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7)
17.
결론을 말하자면, 분전했지만 시청률은 방송 삼사 중 꼴찌다.
방송 삼사 중에서 첫 방송을 2주일 먼저 시작한 KTN의 월화 미니시리즈 [랜선 사랑>의 시청률은 9.2%.
동시간대 시청률 1위다.
“얘 네는 원래 방영하던 작품이니까 그 점 반영해야지. 다음 주면 좀 더 떨어질거야.”
기존의 SBC와 MKC에서 방영하던 미니시리즈가 동시에 종영하며 일부 시청자들이 KTN [랜선 사랑>으로 몰렸다는 의미다. 박찬익 팀장 말로는 다음 주면, 거품이 더 빠질 것이란 추측.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는 결국, 신작 둘 중 하나야.”
MKC 신작인 [러브 어썸>은 유부녀가 되어서도 절정의 미모를 과시하는 탑 스타 황지애가 캐스팅되며 화제가 된 드라마다. 하지만 시청률은 8.7%. 황지애라는 거물급 캐스팅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성적이다.
SBC의 [청춘 열차> 시청률은 5.4%.
10%를 넘긴 드라마가 없는 가운데,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뭐, 어쨌든. 시청자들 평가는 좋으니까 반등의 여지는 있는 셈이지.”
아직은 꼴찌지만, 황지애의 드라마가 예상보다 재미가 없어 시청률이 더 떨어질 것이고, [청춘열차>에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으니 2위 싸움도 가능하다는 예측이다.
하지만 이 성적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송문교가 인상을 찌푸렸다.
“반등의 여지는 무슨… 감독이 개판인데. 될 것도 안돼지.”
아, 그러세요.
내가 보기에 시청률 갉아먹는 제일 큰 요인은, 팀워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송문교지만. 낯짝이 두꺼운 건지, 뭐라 할 말이 없다.
박찬익 팀장이 허를 차며 말했다.
“너희는 시청률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런 건 제작진들이나 신경 쓰는 거야. 너희가 너무 여기에 신경 쓰면, 오히려 연기에 방해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문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 간다.”
그리고는 마치, 뭐 마려운 똥강아지 같은 얼굴로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찬익 팀장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문교, 바짝 긴장 했나본데.”
[월화드라마 시청률 전쟁! 황지애 VS 송문교]이런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나오는 마당에 부담이 될 수 밖에.
박찬익 팀장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내게 물었다.
“너는 왜 이러고 있냐? 촬영 안 가?”
내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아, 저 오늘 촬영 없어요.”
“응?”
오늘은 내 촬영 스케줄이 없다. 모처럼의 휴일이다.
“그럼 집에서 쉬지, 사무실은 왜 나왔어?”
박찬익 팀장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지만, 나는 뻔뻔한 얼굴로 뒤편에 쌓여있는 대본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본 좀 보려고요.”
쉬어서 뭐 하겠는가.
1년이라는 목표를 잡았으니, 지금은 더욱 빠르게 노를 저어야 할 때다.
“안 피곤해?”
“견딜 만해요.”
“너도 참, 독하다.”
박찬익 팀장은 ‘이런 놈 처음 봤다’는 눈빛으로 피식, 웃고는 장난스럽게 넘겨버렸다.
탁.
나는 일전에 박찬익 팀장이 내게 주었던 시나리오 세 권을 박찬익 팀장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면목동 예술가들>[여인의 외침>[버스 드라이버>일전에 박찬익 팀장이 읽으라고 주었던 대본들.
박찬익 팀장은 ‘이게 뭐냐?’ 라는 눈빛으로 시나리오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생각난 듯 반색하며 물었다.
“아, 이거 전부… 읽어 봤어?”
“네.”
“어때?”
“그다지…”
내가 입술을 내밀며 대답을 흐리자, 박찬익 팀장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응? 그럴 리가. 제대로 읽어본 거 맞아?”
그러더니 [여인의 외침>을 펼쳐들고는 말했다.
“여기, ‘풍효’ 캐릭터. 딱 넌데.”
[여인의 외침> 58점. 대본 세권 중 제일 별로다.“비중은 크긴 한데, 인물이 너무 찌질해요. 로맨스에 멜로가 섞였다는 코드 자체도 마이너한데다, 끝에 억지로 쥐어짜내는 감동도 그렇고… 그다지 매력은 없는데요.”
“음…”
내 솔직한 의견에 박찬익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럼 이건?”
[면목동 예술가들>, [버스 드라이버>.각각 67점, 62점.
