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6)
16.
술이 제법 얼큰하게 들어갔다.
중탕해서 먹는 사케에 요즘 흠뻑 빠져있다는 소윤에 반해, 뜨거운 술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나와 박청아는 시원한 소맥.
김균오는 맥주만 마셨다.
하지만 김균오가 제일 먼저 취해버렸다.
“끅, 제가 술을 못 마시지는 않는데….”
혀가 한참 꼬부라져서는 테이블에 머리를 쳐 박고 주절거렸다.
“오늘 왜 이러지이…”
“적당히 먹어요. 컨디션 조절 해야지.”
“으어, 재희 선배. 아아니, 형.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죠오. 아! 형은 좋겠다. 군대도 다녀오시고… 전, 흐룹! 군대 생각만 하면 눈앞이 깜깜해져요.”
언제는 남자답게 ‘고문관’으로 당당히 다녀오겠다더니.
내가 이들과 술 한잔 나누며 느낀 점은, 탑 모델이든 유명 아이돌이든 결국,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남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재밌는 공통점을 찾기는 했지만, 또래들과 유별나게 다를 것도 없는 이십 대.
“소윤 씨는 회사에서 연기하라고 추천했다고 했나요?”
“아뇨, 제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원래 관심 있었어요?”
“조금? 그 보다는 회사에서 위치가 좀 애매하잖아요.”
소윤은 그룹 에프터 픽시에서 메인 보컬도, 얼굴 마담도, 그렇다고 예능 담당도 아니라고 했다.
“뭐라도 해야죠.”
연기는 살아남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인 셈이다.
요즘 그런 아이돌이 많지만, 소윤은 연기를 곧 잘한다.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균오 씨는 어때요? 아, 술 잔은 내려놓고.”
“흐룹! 저는 회사에서 마스크가 아깝다고… 먼저 시키긴 했는데… 저 완전 발 연기죠?”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김균오가 상처받은 강아지마냥 입술을 떨었다.
“저도 알아요. 저 완전 발 연기 인거… 감독님이 제 대사를 앞으로 줄이겠다고 하셨어요. 가만히 있는 게 제일 멋있다고.”
감독님이 생각 잘하셨는 걸.
내 생각에도, 김균오는 입 열기 전이 제일 멋있다.
제발 런 웨이 사진 속에서만 남아줘.
“저 연기 계속 할 수 있을까요.”
“음, 하다 보면 늘지 않을까요?”
“저 벌써 두 작품도 넘게 했거든요. 아무래도 재능이 없나 봐요오오…. 아! 재희 형! 저 연기 좀 가르쳐주시면 안돼요?”
“에이, 제가 무슨….”
결정적으로 이 자리가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청춘열차> 스텝들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고 있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원롤, 원오케이.
NG 없는 대사 암기의 신.
내 촬영 분량만 찍으면, 촬영이 빨리 끝난다는 스텝들에게 파다하게 퍼진 달콤한 소문.
촬영 감독님은 카메라 받는 스킬만 조금 익히면 완벽하다고 치켜세웠고, 연출 감독님은 카메라는 우리가 맞출 테니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하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내 쪽으로 흐른다.
“형 현장에서 보면 가끔 부러워 죽겠어요. 연기를 어쩜 그렇게 잘 하세요.”
김균오는 숙취 해소제를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크으- 머리야. 근데 형, 진짜 대본 통째로 다 외우세요?”
“누가 그래요?”
“스텝들이 그러던데요. 상대방 대사 까지 다 외운다고.”
내가 대답 없이 알 듯 말 듯 미소만 짓자, 소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거 저도 들었거든요. 근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그리고는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 테이블에 턱을 괴며 말했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해서요. 제가 너무 신기해서… 영미 씨? 오빠 스타일리스트한테 물어봤거든요. 근데, 영미 씨가 그러더라고요. 오빠 차에서 대본 보는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
영미 씨. 은근히 입이 가벼운 스타일이구나.
김균오가 화들짝 놀랐다.
“에? 정말? 어, 어? 그러고 보니 재희 형… 대본 들고 있는 거 한 번도 본적 없네? 이유가 뭐죠?”
김균오가 박청아를 향해 물었다.
“두 분 현장에서 자주 만나잖아요. 청아 누나는 본 적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못 본것 같은데….”
매일 같이 마주치는 박청아의 확답에 소윤이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딱!
“거 봐! 뭐가 이상하잖아. 차에서도 대본을 안 보면, 도대체 언제 대사를 외운다는 거죠? 역시, 수상해.”
그러더니 양 볼을 큼지막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재희 오빠. 뭔가 숨기는 게 있어요.”
“… 뭘요?”
침을 꿀꺽 삼켰다.
소윤은 자신이 코난이라도 되는 듯,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진다.
“뭔가 있는데….”
그렇게 잠시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눈을 번쩍! 뜨며 푼수같이 소리쳤다.
“재희 오빠 머리 엄청 좋죠!”
“…..”
“대본을 한 번만 봐도 바로 외워버리는 거지!”
소윤의 추측에 김균오의 머리 위에서 전구가 솟아났다.
“오오오 맞네! 맞아! 형 알고 보면 학력 막, 서울대 아니에요? 잘 생기고 머리도 좋은, 엄친아! 막 이런 거?”
“그치, 그치? 약간 사기 캐릭터 느낌 좀 있지?”
“오오올 소윤! 추리 좋은데? 재희 형. 아이큐 몇 이에요?”
“아, 아이큐?”
…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다.
너무 날카로운 질문이라, 질문에 베이겠는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모르겠다. 이 자식들 대체 정체가 뭐지?
“푸흐흡.”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곁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박청아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큐래, 큭큭.”
