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2)
22.
나는, 내가 처음 ‘촬영장’을 방문했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에는 문교도 신인이었고, 문성이 형도 회사에 있었고, 나는 이 둘 보다 더 심한 ‘초짜’ 였다.
‘이미지 단역’ 이라는 이름으로 촬영장을 방문했지만, 하는 일은 대사 한 줄 없는 엑스트라나 다름없었다.
주조연급 연기자들 뒤에서, 아무도 보지 않지만 큐 사인에 맞춰 저 마다의 연기를 펼치는 보이지 않는 배우들.
그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기회를 얻는 것에 감사하며, 매사에 웃고 나이 어린 연출부에게도 90도로 고개를 숙일 줄 알던 선배들.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전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 치열한 삶 속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을 꼽으라면, 이것 하나를 꼽고 싶다.
바로, 무명 배우들의 인사.
“다음에 또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배우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약속 되어오던 인사들.
‘다음’ 이라는 약속을 통해, 생계에 부딪혀도 꼭 ‘현장’에서 만나자는 다짐이자 동시에 꿈. 기회.
“다음 현장에서 ‘또’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 줄 알아? 이건, 배부른 배우들은 몰라.”
문교가 성공하고, 문성이 형이 회사를 떠나면서 철저히 혼자 남겨진 나.
내게 ‘다음’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 누구도 내게 ‘다음에 현장에서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선배들에게 잊혀지고, 후배들에게 밀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혼자 대본을 읽고, 언젠가 주연을 연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연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내게 찾아온 이 ‘기적’으로 지금 저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으로 인해, 누군가의 자리를 내가 빼앗았다는 죄책감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성공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는 없는 부분이기에.
나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춘다.
나와 똑같았던 단역들에게, 예전처럼 똑같이 인사를 한다.
아주 예의바르게.
“다음에 또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자,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편의점 직원1’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말 한 마디에 울고 있는, 이런 뜨지 못한 자들의 설움을 나는 안다. 아래로 보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고 싶다.
나와 같은 ‘기적’이 찾아올 수 있도록.
더 간절해지길 바란다고.
그에 반해, 송문교는 신인 시절에도 무명배우들을 보며 단 한마디로 평했다.
“구질구질하다 진짜. 나는 빨리 뜨던가 해야지.”
이게, 송문교와 내가 다른 결정적인 ‘차이’다.
이 미세한 가치관의 차이가, [청춘열차>라는 3개월의 레이스에서 ‘차이’를 만들었다.
[[청춘열차> 송문교, 잃어버린 주연의 품격.]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 했다.
*
개 버릇 남 못준다고 했던가.
“형, 지금 몇 시죠?”
“1시 10분.”
새벽 1시 10분.
그 날의 촬영 하이라이트는, 새벽 1시 10분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자자! 마지막 씬 파이팅 있게 끝내고, 내일 촬영은 조금 널널하게 갑시다.”
마지막 씬 하나 남은 상황.
하지만 대본 분량만 3.6 페이지짜리 장문의 대사 씬이며, 송문교와 나, 단 둘이서 붙는 격정적인 감정 씬이었다.
지금 촬영 중인 9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장면.
“배우들은?”
문병철 감독님의 질문에 조연출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재희 씨는 오셨고, 문교 씨는 의상 마무리 중입니다. 3분 안에 올 겁니다.”
조연출의 말에 문병철 감독의 얼굴이 구겨졌다.
“다들 피곤한데, 빨리빨리 하자.”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 3박 4일간, 파주 세트장에서 퇴근도 못하고 모텔에서 세 시간 씩 쪽잠을 자며 촬영에 임했다.
지금 현장의 배우, 스텝 가릴 것 없이 피로도가 많이 쌓여있는 상태다.
“야 이 새끼야. 카메라만 두고 움직이지 말랬잖아!”
“죄송합니다.”
작은 실수에도 사람들이 예민해지고, 거친 말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은 이럴 때, 꼭 실수를 하게 된다.
‘빨리 끝내야 한다.’ 라는 부담감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조금요.”