“글쎄요.”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웃는 얼굴로 두 작품의 단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시나리오 세 개가 순식간에 양파 껍질 까듯 까이자, 내부 작업에 열중하던 영미 씨와 재익이 형은 흥미로운 얼굴로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고개를 함께 끄덕였다.
“크! 날카로운 비평!”
“올, 오빠 평론간 줄.”
박찬익 팀장이 시나리오 세 권을 책상에 내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흐음, 하긴, 이제 막 뜨기 시작했는데, 아무 작품이나 고를 수는 없지.”
박찬익 팀장은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본 ‘탑’에 쌓여있는 대본들을 한 움큼 집어 들어 책상으로 가져왔다.
“나도 다 읽어 보지는 못했거든? 근데 시놉시스 훑어보고 괜찮은 거 몇 개 체크해 둔 게 있을 거야. 잠시만…”
그리고 대본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는데, 내가 막아섰다.
“팀장님. 그냥 제가 다 읽어보면 안돼요?”
“응? 이거 전부? 오래 걸릴 텐데?”
얼핏 봐도 스무 권 남짓이다.
“내일 촬영인데 좀 쉬어야지.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읽어요.”
십 분 이면 충분하다.
*
아예 사무실 한켠에 자리를 깔고 앉아 대본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펼쳐보지도 않고 ‘점수’만 확인하며 휙휙 대본을 골라냈지만.
“호오, 이거 재밌겠는데?”
어느새 재익이 형이 의자를 붙이고 옆에서 구경을 시작한 터라, 대충 훑어보는 시늉이라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 오래 걸렸는데, 어쨌든 1차적으로 골라낸 작품의 수는 두 작품.
[오서독스>와 [양치기 청년>두 작품 모두 90점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했다.
국내 유명복싱 챔피언의 삶을 바탕으로 쓰인 [오서독스>의 대본 점수는 무려 91점.
맛깔나는 전개에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 내용도 탄탄하다. 복싱 영화라는 소재 자체가 국내에서 큰 재미를 본 경우가 드물지만, WBC 챔피언 방어전, 극일(克日)전 같은 ‘사이다’ 소재라 잘만 찍으면 입소문을 이용한 흥행 가능성도 높은 편.
“아, 이 대본 장난 아닌데.”
하지만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복싱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다. 극중 인물의 키가 160cm 중반인 점을 고려하면, 아예 지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가 탄식하자 재익이 형이 말했다.
“[오서독스>! 재밌긴 하겠네. 근데 재희 네가 이 영화를 하려면 방법은 딱 하나야.”
“오! 뭔데요?”
“다른 배우들 키를 전부 2M로 캐스팅하면 가능해.”
상대적으로 작아보이게 만드는 건가.
너무 기발한 생각이라, 할 말을 잃어버렸는걸.
“흐흐, 농담이야”
이제 남은 90점 이상의 대본은 하나다.
[양치기 청년>시골 동네 양아치들의 삶을 B급 감성에 더해 코믹하게 그려낸 영화.
그런데 대본의 완성도 만큼은 무려 93점이다.
“….”
하지만.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당장 손에서 놔야만 하는 작품임은 분명해 보인다.
취향차이가 확실히 갈릴 만한 내용으로, 매니아 층도 두텁지 않아 상영관이 몇 개나 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이런 마이너한 영화로는 절대 성공하기 힘들 테니까.
“이건 어때?”
재익이 형이 내게 대본 하나를 추천했다.
[피셔>희대의 보험 사기꾼 통칭 ‘피셔’와 이를 쫓는 특수 검사의 대결구도를 가볍고, 긴장감 넘치게 만든 액션 영화.
매해 비슷한 영화가 두 세 작품씩 만들어지는 특별할 것 없는 종류의 오락영화지만, 이 영화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감독, 한만희. 죽이지?”
데뷔작 [우리 누이>로 260만 관객을 동원하더니, 이듬해에 [한산도>로 10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천만감독 대열에 합류한 한만희 감독의 차기작.
“이거야 말로, 네가 잡아야 할 작품 아니냐?”
하지만 한만희 감독이라는 이름값 보다, 내 눈에는 ‘완성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67/100]특별할 것 없는 점수다.
“주연은 좀 힘들겠지만, 우리랑 몇 작품 했던 영화사라 조연 하나 정도는 오디션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주연.
“제가 신인이라서요?”
“그래. 벌써 내정되어있는 배우도 있다고 하더라. 조승희 알지?”
조승희.
아역부터 시작하여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은 국민배우.
