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0)
20.
분위기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차갑고 무거운 오디션장 특유의 냄새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으음, [청춘열차>? 이거 지금 방송 중이던가?”
“네.”
“방송은 못 봤는데, TV 광고는 본 것 같아요. 근데… 했던 작품은 이거 하나뿐 인가요?”
내 초라한 경력이 말해주고 있다.
‘아, 얘 볼 것도 없겠구나.’
내 연기는, 이렇게 팽배하게 퍼진 불신 속에서 시작했다.
“시작해 봐요.”
하지만.
이런 불신에 반전을 먹여주는 것이야 말로.
내 특기다.
*
조승희가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이내 얼굴 근육이 하회탈 마냥 옆으로 일그러졌다.
“푸흐흐흐흫”
그리고는 입을 막고 고개를 테이블에 쳐 박고는 한참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대본, 삼십 대 파계스님의 웃지 못 할 첫사랑을 그린 영화, [달마의 품격>.
흥행에 실패했음은 물론, 관객들에게 엄청난 비난 받았던 영화지만, 배꼽 잡고 쓰러지는 대본임은 확실하다.
첫 대사를 내뱉는 순간, 불신 가득한 시선들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파앙! 누구보다 강력하게!
순식간에 공기 흐름이 뒤바뀐다.
불신에서 궁금증으로. 곧 호기심으로.
그리고 이제는, 기대감으로.
기대감이라는 흐름을 탄 내 대사는, 뱉으면 터지는 폭탄과도 같았다.
“으큭큭큭큭”
조승희가 웃음을 터뜨리자, 한만희 감독도 황당하다는 듯 조그맣게 웃더니 종국에는.
“푸흐흡, 뭐야, 저 친구? 멀쩡하게 생겨서는.”
아예, 대본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길지 않은 대사였기에, 금세 연기를 마무리하고 얌전히 섰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코멘트를 기다렸는데.
“아고고, 배야. 저 표정 나중에 샤워하다가 생각날 것 같지 않아요?”
조승희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걸어오며 이내 박수를 쳤다.
짝짝!
“어우, 인상 깊네 이 친구. 이름이?”
“도재희 입니다.”
그리고는, 한만희 감독 보라는 듯, 내 옆에 서며 물었다.
“어때요? ‘메기’ 역할로 딱 인 것 같은데?”
“음, 승희 씨랑 키도 딱 어울리네.”
한만희 감독은 나와 조승희의 ‘투샷’을 확인하며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 거리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 다 좋은데 ‘메기’로 쓰기에는 마스크가 너무 아깝단 말이야.”
메기는 [피셔>에서 제법 큰 분량을 차지하는 감초역할로 대놓고 웃기는 악당 캐릭터다. 내가 노린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메기’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봐서는 나름대로 오디션은 선방한 것 같은 느낌.
한만희 감독은 문득 생각난 듯, 직원에게 외쳤다.
“그, ‘피셔 일당’으로 합격한 배우들 좀 들어오라고 해줄래요?”
곧 바로, 오디션에 합격한 배우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조승희 사이에 섰고, 한만희 감독은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닥에 앉았다가 또 섰다가. 측면을 봤다가 손가락으로 사각형을 만들어 앵글에 담아보기도 했다가.
전체적인 ‘피셔 일당’의 이미지를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메기로 쓰기엔 너무 잘생겼어.”
“그럼 ‘망고’ 어때요?”
조승희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망고.’
그러자 한만희 감독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오, 망고 좋네! 약간 어리숙한 이미지도 있고, 눈 부릅 떠볼래요?”
“… 이렇게요?”
“으흐흐, 좋네.”
“괜찮네요. 마스크도 좋고, 연기도 곧 잘 하고.”
“그럼, 망고 확정? 승희 씨도 좋죠?”
조승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남자도 반할 만한, 살인적인 미소를 날리며 악수를 건넸다.
“잘 부탁해요?”
“아, 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조승희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그 자리에서 3분 즉석요리 골라내듯 배역을 뚝딱 골라내버린다. 최종 결정은 한만희 감독이 했지만, 조승희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된 캐스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대체 영향력이 얼마나 큰 거야?
조승희가 내게 물었다.
“코미디 일부러 준비했죠?”
“아, 네.”
“센스 있네.”
조승희가 피식 웃어보였다.
나는 ‘탑 스타’에 대한 어느정도의 편견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엄청 거만하게 굴것이라고 생각한,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조금 졸렸는데, 덕분에 잠이 확 깼어요.”
전혀 권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밌네.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입니다.”
“내가 형이네. 말 편하게 해도 되죠?”
“아, 네 선배님.”
오히려 편한 형 같은 분위기였다.
“어우, 선배는 무슨. 엄청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형이라 불러”
단 번에 말을 놓는 시원시원 한 성격에 호탕하게 웃을 줄도 알고. 격식 차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한 남자다운 성격.
“아 SBC 드라마? 그거 본 적 있는데. 너 거기 나오는 구나?”
이런 사람이 바로, 스타다.
가만히 있어도 반짝반짝 고고하게 빛나는 별.
고슴도치 마냥 바짝 가시를 드러내며 ‘나 스타야!’ 라고 외치는 송문교 같은 놈 말고.