“이거 끝내고, 바로 서울로 쏘자. 으으, 파주 지긋지긋하다.”
나는 재익이 형이 건네 준 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대며, 최대한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5분이 지나도록, 10분이 지나도록 송문교는 세트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야! 뭐해! 문교 씨 안와?”
조연출이 애가 탄다는 듯,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무전기에서는 애꿎은 고함 소리와 함께, 애처로운 FD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아,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 일!”
벌써, 새벽 1시 30분.
송문교가 옷 갈아입기만을 기다리며 마지막 씬을 준비하는 40여 명의 스텝들 보다 큰 일이 대체 뭘까?
– 싸움이 났습니다.
“싸움?”
“가지가지 한다.”
감독님을 포함한 조연출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세트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트장 밖, 컨테이너 의상실에서는 송문교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고, 다른 남자의 욕설도 함께 들렸다.
“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니는 선배도 없나!”
그 남자는 조금 전, 송문교와 함께 연기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40대 남자단역배우.
그가 송문교에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 건방진 놈의 새끼야!”
이유는 아주 ‘사소’했다.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40대 배우는 송문교에게.
“아이고!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악수를 건네며 인사를 했으나, 송문교는 딱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아, 예.”
그리고 벌레 보듯 악수를 청한 손을 무시했고.
눈으로 말했다.
‘네가 뭔데?’
송문교에게는 소모품처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단역 나부랭이’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20대 배우들이야, 원래 저런 놈인가 보다하고 넘어가겠지만,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이 40대의 선배님은 그 비아냥거림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송문교는 몰랐을 것이다.
“문교 씨!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문병철 감독이 실력은 있지만, 뜨지 못한 연극배우들에게 줄곧 기회를 줬던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쳐요!”
40대의 이 서글서글한 인상의 선배님이,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무대를 지켜온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송문교의 버릇없는 행동이 조금은 달라졌겠지.
“제작 PD 어딨어? 나와요! 배우 데려다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런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배우! 나 처음 봤다고!”
참고 참았던 문병철 감독은, 더는 못참겠다며 폭발해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괴물에게도 ‘급’이 있다.
‘인지도’라는 괴물이 자신을 집어 삼킬 때, 주위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나 보다 더 강력한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호시탐탐 집어삼킬 기회를 노리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이 구역에서 마음껏 횡포를 부려도 될 만큼 내가 ‘급’이 있는지.
주제 파악을 잘 해야 한다.
그날의 마지막 씬. 대본분량 3.6페이지짜리 촬영을 죽 쑨 것이야 말해 무엇 할까. 감독과 제작PD에게 온갖 잔소리를 다 들으며 너덜너덜해진 송문교의 연기는 엉망이었고, 촬영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 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아니.
어쩌면, 송문교가 처음 [청춘열차> 첫 촬영부터 지각하는 그 순간부터 이런 결과를 예고했는지도 모르겠다.
송문교X문병철, 송문교X나.
애초에 궁합이 맞을 수가 없는 관계들에서 시작했으니까.
[[청춘열차> 송문교, 잃어버린 주연의 품격.]기사 한 줄이, 현재 송문교의 위치를 대변한다.
11회 이후로 대본이 대폭 수정되었고, 송문교의 분량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에 따라 김균오와 내 분량이 늘어났는데, 기이하게도 시청률은 조금씩 상승했다.
– 도재희X박청아 케미가 주연커플보다 낫다 ㄷㄷ.
– 도청커플 너무 훈훈하지 않나요? 둘이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는데 빨리 결혼했으면….!
3회부터 소폭 상승하다 8.2%에서 멈추다시피 한 시청률은 11회부터 껑충껑충 상승하기 시작했다.
황지애 주연의 [러브 어썸>의 시청률은 7%로 떨어지고, KTN [랜선 사랑>이 종영하고 시청률 10%를 훌쩍 넘어섰다.