여하튼, 앞으로는 조심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대본을 두 권씩 받아서, 하나는 흡수하고 하나는 보여주기 식으로 현장에 들고 다니는 정도만.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잖아.
*
그날 이후.
연이어 촬영이 이어졌다.
첫 방송 직전에 4회까지 촬영을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는 감독님의 선언 아래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렇게, 단 하루의 휴일도 없는 타이트한 일정이 지나고.
드디어, 12월 18일 월요일 밤 10시.
저녁 8시까지 모든 촬영을 접고 고깃집 1층 전체를 대관하여 모든 배우와 스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체 회식 겸, 모두가 고생해서 찍은 1회 첫 방송을 함께 모니터하자는 취지에서다.
“자! 그 동안 고생 많았어요. 오늘 간단하게 한잔 하고, 마음껏 먹읍시다.”
“감독님! 그럼 내일 촬영은 없는 건가요?”
“응? 안되지, 그건 안돼. 촬영은 해야지. 으흐흐.”
“에이, 그럼 술은 못 마시잖아요. 힝!”
헤드급 스텝들과 주조연 배우들이 모두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었다.
“재희 씨. 이번 작품이 데뷔작이나 다름없는데, 집에서 뭐라고 해요? 좋아하시죠?”
“그럼요. 엄청 극성이시죠. 아마 지금쯤, 친구 분들 전부 TV 앞에 앉혀놓으셨을 걸요. SBC 채널 고정. 신신당부 하시면서.”
“으흐흐. 우리 드라마 시청률 잘나오면, 재희 씨 어머님이 숨은 1등 공신이시네.”
분위기가 왁자하게 무르익었다.
“오 시작한다!”
소윤의 외침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TV로 집중되었다.
[청춘열차> 시그널 음악이 나오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달콤한 첼로선율에 낭랑한 피아노가 가미된 재즈가 흘러나오고 이내, 송문교와 소윤의 얼굴이 화면을 꽉 채웠다.
“저게 누구야!”
연출부가 장난스레 환호하자 소윤이 얼굴을 붉혔다.
“아, 왜요오! 똑같이 생겼는데에”
아니야. 내가 봐도 화면이 너무 잘나왔는데?
송문교는 익숙한 듯 무덤덤한 얼굴로 TV를 주시했고, 김균오는 자기가 나오는 화면이 부끄러운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중얼거렸다.
“으아, 못 보겠네…”
다음은 나와 박청아의 차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TV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쓱한 기분을 감출 수 없지만 입 꼬리는 올라간 뒤로 도통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이야! 도 배우!”
재익이 형이 내 옆자리로 비집고 들어와 맥주잔을 건넨다.
“정식 데뷔 축하한다?”
“고마워요 형.”
나는 기꺼이 잔을 받아들어 시원하게 맥주를 넘겼다.
“헤헤…”
박청아도 기분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으며 얼굴을 붉힌다.
– 1회.
감독 문병철. 극본 김혜숙.
드라마가 시작되자, 모두 프로라도 되는 듯 작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FD는 옥에티는 없는지 주시하고, 스타일리스트는 피부톤을 확인하고, 의상팀은 소매가 뒤집어진 사람은 없는지. 등등.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이 이어졌다.
나 역시 숨죽이고 드라마에 온전히 집중했다.
TV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내 연기, 내 호흡, 내 작품.
“….”
60분이 지나고, 2회 예고가 흘러나올 때. 나는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 재밌다!”
단순히 내가 나와서, 같은 시시콜콜한 감정이 아니다.
대본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해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배우들의 연기는 장점은 부각하고 단점은 편집으로 가렸으며, 매끄럽게 들어가는 통통 튀는 CG로 감독의 센스를 엿볼 수 있었다.
“이야! 찍을 때는 몰랐는데. 우리 드라마가 이렇게 재밌었나? 감독님. 편집하느라 고생 좀 하셨겠는데요?”
촬영 감독님의 호들갑에 스텝들이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았죠?”
“편집 너무 잘됐는데요? 균오 씨. 연기 잘하네? 응?”
“으아… 감독님 덕분이시죠.”
“큭큭큭큭”
“감독님. 실시간 반응도 괜찮은데요? 시청률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요”
시청률이 집계 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실시간 검색어나, 댓글의 실시간 반응만으로도 대략적인 유추가 가능하다고 한다.
제작 PD의 말에 따르면.
“뚜껑 열려봐야 알겠는데, MKC 쪽 반응이 생각보다 별로네요? 시청률 2위도 노려볼만하겠어요.”
2위도 노려볼 수 있겠다는 예상.
그리고 시청자들 반응에 참고하여 시시각각 기사들도 쏟아져 나왔다.
[불붙은 시청률 전쟁! 새로운 월화드라마 왕좌는 누구?] [[청춘열차> 소윤X송문교 케미 돋보일까?] [[청춘열차> 인생 드라마로 불릴까? 감동+코미디 사냥!] [[청춘열차>송문교, 도재희. 1화 엔딩 불꽃 튀는 연기 배틀! 승자는 누구?] [에프터 픽시 소윤, 도재희 김균오와 함께 다정한 촬영장 셀카 공개! ‘훈훈하다’ 일각에서는 ‘송문교는?’]트위터나 기사 댓글들도 호평일색이다.
‘생각보다 재밌어서 계속 봤다.’ ‘몰입감이 좋다.’ ‘옛날 생각난다.’ 등등.
실시간 반응을 확인한 문병철 감독님이 흐뭇한 미소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빈 잔에 맥주를 가득 따르며 소리치셨다.
“자, 한 잔 합시다!”
그리고 다음 날.
제작 PD가 예상했던 시청률 2위.
그 뚜껑이 열렸다.
[ 책 먹는 배우님 – 1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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