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49)
149.
캐릭터 영상은, 캐릭터의 매력을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영상이다.
가장 폭발적인 연기의 단면이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순간만을 담아 편집한다.
즉, 연기의 액기스만이 담겨있다.
이 액기스를 가지고 벌이는 ‘게임.’
‘당신의 배우에게 투표하세요.’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 오디션 프로그램이 떠오르는 문장이다.
그래.
레오가 내게 제안한 ‘게임’은 그만큼 유치하다.
유치하면서도, 또 단순하다.
그렇기에, 내 마음에 쏙 든다.
“레오 같은 배우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제안을 해? 만약 지면 재희 네가 무슨 소원을 말할 줄 알고?”
재익이 형의 이런 ‘일반적인’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겠죠.”
난 이해할 수 있다.
레오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나를 날려버리고 싶고,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질투심과 콤플렉스를 벗어나고 싶고, 승리자로 기억되고 싶은 거다.
마치, 내가 송문교의 삶에 상처를 내고 싶어서 [청춘열차>라는 오디션을 처음 선택했던 것처럼.
우리는, 정말 비슷한 향기를 풍긴다.
악마 섬에 도착했다.
나와 레오는 흩어져 각기 분장을 받기 시작했고, 스탭들은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30분 정도가 지나고, 분장을 마치고 의상을 갈아입고 필드로 나왔다.
촬영 준비는 모두 끝나있었고, 배우들만 스텐바이 하면 되는 상황.
레오도 준비를 마친 듯, 강렬한 레드 컬러의 세미 정장을 입고 걸어 나왔다.
“준비되셨나요?”
“시작하지.”
레오의 손에는 [알카트로즈>대본이 들려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들여다본 듯, 꾸깃꾸깃한 대본. 그의 얼굴은 ‘칼’이라도 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늘 촬영할 씬의 내용.
「# 93. 반란 이후의 알카트로즈.
지옥 같은 새벽이 지났다.
지난밤 있었던 반란과 저항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귀신같은 얼굴로 간수와 교도관들을 무참히 살해하던 악귀들은 온순한 양이 되어있었고, 새로운 권력의 정점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새롭게 교도소에 부임하게 된 교소도장(2)은 비열하게 웃으며 죄수들 앞 정중앙에 섰고, 죄수들은 복종의 의미로 무릎을 꿇었다. 그 선두엔, ‘이신’이 있다.」
“자! 갈게요!”
촬영이 시작되었다.
*
‘폴’의 반란은 성공하는 듯했고, 교도소장(1)은 죽었다.
즉, 내 안전을 책임질 ‘빽’이 사라졌고.
나는 탈출에 대한 계획을 전면적으로 다시 세워야 한다.
어떻게 이곳에서 빠져나갈 것인가.
어젯밤, 그 난리를 피웠음에도 그 누구도 ‘알카트라즈’를 벗어난 사람은 없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는 이 감옥은 수십 수백여 명이 죽어 나가도, 여전히 건재하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알카트라즈의 죄수들은 모두 죽거나, 여기 무릎을 꿇고 있다.
새로운 ‘알카트라즈’의 왕의 즉위식을 위해.
이곳의 왕이 된 레오는 다리가 불편한지 목발을 짚은 채 비열하게 웃으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죄를 짓고 이 시궁창 속에 들어온 죄수들이 또 다른 ‘죄’를 지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그의 얼굴에 깃든 ‘오만함’이 제 주인을 찾았다.
“이것들을 모조리 죽여- 말아.”
딱 맞는 옷을 입은 레오는, 죄수들의 목숨을 한 손에 움켜쥐고 이죽이죽 웃었다.
“아니지. 그럴 수는 없지. 다 죽여버리면,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지잖아. 명색이 ‘교도소장’ 인데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이곳 분위기를 좀 알아야겠는데…”
한참을 턱을 긁적이며 고민하던 레오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하! 죄수들 한 명씩, 개별 면담을 실시하겠다. 교도소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준비하라고. 이를테면 식당 밥이 별로라거나, 여자가 필요하다거나. 뭐든. 어때, 좋은 생각이지?”
