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3)
23.
처음 [양치기 청년> 대본을 접했을 때, 재익이 형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쓴 감독, 엄청 카리스마 있을 것 같지 않냐? 사회를 직관적으로 꿰뚫는 그런 통찰력!”
냉소적이고 삐딱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날선 언행으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 염세주의자 느낌이랄까.
매니악한 삼류 양아치의 눈을 통해 본 세계는, 분명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난 박진우 연출은 쇼펜하우어가 아니라 오히려 볼프강에 가까웠다.
“으앗! 영광입니다. 박진우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는 동글동글한 인상. 유순해 보이는 얼굴에 쾌활한 목소리까지.
“아, 반갑습니다. 저는 도재희 라고 합니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지만, 다른 의미로 첫 인상이 매우 좋았다.
“앉으세요.”
SAFA의 어느 작은 사무실에서 나와 재익이 형, 그리고 박진우 연출과 같은 SAFA 19기 동기 몇 명이 자리했다.
“팬이에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팬임을 자처하는 여자 스텝도 있었다. [청춘열차> 작품 자체가 흥하긴 했지만, 요 근래 길거리를 혼자 돌아다닌 적이 없어, 팬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인지도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데서 만날 줄이야.
“[청.열> 정말 재밌게 보고 있어요! 연기 너무 잘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은걸.
박진우 연출도 기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사실 기획사들에 책 돌릴 때만 해도, 이런 유명 배우님을 섭외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유명배우라뇨. 절대 아닙니다.”
“지금 아주 뜨거운 드라마에서 큰 비중으로 출연중이신데 유명 배우시죠.”
그리고는 뜬금없이 물었다.
“낚시 좋아하세요?”
“네?”
“낚시요. 바다낚시.”
휙휙, 낚시대를 들어 올리는 모션과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렸을 적 아버지 따라 몇 번 해본 것 말고는 없습니다.”
“아쉽네요. 제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간재미 잡으러 갔다가 참돔을 낚은 기분입니다.”
“… 네?”
“참돔이요. 바다의 미녀.”
“…..”
고오맙다.
왜 하필 생선이야.
“하하. 미녀라니.”
내가 어색하게 웃자, 박진우 연출이 눈빛을 조금 바꾸며 말했다.
“보내주신 샘플 영상은 모두 확인했습니다. 영상과 프로필 사진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내가 찾던 배우다!”
“그런가요?”
“네. 장난스런 얼굴에 숨어있는 카리스마 있는 눈빛까지. 마스크며, 연기력이며 모두 ‘허영탁’ 역할 그 자체입니다. 정말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약간 주저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장편을 찍긴 하지만, 제작비가 정해져있습니다. 도 배우님 개런티를 아무리 낮게 잡아도… 저희가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 개런티야 원래는 보잘 것 없는 신인 배우 기준이지만. 전작 개런티가 기준이 되는 업계에서 첫 작품을 제법 높은 개런티로 찍었으니, 이는 다음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돈’ 자체를 바라보고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다. 돈을 쫓으려 했다면, 메이저 씬을 찾았어야 할 테니까. 내가 본 것은 ‘가능성’과 ‘미래’. 그렇기에 그 점은 염려 말라고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신.”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다.
“도 배우님 커리어에 [양치기 청년>이 날개를 달아줄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 봐라.
“국내외 영화제에 출품할 것은 물론. 반드시 수상해내어 절대! 도 배우님 커리어에 악영향이 되는 작품이 되지 않을 것도 확신합니다.”
자신감도 상당하다.
거기다 빙글빙글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화법까지.
약간 유하게 생긴 소년 같은 인상인데, 입담만큼은 확실한 캐릭터.
“으음.”
패가 내게로 넘어왔다.
박진우 연출은, 감독들이 좋아하는 ‘정치’ 대신, 직설적으로 내게 진심을 전했고, 지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음, 슈트를 뽑아야겠네요.”
“네?”
“영화제 가려면요.”
내가 장난스럽게 미소 짓자, 의미를 알아차린 박진우 연출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하! 감사합니다!”
“저야 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양치기 청년>은 작품 자체가 가진 ‘힘’이 충분한 영화다.‘허영탁’ 캐릭터가 가진 매력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메시지도 확실하다.
