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8)
18.
차창 너머 길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모처럼 오후 일찍 촬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축제차량 안.
때 마침, ‘성탄절 선물’이 내게 도착했다.
“뭐라고요? [피셔>? 오케이! 알았어요.”
재익이 형은 뭐가 그리 급한지, 목에 걸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거칠게 뽑으며 말했다.
“재희야! [피셔> 쪽에서 연락 왔다.”
일전에, 작품 두 개를 다 하고 싶다고 내가 말했을 때. 박찬익 팀장은 그 다음 날 곧바로 마포구의 영화사 사무실을 찾아갔다고 했다. 대답은 오디션 날짜가 확정이 안 된 상태.
요 며칠간 [청춘열차>에 매진하느라 영화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드디어 답변이 온 모양이다.
“뭐래요?”
“비공개 오디션 보게 될 거고, 자유연기 준비해 가면 된다.”
… 오디션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뭔데요?”
“흐흐. 역할은 미정이야.”
역할은 미정. 즉, 오디션을 보고 연기력과 비주얼이 마음에 들면, 현재 시나리오에서 남아있는 적당한 배역에 배치하겠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회사나 배우가 가진 영향력에 따라 분배되는 역할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는데, 내 경우에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찬익이 형이 한만희 감독이랑 관계가 좋아. 이번에도 1대1로 미팅해서 따온 결과니까,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L&K와 영화사의 관계도 좋고, 나 역시 오디션이라면 자신 있었으니까.
“오디션 준비만 잘하면 괜찮은 배역, 딸 수 있어.”
조용히 내 옆 자리에서 듣고만 있던 영미 씨가 휴대폰을 슥-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피셔> 대본 읽어봐야겠네.”
“응? 영미 씨. 대본 아직도 안 읽었어?”
“네. 오빠 들어가는 거 확정 되면 읽으려고 했죠. 지금처럼.”
“응? 저 오디션 봐야하는데요?”
영미 씨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어차피, 붙을 거잖아요.”
아직 오디션도 보지 않았는데.
마치, 내가 붙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도 된 듯한, 반응이다.
“… 그래야죠?”
어쨌든, 느낌이 좋다.
하지만 아직 선물을 반쪽 밖에 받지 못했다.
내가 물었다.
“형. [양치기 청년>은요? 연락 안왔어요?”
내 질문에 재익이 형이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거? 너 프로필 메일로 보내놓긴 했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겠다. 읽은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연락이 없네?”
재익이 형의 말에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물론, [피셔>도 좋은 기회지만 [양치기 청년>을 통해 송문교처럼 주연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음을 인정해야 했다.
“오빠, 주연 진짜 하고 싶었나 보다.”
“티 많이 나요?”
“엄청요.”
… 너무 기대했나.
하긴, 내가 프로필에 쓸 수 있는 경력이라고는 고작 한 줄이다.
– 2017. SBC 월화미니시리즈 [청춘열차> ‘김도훈’ 役
이 한 줄의 경력가지고, 주연을 노리다니.
‘생판 신인’인 내가 독립영화라고 ‘주연’자리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연락 오겠지. [청춘열차> 방송 예고편이라도 봤다면, 네 진가를 알아보게 되어있어. 요즘 핫 하잖아 너.”
“에? 길에서 저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재익이 형이 웃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넌 아직 젊잖아. 마음 느긋하게 먹고 즐겨. 얼마나 좋냐? 이 좋은 크리스마스에 쉬고.”
창 밖은 성탄절을 맞아, 평소보다 조금 들뜬 분위기였다.
“하긴, 복 받았죠 전.”
드라마 촬영장에 크리스마스고, 휴일이고, 명절이고 어디 있겠냐만, 나는 짧은 ‘휴가’를 누리게 되었다.
내 씬을 요 근래 며칠 동안 몰아 찍은 덕분에, 성탄전야인 오늘을 포함하여 27일까지 내 촬영 스케줄이 없다.
체력 분배하라는, 문병철 감독님의 배려 덕분이다.
“도곡동으로 갈 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당으로 갈게요.”
“응? 부모님 집에 가게?”
“네.”
그러자 재익이 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백화점이라도 들릴까?”
“왜요?”
“1, 2회 출연료 들어갔을 거다. 확인해 봐.”
… 아.
내 출연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한 번 더 받은 기분이다.
나는 기꺼이 웃으며 말했다.
“백화점으로 가시죠.”
*
지난 번, 술에 잔뜩 취해 집을 찾은 이후로 집에는 처음 들린다.
– 집에 언제 올 거니?
촬영이 없는 날, 꼭 집에 들르라며 어머니가 두고두고 말씀하셨는데 촬영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을 들리지 못한 나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어서야 집을 찾았다.
뭐, 딱히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은 없지만 집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이상하게 자꾸 입가에 웃음꽃이 핀다.
“저 왔어요.”
아무래도 양 손 가득, 이렇게 선물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거실 TV에서는 아이돌들의 노래자랑이 한창이었고, 난데없이 들이닥친 아들의 얼굴에, 쇼파에 앉아 TV를 보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동공이 흔들렸다.