“….”
“꺄르르르, 꺅꺅!”
레오가 신난다는 듯 꺅꺅거리며 경박스럽게 웃더니 표정을 굳히며 나를 보며 말했다.
“우선, 너부터.”
대본에는 없는 애드리브였다.
*
교도소장의 개별 면담은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다.
단 두 명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배치된 카메라의 숫자는 총 네 대.
풀샷 하나, 바스트 하나씩.
마지막으로 남은 한 대는, 레오가 쥐고 있는 기다란 파이프 담배.
“푸우-”
파이프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레오의 입에서도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 얼굴에.
“….”
역시, 대본에는 없는 애드리브였다.
마치, 용처럼 내 얼굴에 뿜어대는 담배 연기를 보며.
“끄, 꺅꺅꺅!”
레오는 정말로 신이 난 듯 경박하게 웃어댔고.
나는 불쾌함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우선- 감독의 컷 사인이 없었고, 이런 장면들은, 우습게도 ‘상황’에 딱 어울리게 들어맞고 있었으니까.
레오는 레오의 연기에 심취해있었고, 나 역시 이를 내심 즐기고 있었다.
탁!
레오가 파이프 담배를 내려놓으며 서류를 들어 올렸다.
“군인 출신이라. 육군인가, 해군인가?”
“공군 특수부대.”
“오호, 그래? 나도 군 생활을 경험했거든. 3년. 세계전쟁 때 타이완으로 파병을 갔었지. 근데 군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빌어먹을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다리가 병신 된 기억밖에 없어. 이거 보이나?”
레오는 자신의 목발을 자랑스러운 훈장이라도 되듯 가리켰다. 그는, 한 쪽 다리가 불구인 장애인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알아?”
“….”
“내가 군인들을 아주 X같이 생각한다는 거야.”
대사를 마친 레오가 비열하게 웃었다.
실제로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으니, 그의 리얼리티는 살아있었다.
아마, 정말로 나를 X같이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흐음, 전 교도소장이 아끼던 친구였나? 품행 방정에 교도생활 우수에, 신입죄수 교육전담 특별 교육관?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 새로운 죄수들이 수감 되면, 교육을 합니다. ‘알카트라즈’에 어울리는 죄수로 만드는 작업이죠. 우리는 이를 ‘뇌 비우기’라고 불렀습니다.”
“‘뇌 비우기’라. 생각은 안 하고 몸만 움직이는 버러지들을 만드는 작업인가?”
“맞습니다.”
“재미있는 생각이긴 하다만, 죄수가 죄수를 교육한다고?”
“….”
“참 개 같은 생각이군. 이러니까 반란이 일어나지. 쯧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이봐, 군인 친구. 내가 어떻게 이곳을 이끌어갈지 궁금하지 않나?”
“….”
“잘 들어봐.”
레오는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손을 앞으로 쭉 내밀고 가슴도 크게 내밀며 말했다.
“나를 위한 곳이지.”
음악에 빠진 지휘자 같기도 했다.
그는 격정적으로 이 장면을 연주하고 있었다.
피치, 템포, 언어, 호흡.
모든 요소들을 완벽하게 컨트롤 하며.
“내 허락 없이 입을 열면 죽일 거야. 늦잠을 자도 죽일 것이고. 일하지 않고 놀아도 죽일 거야. 반란이 일어나면, 또 죽일 거야. 그냥 다 죽일 거야. 으꺅꺅! 켁, 케헥!”
“….”
헛기침까지 하며 웃어대는 그는, 정말 미치광이였다.
‘대본’에 기재되어있지 않은 창조의 영역까지 살려내며 이 장면을 연주하는 ‘진짜’ 마에스트로였다.
왜, 이런 자가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던 걸까, 호의적인 감정을 품을 만큼.
