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59)
159.
올해의 왕을 가리는 연예계 시상식이 열리기 전, 한발 빠르게 만난 우리들의 미리 보는 시상식.
이야기의 화두는 하나.
누가 올해의 왕이 될 것인가.
“재희가 3년 연속 받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던데?”
“3년 연속이니까 정말로 현실성이 없습니다. 설강식 선배님이 받으시겠죠.”
“아냐. 나는 확실히 아냐. 승희가 받으면 모를까. 가장 임팩트 있었던 장면은 그 장면이잖아. 승희가 시간을 멈추는 장면.”
설강식 선배님은 조승희가 받을 것이라 예측했고, 조승희는 내 이름을, 나는 설강식 선배를 들먹였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
클럽 음악이 흘러나오고 가식적인 미소와 형식적인 칭찬들이 오가는 가면무도회.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지만.
존중하는 만큼, 이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 우위에 서고 싶어 한다.
정말 친한 친구라도, 그 친구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
프로 배우들이지만, 카메라가 없는 지금.
그런 본심을 숨길 수는 없다.
‘진짜’ 연기에 엄격한 만큼, 누구보다 ‘가짜’를 잘 알아보는 사람들이니까.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에요. 올해는 기대도 안 한다니까요. 송충이는 풀잎을 먹고 살아야죠.”
“천하의 조승희가 송충이라고? 아이고, 늙으면 죽으라는 건가.”
“그럴 리가요. 선배님, 재희 입국 영상 보셨어요? 저는 무슨 [스틸 맨>의 로버트 다우닝거가 입국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재희에 비하면 저는 송충이죠. 올해는 욕심 안 부립니다.”
스스로를 송충이라고 칭했지만,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것 역시,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아티스트들이니까.
그냥, 그런 ‘척’ 하는 거지.
“에이, 재미없다. 야야, 얘들아. 이제 그만하자.”
이런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설강식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
이 말뜻에는 가식적인 가면무도회를 끝내자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솔직히 말하자고.”
“솔직히? 뭘요?”
“됐고. 우리, 약속 하나 하자.”
“무슨 약속이요?”
“남우주연상. 그거 누가 받건, 진심으로 축하해주자고.”
“그야 당연히…”
“아니. 승희야. 정말로 솔직하게.”
“….”
“솔직히 말해서 여기 모두가 받고 싶을 거 아냐? 속으로는 본인이 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지 않니? 내가 틀렸어?”
설강식 선배의 돌직구에 조승희가 움찔했다. 잠시 갈등하는 듯 보이던 조승희가 포기했다는 듯, 이윽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고, 선배님도 참. 속을 그냥 꿰뚫어 보시네. 돗자리 펴셔도 되겠어요.”
동의의 표시였다.
“재희, 너는?”
설강식 선배님의 시선이 내게 향했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받고 싶어요.”
“나도 그렇거든. 후배들 볼 면목은 있어야지. 안 그러냐?”
가면무도회 도중, 참가자들 모두가 가면을 벗었다.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
모두가 일그러진 욕망을 뒤집어쓴 놀부의 얼굴일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의외로 모두 홀가분해 보인다.
조승희가 말했다.
“설 선배님 말씀대로, 올해는 제가 받고 싶어요. 하도 속으로 끙끙 거리면서 앓았더니, 위가 아플 지경이야. 재희야, 3년은 너무 오래 해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니?”
“끌끌! 맞아, 맞아. 맛있는 음식일수록 나눠 먹는 법이라고. 2년 먹었으면, 이제는 선배한테도 양보 좀 해야지.”
‘솔직함’을 무기로 만든 인간적인 얼굴.
이편이 훨씬 보기에 좋아 보인다.
“이제야 술맛이 좀 시원하네.”
설강식 선배의 말뜻.
차라리, 오늘 시원하게 욕심을 말하고.
결과에 꽁해있지 말자. 서로 아끼는 만큼, 진심으로 축하해주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편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저도 제가 받았으면 좋겠는데요.”
물론, 승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지.
*
한국에서 11월을 보내었다.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는 예상대로 한반도를 집어삼켰다.영화는 11월을 장식하는 대표 영화가 되었고,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열흘간 사수하는 기염을 토했다.
천만 관객을 넘기며 제임스 카메앙 감독의 [아메바>에 이어 역대 해외 영화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
12월 연말이 되었고.
나는 [쓰나미 인 캘리포니아>가 흥행 파도에 안착하고 난 뒤, 예능도 라디오도 광고도 모두 거절한 채 집에서 가족과의 휴식에만 전념했다.
촬영이 없는 공백기에 가졌던 휴식 중, 가장 긴 휴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12월.
무사히 [알카트라즈>를 미국에서 개봉시키고, 시상식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지난달, 영화 [알카트라즈>는 막바지 편집에 들어갔고, 드디어 개봉 날짜가 잡혔다.
12월 17일.
정말 다이나믹할 정도다.
일주일 이상 상영관에 걸려야지만 아카데미 후보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
박진우 연출은 어떻게 해서든 올해에 영화를 개봉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고, 불과 넉 달 만에 후반 작업을 끝내며 올해가 끝나기 열흘 전에 개봉 날짜를 확정 지은 것이다.
박진우 연출은 하이마운트 픽쳐스 사무실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고된 작업의 흔적과 자신만만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국은 어떠셨습니까?”
“여전하던데요. 좋았습니다.”
“여전히 뜨거웠겠군요. 기사 봤습니다. 대형 팬미팅과 공항에 몰려든 인파들까지.”
박진우 연출은 알 것 같다는 듯 희미하게 웃고는 내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도 배우님.”
“네?”
“제가 처음 [양치기 청년>을 준비하면서, 도 배우님과 만났을 때 드렸던 말씀, 기억나십니까?”