[달달한 케미 자랑하는 [청춘열차> 도.청 커플] [도재희 효과? [청.열> 시청률 껑충! 10% 넘길까?] [순간최고 시청률 경신! 11.2% 주역은? ‘도X청 커플의 애절한 포옹 씬]KTN의 후속작은 일명 ‘폭망’ 했으며, MKC [러브어썸>은 황지애를 품고도 시청률 싸움에서 [청춘열차>에 패배했다.
내 분량을 크게 가져가는 문병철 감독의 ‘초강수’가 먹힌 셈이다.
월화드라마 왕좌가 바뀌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타이밍의 순간이었다.
승전투수는 물론,
[주연보다 빛나는 명품조연 도재희.]내가 되었다.
“이건 비밀인데.”
“… 네?”
“아마, 다음 작품도 미니시리즈 할 것 같아요. CP가 그러네. 차기작 생각해두라고.”
문병철 감독은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당당하게 홈런을 치며 승전타자가 되었고.
다음 작품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아직 작품은 안 나왔지만, 재희 씨랑 꼭 하고 싶네요.”
아, 문병철 감독 성격도 보통은 아닌데. 신중하게 고민해봐야겠다. 하지만, 기분만큼은 떠나갈 듯이 좋다.
“물론, 물건도 안 보여주고 파는 그런 양아치는 아닙니다만… 하하. 매몰차게 거절만 하지 말아줘요.”
문병철 감독이 내게 한 말은, 단어만 다르지, 내가 위에서 강조했던 말과 똑같은 의미였기 때문.
‘다음에 또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쑥스러워 콧등을 긁적이며 말했다.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감독님.”
*
제법 많은 것을 얻은 3개월의 레이스 였다.
나를 종착역에 내려주지는 못했지만,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는 환승역에 내려준 열차.
[청춘열차>. [청춘열차>의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아직 방송은 1주일 더 남아있는 상태기에 결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입 조심’ 하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차기작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그나저나… 평창이 뭐냐, 평창이.”
재익이 형은 운전대를 잡으며 연신 투덜거렸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청춘열차> 합평회 일정이 잡혔다.합평회란, 작품이 끝나고 배우 스텝이 어우러져서 떠나는 일종의 M.T인 셈인데, 시청률이 높은 미니시리즈의 경우 발리며, 세부며 해외로 떠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겨울에 끝나니까… 따뜻한 섬나라 한번 가보나 싶었더니, 평창이라니. 제작사 너무 짜게 구는 거 아냐?”
월화드라마 시청률 역전의 신화, [청춘열차>의 MT는 평창이다. 추우니까 따뜻한 펜션에서 몸이나 녹이면서 술이나 먹고 스키나 타자는 말인데.
제작사 입장에서 아주 큰 흑자를 봤음에도, 송문교와의 여러 가지 사건을 따져봤을 때 ‘통 크게 쏠’ 기분은 아닌 듯 했다.
뭐, 나는 상관없지만.
“참석할거지?”
“해야죠.”
주조연급 배우들 중에서 송문교만이 불참을 선언했다.
다음 작품 스케줄이 바쁘다는 핑계를 삼았는데, L&K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송문교는 아직 다음 스케줄이 없다.
“그나저나, 나도 매니저 일 오래했지만… SAFA 건물 와보는 것은 또 처음이네.”
내 축제 차량이 신촌의 어느 높은 빌딩 앞에 정차했다.
SAFA.
서울영화아카데미(Seoul Academy of Film Arts).
젊은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이며, 매해 영화제에서 꾸준한 성과를 거두는 젊은 천재들이 모여 있는 곳.
일전에 [양치기 청년>의 감독 박진우 연출은 내게 1대 1 미팅을 제안했고, 나는 오늘 이곳에 방문했다.
재익이 형이 차창너머로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으으, 벌써부터 느껴지지 않냐?”
“뭐가요?”
재익이 형이 씨익, 웃어보였다.
“2018년 엄청 바빠질 것 같다는 이 느낌적인 느낌.”
재익이 형 역시, 직감하는 것이다.
이 건물을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아마도 내가 이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로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
“글쎄요.”
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더 바빠져야 하지 않겠어요?”
고작, 영화 두 어개로 만족하긴 이르다.
[ 책 먹는 배우님 – 2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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