“조승희가 내정되어있는데, 신인이 눈에 들어오겠어?”
“그건 그러네요.”
전 국민이 다 아는 유명 배우가 주인공이라.
거기다, 천만 감독의 차기작.
“이런 작품에는 조연으로만 들어가도 훌륭하지. 이런 걸.. ‘버스’ 탄다고 하나? 완전 흥행보증수표잖아.”
대본 점수와는 관계없이, 캐스팅 보드와 연출의 실력만 놓고 봤을 때, 높은 확률로 연타 홈런을 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1000만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배우와 감독 이름만으로 못해도 손익분기점 이상은 먹고 들어갈 만한 흥행 파워가 있으니까.
“근데 이게, 조연 한 자리 구하는 것도 힘들지도 몰라. 워낙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테니까.”
성공하려면 당장, [양치기 청년>을 내려놓고 [피셔>에 집중하여 조연 한 자리라도 얻어내는 것이 맞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작품성 있는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1년 이내에 ‘큰 성공’을 거두는 거니까.
하지만 왜 자꾸 찝찝할까.
아니,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모르는 척 하고 싶을 뿐이다.
[93/100] (+@)완성도, 그리고 그 옆 괄호 안에 표시된, 나와 대본이 만나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
그저 평범한 [피셔>의 점수에 비해, [양치기 청년>은 나와 만나면 얼마나 성장할지 추측할 수조차 없다.
‘뭐해? 안 잡아?’
마치, 꽉! 잡으라고 내게 말하는 것만 같다.
“왜? 그 영화가 끌려?”
재익이 형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이상하죠?”
하필, 독립 영화 대본에 끌리다니.
하지만 재익이 형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SAFA 제작이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물론, ‘주연’으로 들어갔을 경우지만”
SAFA, 서울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과정 워크샵 대본.
즉, ‘엘리트’ 출신 젊은 예비 영화감독들의 저예산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독립영화라도 업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다르다.
SAFA라는 이름 자체가 먹어주는 ‘힘’도 있고, 이들이 끼고 있는 배급사도 대기업이다.
아카데미 출신의 유명 영화감독들도 많고, SAFA에서 제작하는 단, 장편 영화를 통해 데뷔하여 메이저로 발돋움한 배우들도 많다.
즉, 독립영화계의 ‘황금 동아줄’이라는 셈.
“… 아.”
확실히 대본 완성도가 높은 이유가 있었다.
연출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데뷔작을 이 정도 완성도로 써낸다면, 앞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천천히 생각 해. 아직 시간 좀 있을 걸?”
욕심이 생겼다.
[피셔>도, [양치기 청년>도. 모두.나는 두 개의 대본을 들고 고민했다.
무엇을 해야 좋을까. 그 어느것도 확정된 것은 없지만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것 쯤은 잘 알고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팀장님.”
“응?”
나는 대본 두 권을 모두 들어 올리며 말했다.
“둘 다 하면 안돼요?”
“응?”
둘 다.
그냥, 다 해버리면 간단한 일이다.
상업영화의 ‘주연’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오디션을 통해 뽑지 않는다. [피셔> 처럼, 이미 제작단계부터 섭외를 통해 내정되어있는 것이 다반사.
즉, 내가 메이저 영화에서 주연을 하려면, 차근차근 조연을 밟아나가며 인지도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인데.
늦다.
차라리, [피셔>를 통해 메이저 영화에도 발을 걸쳐놓고, 독립영화 [양치기 청년>을 통해 주연으로서 성공을 거둔다면.
어쩌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내 편으로 만들며 단번에 주연급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미니시리즈로 시작 했는데… 굳이 독립영화를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상업영화 조연으로 들어갈 수 있을 작품들 많은데, 왜 굳이?”
“주연이 하고 싶으니까요.”
단순하다.
120분 러닝타임을 온전히 내 힘으로 끌고가는 ‘주연’이 아니라면, 독립영화를 선택하는 의미는 없다.
“기회만 주세요. 반드시 물어올 테니까.”
내 자신만만함이 어떻게 비춰질까.
적어도, 박찬익 팀장의 얼굴이 묘하게 밝은 것으로 보아, 오만하게 보이지는 않은 듯 했다.
그 때, 재익이 형이 잽싸게 영미 씨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영미 씨. 내가 그랬지? 쟤 욕심 엄청 많다니까.”
영미 씨는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요. 세상 착한 얼굴로 작품 욕심 좀 봐.”
“….”
어이, 다 들려요.
[ 책 먹는 배우님 – 1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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