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9)
19.
시청률이 연말에 제대로 ‘뒤집혔다.’
박찬익 팀장의 예언대로 KTN의 [랜선사랑>은 시청률이 주춤거렸고, 입소문을 탄 [청춘열차>는 황지애의 [러브 어썸>을 미세하게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이변이 없는 한, 2017년 마지막에 웃은 월화드라마는 [청춘열차>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방송 시기 상 수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2018년이 있잖아?”
재익이 형의 말에 내가 웃었다.
“SBC 입장에서 이런 효자 프로가 어딨어? 개런티는 최대한 줄이고 고효율로 빼 먹고 있는데? 연말에 상하나 안 주면 진짜 양아치지.”
회사에서 말하길, 이 분위기로만 간다면 아마 올 연말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한다.
“에이, 아직 드라마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입은 반대로 말해버렸다.
2017년 KTN 연기대상에서 임주원은 남자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KTN에서 주말드라마와 일일드라마로 2017년 한 해를 알차게 보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연말 파티 때, 수상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으며 은근히 나를 의식하듯 바라보던 임주원의 눈빛은.
‘결국, 내가 이겼다.’ 였다.
나는 코웃음 쳤지만.
마음껏 좋아 하라지, 2018년부터는 다를 테니까.
“그래도 기대해봐.”
달리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신년(新年)의 추위가 눈에 보이듯 느껴진다.
“히터 좀 더 틀까?”
“아뇨, 지금 딱 좋아요.”
신년(新年)의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2018년 1월.
[청춘열차>도 어느새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나 역시 청운(靑雲)의 꿈을 실고 서울시 마포구로 달려갔다.목적지는 [피셔>의 비공개 오디션이 열리는 영화사 동방불패 사무실.
컨디션은 좋다.
자유연기 준비도 철저하게 마쳤고, [피셔>의 대본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머릿속에 있다.
“다 왔다.”
영화사 동방불패.
영화계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던 와중에, 한만희 감독과 작업을 시작한 최근 몇 년 사이에 승승장구하고 있는 곳이다.
낡은 건물 계단을 올랐다.
건물 2층에 [東方不敗> 라는 판넬이 걸린 사무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퀘퀘한 담배냄새가 조금 베어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깔끔한 내관이었다. 칙칙한 외관에 비해 내부 리모델링에 신경쓴 느낌.
재익이 형은 익숙하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L&K에서 왔습니다. 여기, 명함.”
경리 정도로 보이는 여직원 한 명이 명함을 받아들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낡은 벽지에는 리딩실, 회의실, 제작실, 기획실 등등 문구가 적혀있었고, 회의실의 문이 열리자, 십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L&K에서 오셨습니다.”
“아, 이쪽으로 앉아요.”
재익이 형을 따라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갔는데, 박찬익 팀장도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 옆에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서 와. 춥지?”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촬영은?”
“오디션 보고 밤 씬 촬영 하러 가야해요.”
“이야, 재희 바쁘네.”
“근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오디션장인데 매니저들 모두 대동한 상태로 앉아있는 것도 그렇고, 오디션장이 주는 특유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디션 전에, 얘기 좀 나누고 싶으신가봐.”
“아. 감독님은요?”
“아직 안 오셨어.”
내 뒤로, 기획사에서 온 매니저들과 배우들이 차례차례 안으로 들어왔다.
“배우마당에서 오셨습니다.”
“YK엔터에서 오셨습니다.”
그 중에서는 대한민국 3대 기획사라고 손꼽는 회사도 있었고, 스크린에서는 자주 보았던 눈에 익은 배우들도 있었다.
인지도만 없었지, 이미 프로들이다.
“장난 아닌데요.”
마치, 드래곤볼의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떠올랐다.
각각 회사에서 자신 있는 숨은 고수를 출전시킨 듯 비장함도 감돈다. 무엇보다 재미난 점은, 이미지가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저마다 개성이 넘친다는 것이다.
“배역을 직접 보고 고르겠다고 하셨으니까 이미지가 다 다른 거지.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가 될 수도 있으니 잘 봐둬.”
“그런 이유였군.”
맞는 말이다.
인원이 꽤나 많아졌지만, 같은 배역을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들은 아니다. 그렇기에 장내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은 것이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문이 열리며 한만희 감독이 들어섰다.
“어이구, 많이들 와주셨구나.”
안에 앉아있던 영화사 직원들과 매니저들이 단체로 일어나 한만희 감독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나 인사.
한만희 감독. 포털사이트에 올라와있는 사진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느낌.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밝은 인상이었지만 쓰고 있는 무테 안경 뒤에 숨어있는 눈은, 은둔고수를 연상시켰다.
한만희 감독이 테이블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이 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하하. 제 작품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만희 감독은 여직원이 건네준 파일 철을 펼쳐들었다.
“현재 투자 상황이나 캐스팅이 어디까지 진행되어있는지 많이들 궁금해 하실 텐데… 우선 간단하게 작품 얘기 먼저 시작할까요?”
한만희 감독이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피셔>보험 사기꾼 ‘피셔’와 그를 추격하는 특수 검사의 대결 구도를 그린 영화.
시종일관 시원시원한 액션 덕분에 큰 고민 없이 볼 수 있는 확실한 ‘오락영화’라는 뚜렷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작품.