우리 둘 다 신인이던 시절이다.
박진우 연출과의 대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역시, SAFA 사무실에서 말했던.
“제 등에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말씀이요?”
“네.”
꼭 성공해 보이겠다며, 호언장담하고는 시원시원하게 웃던 박진우 연출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불과 4-5년 전 일이다.
“물론입니다. 제가 슈트를 사야겠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 덕분에 실제로 슈트를 샀고.”
나는 정말로 날개를 달았고, 그 영화를 통해 단기간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내게는 정말이지- 보석 같은 감독이다.
범람하는 시나리오 속에서, ‘진짜’를 찾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이런 박진우 연출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도 도 배우님께 약속 하나를 더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약속.
4-5년 전.
신인 감독의 패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비슷한 느낌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약속이요?”
“편집하면서 느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도 배우님은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겁니다. 확신합니다.”
… 이것 봐라.
시원시원하게 나를 사로잡던, 그 패기 가득한 어투.
“더 높은 곳이라.”
박진우 연출은 진지한 투로 말했지만, 나는 조금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오스카에서 남우주연상이라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이런 내 장난스런 투에 박진우 연출이 강하게 응수했다.
“네. 이런 신들린 연기를 하는 배우가 받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할리우드 스스로가 안목이 낮다고 인정하는 꼴이지요.”
“흐음,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아뇨. 만약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하신다면, 저 할리우드를 떠나겠습니다.”
“… 네?”
박진우 연출이 진지한 투로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게 무슨…
내가 놀란 토끼 마냥 두 눈을 치켜뜨자, 박진우 연출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농담입니다.”
“….”
아, 그러세요.
아무리 내가 농담 한번 했다기로 서니.
그대로 받아치시다니.
쳇.
“하지만, 정말입니다. 정말 도 배우님의 매력을 100% 보여준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분명, 더 유명해지실 겁니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의 말은 ‘반쯤’은 진담이었다.
“그리고 정말 농담은 아니었던 것이. 이제는 조금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영화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상영이 끝나면, 1년 정도는 쉬려고 합니다.”
“아.”
“이번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시나리오도 쳐다보기 싫어졌습니다.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도록, 충전해야죠.”
휴식.
내가 쉼 없이 달려왔듯, 박진우 연출 역시 휴식기 없이 빠르게 달려왔다.
이례적일 정도로.
그는 철인이 아니기에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이 정말 휴식을 원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오스카가 끝나고 내년 4월에 결혼합니다.”
“… 네?”
“민희랑요. 이젠 해야죠.”
그가, 아주 환하게 웃었다.
*
박진우 연출이 언제나 앞에서 자신의 영화를 꾸려왔다면.
김민희 제작 PD는, SAFA에서 제작했던 [양치기 청년>부터 박진우 연출 뒤에서 내실을 다져온 여자다.
벌써 몇 년간 함께 작업해왔고, 나와도 너무나 절친한 5월의 신부.
둘의 결혼 소식이 놀랄 일은 아니다.
어느 정도 예상해왔던 일이고, 나 역시 기분 좋게 축하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결혼을 축하해주듯.
영화 [알카트라즈>가 미국에 개봉했다.
물론, 결혼과 영화는 전혀 무관한 장르지만 나와 박진우, 그리고 김민희 세 사람이 호주의 작은 리틀 아일랜드에서 약속하던 때처럼.
이 영화는, 맹렬한 기세로 할리우드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리벤지 아메리카>와 [알카트라즈>. 올해의 마지막 라이벌 매치 시작] [레오와 도재희. 올해 내내 계속되었던 둘의 라이벌 매치. 드디어 시작되다.] [12월, 독주를 예상했던 [리벤지 아메리카>. [알카트라즈> 개봉으로 잠시 주춤.] [12월 3주 차 박스오피스 1위는, 영화 [리벤지 아메리카>. 그 뒤를 바짝 따라붙는 [알카트라즈>.]12월의 마지막 주 박스오피스 2위를 시작으로 미국 영화판의 지각변동을 예고했고.
그리고 대망의 연말 마지막 주.
[12월 마지막 주 박스오피스 1위! [알카트라즈>] [제91회 오스카의 향방을 가를 마지막 판도. 영화 [알카트라즈>가 써낸 믿기 힘든 이야기.]박스오피스 1위를 동양인들이 가져감으로써, 영화계의 큰 파란을 일으켰다.
[미국에 1위라는 깃발을 꽂은 ‘할리우드 기대주’들.] [도재희, 박진우 두 명의 한국인들이 써낸 기적 같은 동화.]할리우드에서 쉽게 보기 힘든 별종 두 명이 단숨에 할리우드가 품어낸 따스한 ‘기대주’가 되었고.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동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물론, 이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는 ‘실현’ 되었을 때 그 힘을 갖는다.
말만 이렇게 떠들고, 말만 기대감을 품었지만.
작년의 오스카에서는 수상하지 못했다.
아시아 속의 백인, 이라는 ‘이란’에게 외국어영화상 수상을 빼앗겼으니까.
물론, 올해는 달라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그리고 나는, 이 첫 매듭을 제대로 묶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제58회 대종상 영화제 주인공은 과연 누구?] [도재희, 설강식, 조승희. 엎치락뒤치락 하나의 상을 위해 싸우는 동료들]광화문.
세종문화예술센터.
올 연말.
대종상 시상식이 열리는 곳.
레드카펫을 목전에 두고 남다른 기대감을 품고, 리무진 문을 나섰다.
내 옆에는 [당신의 추억을 삽니다>의 조승희와 설강식이 함께 섰다.
“가시죠.”
이제는 정상에 오를 일만 남았다.
[ 책 먹는 배우님 – 15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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