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
2.
“감독님, 저 L&K 박찬익 팀장입니다. 이번에 송문교 캐스팅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B팀 촬영만 하는 거죠? 여섯 시? 콜 타임이 너무 빠른 것 같은데요. 넉넉잡아도 여덟 시 까지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 아, 무시하다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 여보세요? 여보.. 아오! 이 새끼! 먼저 끊었어!”
매니지먼트 1팀 사무실은, 전화기를 붙들고 씨름을 벌이는 수많은 매니저들과, 기획 홍보팀들이 한 자리에 뒤섞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나는 이 뜨거운 전쟁터 한 가운데에서 눈치를 살피며, 대본이 쌓여있는 원형 테이블 근처를 기웃거렸다.
“재희, 또 왔어?”
원형 테이블 바로 옆 자리의 매니저 재익이 형이 나를 반겼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었다.
“형. 뭐 새로 들어온 거 없어요?”
“대본? 저기 오른쪽에 쌓여있는 것들이 죄다 올 상반기에 크랭크 들어갈 신작들이란다. 참나, 뭐가 이리 많은지…”
재익이 형이 가리킨 곳에는 신작 대본들이 마치, 탑처럼 쌓여있었다.
“좀 봐도 될까요?”
“뭐, 본다고 닳는 거 아니니까. 그래”
“예,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인사하며 대본이 쌓여있는 일명, ‘책 탑’으로 다가갔다.
로맨스, 로맨스 코미디, 청춘 성장물, 사극, 스릴러 등등.
영화, 드라마가 대다수, 이따금씩 뮤지컬과 대형 상업극 대본도 섞여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쌓여있는 이 대본들은, 이렇게 모여서 자신에게 꼭 맞는 주인공을 기다린다.
그나저나, 많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많은 대본들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단 하나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데뷔라고 해봐야, 아침드라마에서 고작 원샷 하나 잡힌 이미지 단역에게, 누가 피 같은 대본을 보내겠는가?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누구도 내게 대본을 읽어보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꿋꿋이 그 자리에 서서 대본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 그렇게, 이 쌍문동 저녁거리에서 너를 보았다…”
아직 주인공이 정해지지 않은 이 따끈따끈한 신작들을 이렇게 읽고 있으면 마치, 촬영장에 주연으로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이 배역을 내가 연기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매력 있는 작품을 만나면 또 다시 달려갈 수 있는 원동력은 얻게 된다.
그 때, 배부른 투정이 귀에 꽂혔다.
“아 또 로맨스야 왜에?! 나 스릴러 하고 싶다니까? 연기력 좀 화끈하게 터뜨릴 수 있는, 어? 그런 걸로 잡아오라고!”
“문교야. 형 한 번만 믿자. 이번에는 진짜 원톱이라서 존재감 엄청날 것 같다니까? 이번 드라마 끝나면, 꼭 내가 스릴러 하나 따줄게. 정말로!”
L&K 간판 배우 중 한 명인 송문교.
흥행스코어 96만, 46만.
영화 두 작품을 연달아 말아먹었지만, 여전히 대본이 끊이질 않고 들어오는 데뷔 3년차의 핫한 배우.
그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형, 내가 전작 시작할 때부터 말했잖아. 나 로맨스 지겹다니까? 언제까지 사랑 타령만 하겠냐고?”
“….”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누구는 뻥뻥 걷어 차버리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자 한다.
내 시선을 느꼈을까, 그만 송문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송문교의 차가운 눈빛이 내 뇌리에 꽂혔다. 송문교의 눈은 마치, ‘네가 여기서 뭐해?’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송문교.
나와 동갑내기이자, 연습생 생활을 함께 했던 송문교는 어느새, 매니저 형을 쩔쩔매게 만들며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요구하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와는 정 반대다.
그리고 이제는 나 같은 놈은 알지도 못한다는 듯, 묘한 비웃음과 함께 아는 척 조차 하질 않는다.
눈빛 하나만으로, 너와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씨발.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질투심 섞인 부러움, 이런 비루한 감정을 내비치면 송문교는 승리자의 쾌감을 느낄 테니까. 이런 도발에 말려들 필요 없다.
