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5)
15.
송문교와 감독님이 한 바탕한 그 이후,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처럼, 촬영장은 조용해졌다.
“고사 지낸 덕분 아니에요? 너무 조용한데.”
촬영 기간 내내 사고 없이 무탈하길 바라는 ‘고사’를 지내는데, 요즘 조용한 것이 모두 고사 덕분이 아니냐는 스텝들의 장난스런 농담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고사가 아니라 ‘압박’ 때문이다.
제작사에서인지, 대표님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너 똑바로 해.’
송문교에게 모종의 ‘압박’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베- 재미없어.”
영미 씨가 손에 들고 있는 팝콘을 내려놓을 정도로, 요즘 송문교는 바짝 엎드려 지내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나와 박찬익 팀장의 말이 자극이 된 것인지 촬영장에서 대본을 놓지 않는다.
“문교 요즘 열심히 하네. 제발! 이대로만 끝났으면 좋겠다.”
재익이 형이 조용한 촬영장을 사수하고 싶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니시리즈 3개월의 레이스는 길지만, 아직까지는 평화롭다.
오늘은, 상암동 NK스퀘어에서 [청춘 열차>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감독님을 포함하여, 송문교, 소윤, 김균오, 나, 박청아. 주조연급 5인방이 모두 참석한 이번 제작발표회.
간단한 기자회견 정도만 있을 것이라는 재익이 형의 말과는 달리.
“선배님들! 여기 포스터에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엑, 이거 전부요?”
“네. 시청자 50명을 뽑아서, 배우들 사인 포스터 보내줄 거거든요. 여기 팜플렛도 같이.”
생각보다 일이 많다.
메이크업이 끝나고 상암동에 들어서자마자 포스터 50장, 팜플렛 50장에 사인을 시작했다.
“으으, 너무 많은데.”
“손목 아퍼. 힝…”
투정을 부리는 김균오와 소윤에 비해, 나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내 포스터, 내 사인.
처음 해보는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즐거울 뿐이다. 사인 작업이 끝나자마자, 커피 한 잔을 채 마실 시간도 없이 SBC 간판 연예뉴스 프로그램인 [스타 인사이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안녕하세요! [스타 인사이드> 리포터! 박솔 입니다! 오늘은 SBC 월화드라마 [톨게이트>의 후속작이죠? 뜨거운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청춘열차>의 배우 5인방을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예인 리포터의 진행에 [청춘열차> 배우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지고, 캐릭터 소개와 함께 드라마 소개도 마쳤다.
“원래 이렇게 정신없어요?”
“흐흐, 처음이라 그래. 하다보면 금방 적응 해. 근데 처음하는 것 치고는 인터뷰 잘 하던데?”
“그냥 캐릭터 소개하는 건데요 뭘.”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야. 예능도 잘하려나?”
뭐, 대본이 통째로 내게 있으니 그쯤이야.
어쨌든, 첫 방송 보다 [스타 인사이드>를 통해 지상파 방송에 데뷔하게 되었다.
“제작발표회 시작하겠습니다!”
제작발표회는 넓은 프레스 홀에서 CP님과 제작사 파랑새미디어의 대표님, 그리고 감독님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기자들의 타자 두드리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흐를 때는 그다지 긴장되지 않았는데.
배우들의 입장 순서가 되었을 때는 연신 터져 나오는 플레쉬 세례에 눈을 잠시 찌푸릴 정도로 놀랐다.
…. 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잘 빠진 옷을 입고,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마네킹 인형이지만- 이런 내 모습을 모두가 카메라에 담으려고 아우성이고,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 손을 드는.
이제껏 내가 살아오던 삶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
그리고 준비된 티저 영상과, 메인 예고편 영상이 기자들에게 처음 공개가 되었을 때는.
이 세계의 중심에 나 혼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어?”
아니, 이런 착각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늘 기자들에게 처음 공개된 ‘메인 예고편’에서 내 얼굴이 유독 많이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테니까.
“도재희라고 했나? 저 친구 연기 괜찮은데? 비중도 커 보이고.”