“제 차기작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투자는 모두 무사히 완료했습니다. 주연급 캐스팅도 모두 완료된 상태구요. 캐스팅에 대해 들리는 소문이 많다고 들었는데… 모두 사실입니다. ‘피셔’ 역은 조승희 씨. 그리고 특수부 검사 역할에는 ‘임강백’ 씨 입니다.”
둘 모두, 이미 연예계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탑 스타들이다. 조승희는 연기 경력만 17년이 넘는 베테랑이고, 임강백은 한 때, 대한민국 4대 꽃 배우라고 불리며 인기몰이를 한 스타다.
나는 물론이고, 임주원이나 송문교 정도의 A,B급으로는 감히 비빌 수도 없는 정도의 위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조. 단역의 T.O는 많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저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소중한 배우 분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질문이 몇 차례 이어졌고, 장내는 전체적으로 호의적인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한만희 감독은 연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분위기를 편안하게 했다.
“그럼, 질문은 이 정도만 받고 오디션은 바로 옆방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한만희 감독과 투자자로 보이는 몇몇이 옆방으로 이동했다.
아니, 하려했는데. 돌연 한만희 감독이 멈춰 섰다.
“아, 한 가지 말씀 안 드린 것이 있는데….”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한만희 감독을 주시했다.
“지금 옆 방에 승희 씨가 와계십니다. 오디션에 참관하고 싶다고 하셔서 불렀는데, 괜찮겠지요?”
장내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 누구요?”
“… 조승희 씨?”
‘피셔’ 역할을 맡게 된 탑 스타, 조승희. 그의 앞에서 오디션을 본다.
한만희 감독이 방에서 나가자, 조용하던 배우들이 저마다 기대감을 드러냈다.
“와! 대박. 진짜로 조승희 앞에서 연기하는 거야?”
“이거 잘 보이면, 빽 제대로 생기는 거잖아.”
“이 정도면, 감독보다 더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사실 배우들의 이런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조연’ 들은 모두 작중 ‘피셔’의 부하들이기 때문이다.
악당들이지만, 겉으로는 가볍고 코믹하게. 또 한 편으로는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이 제대로 드러나게. 이런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일 수 있는 배역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또 감독만큼 입김이 강할 것이 분명한 조승희에게 잘 보이면. 어쩌면 ‘조승희 라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뻔한 욕망들.
그 어지러운 욕망들이 아지렁이가 되어 장내에 팽배하게 부풀어 올랐다.
“조승희에 임강백이면 500만은 먹고 가겠다.”
“나 이거 진짜 하고 싶어.”
나 역시 이 분위기에 편승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찬익 팀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긴장 돼? 하긴, 조승희 씨면.. 연기자들한테 좀 전설적이지? 흥행보증수표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승희 씨. 인간적이고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마.”
나는 그저, 어떤 대사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십 가지 작품들의 배역들.
과연 어떤 대사가 이 오디션에 효과적일까.
배우에겐 일종의 ‘색깔’이 존재한다.
“아, 그 배우? 너무 칙칙하지 않나?”
“그 배우는 우는 연기를 참 잘해.”
이런 ‘색깔’은 배우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해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배우가 성장하는데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맞아. 우는 연기‘만’ 잘하지.”
“웃기는 연기는 못 할 텐데. 다른 애들 많잖아?”
나 역시, 내 얼굴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어떤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골라야 내 이미지가 극대화되는지도 잘 안다.
이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시그니처.
이걸 잘 이용한다면 꾸준히 작품이 들어오는 ‘생계형 배우’가 될 수는 있겠지만.
반대로 이 편견을 깨지 못한다면, 크게 성장할 수는 없다.
송문교가 ‘로맨스’ 이외의 장르에서 그 어떤 섭외도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장르들. 다양한 스펙트럼을 메이저 씬에서 보여주는 것.
이게 ‘조연’으로 쌓을 수 있는 내 커리어의 가장 효과적인 밑거름이다.
“팀장님. 대부분 이런 연기를 준비해 오지 않았을까요?”
“음?”
“사탕발린 말로 사기치는 사기꾼, 으름장 놓는 조폭. 아니면 형사나 검사. 이따금씩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자 가족들이나 우는 여자들.”
“… 아무래도 그렇겠지? 장르가 그런 쪽이니까.”
뻔하지.
나 역시 그런 대사들을 위주로 준비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모든 배우들이 화내고 우는 연기를 한다면, 지켜보는 심사위원 입장에서 참 고달프겠다는 생각.
문이 열리고 예의 그 여직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음, 박 팀장님. L&K 들어갈게요.”
내 차례.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자, 어떤 대사를 해야 할까.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 수십 가지의 대본들 중에서, 나를 각인 시킬 수 있는 대본은 무엇일까.
‘리딩실’ 이라 적힌 문이 열리고, 나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섰다.
그리고 조승희와 눈이 마주쳤다.
조승희는. 지루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얼마나 잘 하나 한 번 해봐.’
그 찰나의 순간, 저 지루한 얼굴을 깨부숴지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며, 나는 어떤 연기를 선 보일지를 결정했다.
코미디.
숙명적으로 ‘씬 스틸러’가 되어야 하는 조연에게는 역시, 코미디만한 것이 없지.
[ 책 먹는 배우님 – 1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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