“그럼 형, 수고하세요.”
“어어 수고해.”
나는 대본을 원형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대본을 흡수 하시겠습니까?]대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 뭐, 뭐지?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곁에 있던 재익이 형은 연신 달력에 무언가를 표기하느라 정신없었고, 주위의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없었다.
그 때, 다시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 [청춘열차>가 흡수 가능합니다.]… 처, 청춘열차?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이 바로 청춘열차였다.
제작사 파랑새미디어에서 제작하고 SBC에서 방영하는 16부작 미니시리즈로, 빌어먹을 송문교가 주연으로 내정되어있는 드라마. 송문교가 그렇게 하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20대 대학생들의 사랑을 그린 청춘 로맨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대본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본을 흡수 하시겠습니까?]털썩!
나는 테이블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 이, 이게 뭐야.
뭔지 모르겠지만 대본이 말을 하고 있었다. 오직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아니 잠깐만, 이거 꿈인가?
“왜 그래?”
재익이 형의 질문에 나는 벙찐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근데 형. 이 대본, 연습실에서 좀 보고 와도 될까요?”
“무슨 대본? 아, 청춘열차? 그거 많아. 가져도 돼. 대신, 책 간수 잘해야 하는 거 알지? 어디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네, 물론이죠.”
“쯧, 이렇게 열심히 하는 네가 팀장님들 눈에 띄어야 하는데… 그럼 열심히 하고. 수고.”
나는 허둥지둥 [청춘열차> 대본을 손에 꽉 쥔 상태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대본을 흡수 하시겠습니까?]여전히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이 대본만 이런 것일까 싶어, 연습실에 비치되어있는 다른 대본을 들어보았다.
[드라마 [우물왕자>가 흡수 가능합니다.] [영화 [악인에 산다>가 흡수 가능합니다.] [영화 [복수의 제왕>이 흡수 가능합니다.]“나 미친 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단 청춘열차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대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흡수, 하겠냐고. 그런데, 난데없이 흡수라니?
[대본을 흡수 하시면, 대본에 기재된 배역에 100% 녹아들게 됩니다.]대본안의 캐릭터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미치지 않았으며, 지금 상황은 꿈도 아니다.
…. 젠장.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속으로 흡수하겠다고 외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책이 촤르르 펼쳐지더니 이내, 환한 빛을 내뿜어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청춘열차>의 배역들의 정보, 삶, 과거, 심정, 외형적 특징, 작가가 표현한 이미지, 등.책 대본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빛무리와 함께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후- 아!”
빛무리가 사라지자 나는 크게 호흡을 내뱉었다.
“책이 사라졌어?”
책이 사라지며, 책 대본의 정보와 대사가 모두 내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마치,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인 양, 입에서 대사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강혁이가 내 친구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지경이었지. 동네에서는 나를 건드는 사람도 없고, 비싼 오토바이 타고, 술 먹고 담배피우면 계집애들이 따라다니고. 완전 내 세상이었지. 근데 그거 알아?”
대사가 점점 뒤로 갈수록 도파민이 분비되는 찌릿찌릿한 경험을 했다. 이 힘은, 심장이라는 엔진을 계속해서 강하게 두드리며 나를 절정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도 나는 달랐어. 잘나가는 강혁이가 내 친구지만, 나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에 시장에서 떡볶이 파는 미혼모의 아들이고, 스무 살이 된 지금. 동일 선상에 있는 줄만 알았던 김강혁이와 내가 사는 세상은 철저하게 다르다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다.
거기다 마치 내가 가진 능력에서, ‘이우진’이란 이 배역의 한계를 모두 끌어올린 양, 발성도, 화술도 한참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 한 일.
“…. 이, 이건 정말…””
나는 내 머릿속에 완벽히 들어와 있는 [청춘열차>에 대해 떠올렸다. 이건 진짜다.
내게 청춘열차의 누구라도 연기하라고 한다면, 그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낼 자신 있었다.
“… 가능 해.”
이 영화 같은 능력이 어떻게 내게 주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나도 성공할 수 있다.
[ 책 먹는 배우님 – 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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