그는, 매력적인 배우다.
레오는 자신에게 허락된 가장 ‘다이나믹’한 장면을 살려내고 있었다.
씬스틸러.
레오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
하지만.
“… 그렇군요.”
나는 일말의 위기감도 없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내가 이 장면의 주인공이 될 테니까.
레오가 경박하다면, 나는 ‘묵직하다.’
이런 내 ‘묵직함’이 조금씩 장내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레오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 이상 웃지 않았다.
대신, ‘면담’을 계속 진행했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네?”
“너, 내 눈과 귀가 되어라.”
“…..”
“전임 교도소장이 믿고 일을 맡긴 놈이라면, 내게도 나쁘지 않지. 이 쓰레기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들을, 내게 낱낱이 보고해. 어떤 놈이 하루에 똥을 몇 번 싸고, 밥을 너무 많이 먹고, 누가 누구를 싫어하네 등등. 모조리 빠뜨리지 않고.”
나는 속으로 감정을 삼켰다.
이건, 기회다.
새로운 ‘왕’에게 이쁨 받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나와 단둘이 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해. 괜찮은 소식을 하나 물어올 때마다, 내가 상을 주지. 일종의 칭찬 포인트지. 포인트 100점을 모으면,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내가 ‘알카트라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으흐흐.”
레오가 이 상황이 즐거워 미칠 것 같다는 듯, 미소지었다.
저 표정을 어디에서 봤나, 했더니.
조금 전, 보트 위에서 내게 ‘게임’을 제안했던 그 표정과 똑같다.
그는 정말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소원,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내가 다시 묻자, 레오가 짜증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속고만 산 놈이로구나. 정말이다.”
내가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묵직한’ 캐릭터다 보니, 살짝 드러내는 이 감정 한 조각도 파괴력이 상당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마십시오. 분명,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대사.
극 중 배역 ‘이신’이 교도소장(2)에게 한 말이 아니라.
도재희가 레오에게 한 말이다.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라는 사실을 깨달은 레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금 전. 보트 위에서 우리끼리 약속했던 ‘게임’에 대한 보상에 이야기라는 것을 이제 눈치챘을 것이다.
“….”
‘애드리브’에는 ‘애드리브’로.
레오가 내게 눈으로 말하는 듯 했다.
‘어쭈, 이 새끼 봐라?’
그리고,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무슨 소원이 빌고 싶은데? 아니지. 그 전에. 나와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애드리브였고.
나 역시 ‘애드리브’로 응수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영화 ‘알카트로즈’ 팀의 스크립터가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박진우의 팔을 두드렸다.
“감독님. NG인데요.”
NG도 이런 NG가 없지.
이미 대본에 없는 대사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다.
애드리브도 이미 도를 넘은 상황.
하지만 박진우는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알고있어. 잠시만.”
조금 전, 보트에서 둘의 대화를 함께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박진우는, 지금 저 둘이 차마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하지 못한 말들을, 연기라는 핑계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일부러 멈추지 않았다.
‘할 말은 하는게 좋겠지.’
비단 이런 이유 뿐만이 아니라도, 살려도 괜찮을 것 같은 장면들이 이미 여러 컷 나왔기 때문이다.
현실과 연기 사이를 기묘하게 넘나들며 서로가 서로에게 장이요. 체크메이트를 날리고 있는 두 배우.
“하아.”
박진우는 짧은 탄성을 뱉었다.
아쉬움의 탄성이었고, 이 탄성 뒤에는 배우들은 향한 ‘존경’이 들어있었다.
저 둘이, 조승희나 설강식 처럼 사이가 좋았다면.
그래서, 만약 저 둘이 ‘주연’인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 둘이 또 다른 ‘게임’을 벌이지 않는 이상 말이야.’
박진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메가폰을 들었다.
그리고 힘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케이 입니다!”
오케이.
둘 모두, 100점 짜리 배우다.
[ 책 먹는 배우님 – 14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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