자연스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
스스로가 잘났다고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서 모셔주는 사람.
성공해 본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 때, 박찬익 팀장이 나를 불렀다.
“재희야.”
고개를 돌리자, 박찬익 팀장은 한만희 감독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내가 다가갔다.
“망고 역할이 뭔지는 알죠?”
한만희 감독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싶었던 역할입니다.”
‘망고’는 피셔 일당의 막내 역할이다.
대본 속에서 비중을 순위로 따지자면 한참 밑이지만, 내가 후보로 꼽았던 매력적인 조연 중 하나.
그 이유는, 반전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리숙한 얼굴로 고객들을 방심하게 만드는 미끼 역할을 하지만, 본색을 드러낼 때는 아주 사나운 놈으로 변신한다.
극의 하이라이트에서는 ‘피셔’와 함께 중국에서 달아나다 붙잡히며 고래고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발버둥 치는데, 내가 그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럼 다행인데… 그나저나 스케줄 괜찮겠어요? [청춘열차> 이거 지금 방송중이라면서.”
박찬익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드라마는 2월 초면 끝납니다.”
“아슬아슬 하겠네.”
“네. 근데 촬영은 1월 말에 끝날 수도 있어서, 무조건 맞출 수 있습니다.”
박찬익 팀장의 확답에 한만희 감독은 여유로운 얼굴로 내 전신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엄지로 나를 가리키며 박찬익 팀장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친군데, 연기는 곧 잘하네?”
“제가 밀고 있는 친굽니다.”
“오, 박 팀장이?”
“예.”
그러자 한만희 감독이 내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해요?”
“도재희 라고 합니다.”
“박 팀장이 밀고 있으면 L&K에서 제일 핫한 배우라는 뜻인데, 왜 난 처음 봤을까.”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아아. 배역 크지 않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요. 실력되는 배우들한테는 공정하게 주고 싶은데, 투자자 쪽에서도 꽂아 넣을 배역이 몇 명 있나봐. 요즘 배역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어.”
“아닙니다.”
비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망고’ 역할은 씬 스틸러의 면모를 모두 갖추었다.
대본에 쓰여 있는 이중적인 매력도 충분한데다, 출연하는 장면은 모두 굵직굵직한 씬 들이다. 거기에 ‘피셔 일당’에서 조승희를 제외하고 유일한 얼굴마담 역할이기도 하다. 눈에 띄기에는 충분한 조건.
“그럼, 일단 오늘은 이걸로 파하고. 리딩 날짜 정해지면 연락할게요.”
한만희 감독이 다음에 만날 것을 고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승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음에 보자?”
또 한 번 살인적인 미소를 흘렸다.
속을 알 수 없는 능글맞은 얼굴.
나는 화답하듯, 어정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형.”
자랑해야겠다.
조승희에게 형이라고 부르다니.
*
“우리 재희는 오디션은 봤다하면 붙는구나. 백발백중이네.”
재익이 형의 질문에 내가 웃었다.
“승희 씨는 어때?”
“멋있던데요?”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라 느낄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 사람을 누가, 일곱 살 짜리 아들이 있는 유부남으로 볼까.
“그치? 확실히 탑 급은 틀리지?”
“예.”
탑 스타라고 부를 만한 배우는 없고, 중견 선생님들과 전성기가 한풀 꺾인 배우들, 이제 막 뜨는 신인배우가 많은 L&K에서는, 확실히 느껴보기 힘든 경험이었다.
“원래 정상에 한 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사람이 좀 느긋해지나봐. 못 올라가본 어중이떠중이들이 거기 올라가겠다고 바락바락 힘주는 거고.”
백 번 공감한다.
조승희가 내게 아무런 서스름 없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그 어느것에도 구애받지않고. 배우로서 그렇게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일단은,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저녁이나 먹고 가자. 뭐 먹고 싶어?”
“아, 왜 이렇게 매콤한 게 땡기죠? 막국수 어때요?”
“좋지. 인계동에 저번에 그 집 괜찮았지?”
“네.”
“거 봐. 촬영장 근처 식당은 형만 믿으라니까. 큭큭. 그럼 그리로 간다?”
재익이 형은 곧 바로 운전을 시작했다.
오후 4시.
오늘의 일정은 끝난 것이 아니다. 오디션 때문에 낮 촬영 스케줄을 조정하긴 했지만, [청춘열차> 밤 씬이 남아있는 상태.
촬영을 위해 나는 잠시 눈 좀 붙이려고 시트를 뒤로 눕히고 몸을 뉘였다. 하지만 재익이 형의 통화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래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응?
FD, 혹은 조연출과 통화하는 듯 보였다.
“아, 아니. 저기… 기다리는 건 괜찮은데, 문교는요? 옆에 명길이도 있습니까? 뭐라고요? 아. 이런. 일단, 알겠습니다.”
그리고 거칠게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을 빼버린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인 듯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재익이 형이 내 질문에 허를 차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못 먹을 것 같다. 바로 촬영장 들어가야겠는데?”
“왜요?”
“… 아무래도 문교가 사고 제대로 칠 것 같다.”
송문교가, 사고를 친다.
[ 책 먹는 배우님 – 2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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