분위기가 좋다.
“색감 괜찮은데. 약간 만화 톤처럼 청춘만화 느낌이 나지 않아?”
“충분히 흥미로운데요? 재밌어 보여요. 문병철 감독, 이번 시청률 기대해볼만 하지 않아요?”
“올 하반기 마지막 미니가 방송 삼사 모두 로맨스야. 제대로 정면승부 하겠는데.”
기자들의 표정도 좋았고, 질문의 질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재밌는 점은 바로, 질문인데.
L&K 측 기자들이 다수가 포진되어 있어 그런지, 흘러나오는 질문 자체가 송문교, 혹은 내 위주였다.
“질문 있습니다! 도재희 배우의 오디션 하나로 대본이 크게 수정되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오디션 현장이 어땠나요?”
“도재희 배우님! 이번 작품이 미니시리즈 데뷔작이신데, 임하는 각오 한 번 듣고 싶은 데요!”
“현장에서 재미난 에피소드는 없었습니까?”
언론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배치된 기자들을 이용해 ‘스토리’의 방향만 슬쩍 바꾼다.
실시간으로 인터넷에는 [청춘 열차> 제작발표회 관련 기사가 퍼지기 시작했다.
[월화 [청춘열차> 첫 방송 날짜 확정! 12월 18일 밤 10시] [[청춘열차> 티저에 이어 메인 예고편 공개!] [청춘들의 아픔을 아련하게 어루만질 [청춘열차> 시청자 반응은?] [무서운 신인! 대본 메이커 [청춘열차> ‘도재희’는 누구?]‘내’ 기사다.
*
꿀 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오늘, 그리고 내일. 이틀간 휴식이다.
이불만 있다면 그대로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지만.
“재희 오빠, 배우들 끼리 한 번 뭉치고 싶은데 어때요?”
제작발표회가 끝나자, 소윤이 내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저희끼리요? 감독님은요?”
“감독님은 작가님 만나서 대본 쓰셔야 한다고 못 가신다는데요?”
내가 재익이 형을 바라보자, 재익이 형이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촬영 없으니까 상관없지. 대신, 적당히 알지?”
“들으셨죠?”
내가 소윤에게 고갯짓 하자 소윤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으쌰! 술이다!”
피곤한 밤샘 촬영이 요 며칠 사이 강행군처럼 이어졌다.
나보다 씬도 많고 촬영 일수도 많았던 소윤은 피곤할 법도 하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으흥흥. 소주가 좋아요? 맥주가 좋아요? 아니면 둘 다?”
아이돌이라 그런지, 고된 스케줄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이돌인데 괜찮은가?
“소윤 씨는 괜찮아요?”
“응? 뭐가요?”
“아이돌이잖아요.”
“에이, 저희가 데뷔 몇 년 차인데요. 멤버들 중에 연애하는 멤버도 많아요.”
아아, 에프터 픽시가 아홉 명이라고 했던가. 연애하는 멤버도 있을 법 하지.
근데 굳이 그런 것 까지 말해주는 이유는 뭐야.
“그럼 조금 있다 봬요.”
아직 날이 조금 이르기 때문에, 각자 조금 쉬었다가 신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소윤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으음 오빠. 근데요.”
“네?”
“문교 선배님께는… 아직 말씀 못 드렸는데..”
제 아무리 쾌활한 소윤이지만, 송문교와는 회식 때도, 리딩 때도 촬영 때도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봤다고 했다.
송문교가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워낙 독불장군처럼 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저 보다는 소윤 씨가 물어보는 게 효과적일 텐데요?”
내 말에 소윤이 진저리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 완전 차가우셔서 사적인 얘기는 한 마디도 못 붙여 봤어요. 오빠가 물어봐주시면 안돼요?”
내가 잠시 망설이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균오가 끼어들며 말했다.
“어 문교 선배님이다. 선배님!”
평소에 남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스타일인, 십대들의 라이징 스타. 탑 모델 김균오.