“연예인!”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연예인이다!”
“아, 제발 놀리지 마세요.”
어머니가 달려와 나를 장난스레 껴안았고, 나는 어머니의 등을 토닥거리며 아버지와 눈을 맞췄다.
아버지 역시, 흐뭇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요즘 바쁘지? 오늘은 촬영 없어?”
“네, 뭐 조금… 일단, 이거… 받으세요.”
나는 손에 들려있는 선물을 건넸다.
오늘 먹을 소고기, 겨울 내내 끓여먹을 수 있는 곰탕 꼬리 뼈. 어머니가 입으실 코트, 아버지의 구두.
“사이즈를 잘 몰라서 대충 샀어요.”
너무 멋쩍어서 대충 둘러대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상의 사이즈와, 아버지의 신발 사이즈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선물을 사드리겠노라 다짐하며 머릿속에 넣어두었으니까.
그런 내 심정을 정확히 간파하신 어머니가 능청스럽게 웃으셨다.
“오는 길에 주운 것은 아니라 다행이네.”
“….”
“뭘 그렇게 쑥스러워 해? 아들이 부모 선물 챙기는데.”
그리고는 코트를 꺼내들더니, 어깨에 걸쳐보셨다.
“잘 어울려요?”
어머니는, 정말로 행복해 보이셨다.
단순히 코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렸을 적 카네이션 달아드리던 일 이후로 제대로 선물을 드려본 적이 있던가.
아들이 주는 최초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코트가 아니라, 목도리나 장갑을 드렸어도 이렇게 소녀 같이 좋아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미소를 보니, 덩달아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아버지가 물으셨다.
“무슨 돈이 있다고?”
“아, 출연료 받았거든요.”
재익이 형의 말 처럼, 출연료가 들어왔다.
배우에게는 개런티를 측정하는 일종의 ‘등급’이 있다. 내 등급은 볼 것도 없는 최하 등급이지만, ‘조연’으로 계약하며 문병철 감독님이 제작사에 입김을 불어넣어주셨고.
회차 당 이백 만원의 고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계약자체가 16회 계약이기 때문에, 총 삼천 이백 만원을 벌게 되는 셈.
적은 돈도 아니지만, 내가 이 업계에서 보고 들어왔던 액수에 비하면 큰 돈도 아니다.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나중에 더 좋은 걸로 사드릴게요.”
[청춘열차>.처음에는 내게 주어진 ‘기회’라는 측면에 집중했지만, 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지금의 마음가짐은 조금 다르다.
“더 비싼 걸로.”
내 몸값도, 커리어도.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어머니는 계모임에 들고 가겠다며, 내 사인 종이를 수십 장 받아내셨다.
“우후후, 이 정도면 내 어깨가 좀 피지 않겠니?”
만약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지방이었다면, 골목에 플랜카드라도 만들어 거실 기세셨다.
[도 씨 집안 외동아들! 연예계 데뷔!]뭐, 이런 식으로.
다음날인 크리스마스가 마침 월요일이라, [청춘열차> 3회를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청하게 되었다.
내 얼굴이 TV에 나오는 것은 이제 좀 적응이 되는데, 옆에서 시시각각 배우들의 연기를 평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당최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어머니는 시시콜콜 출연진들에 대해 물으셨다.
“소윤이는 어때? 너랑 친하니?”
“그냥, 조금요?”
“싹싹해 보이네. 원래 저런 성격이지? 어른들한테 잘 할 것 같은데?”
“….”
그런데 신기하게도 귀신같이 척척 맞추신다. 특히나 놀랐던 부분은 ‘김균오 쟤 보기보다 멍청하지?’ 라고 물으셨던 부분이다.
뭐야, 뭐야.
“청아라고 했나? 아들 여자친구?”
“여자 친구 역할이죠.”
“그게, 그거지. 예쁘게 생겼네. 언제 저 아가씨 집에 초대해서 식사나 같이 할까?”
“흐흠! 여보.”
“….”
“후후, 농담.”
이렇게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어머니가 [청춘열차> 3회가 끝나자 눈빛이 변하셨다.
송문교가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이 끝나자 한 마디를 툭, 던지셨다.
“문교는 생각보다 연기가 별로네?”
“….”
정확하다.
우리 어머니. 어쩌면, 이쪽으로 재능이 있으신 게 아닐까.
“우리 아들이 제일 잘하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내 등을 두드리셨다.
그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재익이 형에게 온 문자였다.
[[양치기 청년> SAFA 박진우 감독이, 재희 너랑 1대 1로 미팅하고 싶다더라.] [축하한다. 2018년 열심히 달려보자.] [문자 보면 바로 전화 줘.]“응? 무슨 연락이니? 왜 그렇게 웃어?”
내가 실 없이 웃자, 어머니가 물었다.
아, 입 꼬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요. 요즘 일이 잘 풀려서요.”
성탄절 선물이 곱절로 들어왔다.
[ 책 먹는 배우님 – 1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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