나 보지? 오빠, 이렇게 된 거 확 눌러버려요.”
“… 그렇네요.”
나는 영미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영미 씨.”
[리벤지 아메리카> 영화 현장 전체를 휘어잡는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가, 할리우드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박진우 연출의 말을 잘 들을까?아니, 아닐 것이다.
영미 씨 말마따나, 그는 절대 왕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적진에 들어오는 꼴 밖에 되질 않는다.
알싸하게 퍼져있던 불안감들이 모두 사라졌다.
“뭐가 고마운데요?”
“그냥요. 힘이 나네요.”
나는, 오히려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왕이 될 줄 알고 쳐들어왔지만, 실상은 미운오리새끼.
[청춘열차>의 송문교 같은 꼴이나 나지 않기를.“싱겁기는, 그래서 기분도 꿀꿀한데 맥주 어때요?”
“좋죠.”
나는 숙소 침대에 앉아 맥주 캔을 따 꿀꺽꿀꺽 들이켰다.
적지에 맨몸으로 쳐들어오는, 레오를 위해 건배.
[ 책 먹는 배우님 – 14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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