“문교 선배님. 배우들 끼리 한잔 하려고 하는데, 선배님도 가실 거죠?”
“아니.”
“… 아, 안 가신다는데요?”
송문교의 단호박 거절에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있다는 격언을 몸소 실현하신다.
“저희 끼리 가야겠네요.”
쟤도 참 독특하다.
*
나는 태워주겠다는 재익이 형의 말을 한사코 거부하며, 집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혼자 지하철에 올랐다.
[신사동 이자카야 ‘요코센’ 매니저 동반 금지! 순수하게 우리들만!]매니저 동반 금지라는 대목에서 오늘 술자리가 단순한 ‘친목 도모’가 목적이 아님을 눈치 챘다.
주연급 배우라인 중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 송문교 사이에 모종의 트러블이 있음을 확인한 소윤, 김균오, 박청아는 내게 ‘대화’를 제안한 것이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그동안 얘들 엄청 불편했겠구나.
일반적인 술집을 상상했던 나는, 요코센에 들어서자마자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포장마차에 어묵탕이 편한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이다.
어두운 조명에 중간 중간 일본식 전등갓이 달려있었고 전체적으로 디귿자 모양에 중앙에는 분수대도 설치되어있다. 대충 둘러보니 전부 룸(Room)형식으로 구성된 프라이빗한 술집이었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매니저가 내게 다가왔다.
“예약하셨나요?”
“아, 그게 일행이 있어요.”
“성함 좀 알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이요?”
“네”
“… 도재희입니다.”
“아,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매니저를 따라 들어가면서 나를 제외한 이들이 유명 아이돌, 혹은 스타 모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촌놈 티를 너무 팍팍 내나.
“아! 오빠! 오셨어요?”
“찾기는 어렵지 않던데요? 그런데 처음에 술집 아닌 줄 알았어요.”
“흐흐, 여기 분위기가 조금 다르죠? 일단 앉으세요.”
소윤도, 김균오도, 박청아도.
촬영장에서 보던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제작발표회 직후라 메이크업이야 기본이었지만, 이 나이 대에 어울리는 수수한 옷차림은 처음이다.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윤은 두꺼운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김균오도 의상에 전혀 힘을 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박청아는 흰색 와이셔츠에 스키니 진을 입었는데, 이런 자리는 어색하다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나와 비슷한데.
소윤이 웃으며 말했다.
“헤헤, 사실 배우들 끼리 자리를 한 번 만들고 싶었어요. 촬영 끝나고 다들 피곤해서 쉬기 바빴으니까….”
“좋죠. 기왕 배우들 모이는 거, 선생님들도 불렀으면 좋았을 텐데.”
내 말에 소윤이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아, 그게… 선생님들도 모시고 싶은데 사실…”
나는 소윤이 왜 선생님들을 부르는 것을 주저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저랑 문교 때문에요?”
시작부터 돌직구를 날리자 소윤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게…”
송문교는 주연으로서 중심을 잡고 배우라인을 이끌고 가야하는 위치다. 하지만 감독과의 트러블, 그리고 나와의 문제 때문에 기가 많이 죽어있는 상태라, 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현장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하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송문교 일지도 모른다. 케케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오로지 작품을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합쳐야 하니까.
하지만.
“그 동안 많이 불편했죠, 촬영장?”
“그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멤버들끼리도 매일 싸우니까… 그래도… 화해하려고 노력은 하거든요.”
나는 신사역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이 자리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은 하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한 쪽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문교가… 원래 좀 그래요.”
“예?”
송문교와 내 사이가 개선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버리자.
“조금 아이 같은 면이 있어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죠. 아마 제가 오디션에 붙을 줄 몰랐나 봐요. 문교가, 저를 좀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너무 영악해서도 안 된다.
“아, 없는 사람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는 않은데. 문교가 왔어야 하는데, 그죠?”
“아, 그러니까요.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최대한 자연스럽고, 은근하게.
“제가 잘 맞춰볼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일단, 주문 할까요?”
비겁한가?
아니, 전혀.
[ 책 먹는 배우님 – 1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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