감독이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싶었던 조금의 우려도, 단번에 날아가 버릴 만큼 확신한다.
좋다.
“그나저나, 감독님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서른셋입니다.”
“…. 아.”
내 또래로 보였는데, 재익이 형보다 많잖아?
“제가 좀 동안입니다.”
박진우 연출이 웃어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쭉 늘어지는 것이 어째 정감이 가는 얼굴이다.
“식사는 하셨나요?”
*
박진우 연출은 원래 영화 전공은 아니라고 했다.
인문학을 전공한 유명 신문사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극장가와 충무로를 드나들며 인맥과 경험을 쌓던 어느 날, 돌연 영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SAFA에 수석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입봉을 바라보는 신예 감독.
SAFA에 들어오기 전에 찍어보았던 영화라고는, 대학생 시절에 취미삼아 찍었던 단편영화 한편이 전부인데.
그 영화로 지방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영화제는 아니었어요. 평화영화제라고, 평화와 화합, 평등을 주제로 하는 지방 영화제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대단하긴 했는데, 그 때는 실망했죠. 고작? 이러면서. 전주나 부산, 부천 같은 곳에서 상영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뭐, 약간 허세 같은 게 있었달까.”
박진우 연출은 소주잔을 비우며 말했다.
식사 하셨냐는 질문에 가볍게 시작한 식사자리.
남자들의 첫 만남에서 역시, 소주가 빠질 수는 없다.
“그래도 수상이라니. 대단하신데요? 어떤 영화였나요?”
“[메일>이라고, 5분짜리 단편 영환데, 5분 내내 주인공의 얼굴하나 안 나와요. 여자주인공의 매끈한 다리와 립스틱을 바르는 입술, 속눈썹을 붙이는 눈, 같은 인서트 장면만 부각하죠. 그 때, 메일이 한통 도착해요. 거기에는 온갖 상스러운 욕이 적혀있죠. 성매매를 암시하는, 뭐 그런.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욕지기 소리가 들려오는데, 주인공이 겁을 잔뜩 집어먹어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죠. 누구야!”
“근데요?”
“근데 목소리가 남자예요. 전역모가 침대 모퉁이에 버려져있고. 알고 보니 트랜스젠더… 뭐 이런 거죠. [메일>이라는 단어가 [mail>도 있지만, [male>이라는 ‘남성’ 의미도 있잖아요. 러닝 타임 5분 내내 관객을 속이는 겁니다. 컷 몇 장면으로. 조금 난해하죠?”
응. 확실히.
“그 때는 나름대로 어떠한 메시지를 품고 찍긴 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500만원이나 썼는데, 대체 왜 그랬지?”
전주영화제나, 부천판타스틱, 부국제 같은 큰 영화제에 가지 못해 실망했던 박진우 연출은 메가폰을 놓고 펜을 들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만약, 인생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면, 영화라는 이름의 끈이 그의 인생을 계속해서 영화판으로 끌어당긴 것 같은 느낌.
타고난 영화인이다.
[메일>이라는 단편영화를 어떤 생각으로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영화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찍었고, 영화제에서 수상할 만큼 ‘감각’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이번에는… 많이 다를 겁니다. 기자 생활 하면서 많이 보고 배웠어요. 또 아카데미에서 많이 배웠죠. 아, 그 때는 너무 난해하게 작업하려 했구나… 하는 반성도 했고… 이제는 10배 넘게 돈을 들이는데, 잘 찍어야죠. 하하.”
온전히 믿어도 될 만큼, 실력 있는 사람이다.
내가 말했다.
“대본을 보면 압니다. 얼마나 고심해서 스토리를 짜내셨는지. 또 얼마나, 정성들여 찍으실 지도. 지금도 어서 촬영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 아.”
내 말에 박진우 연출이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을 말을 골라내더니, 소주 한잔을 넘기고 말했다.
“이거 되게, 크흠. 쑥스럽네요. 사실 준비 당시에 주변에서 너무 매니악한 대본이 아니냐는 평가도 많이 받았습니다. 뭐, 독립 영화로 구현할 수 있는 한계가 다 그렇긴 한데… 저예산이라도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들이 대세긴 하거든요. SNS나, 미디어 같은.”
“그런 편견을 깨뜨릴 만큼 잘 쓰셨습니다.”
“… 제가 도 배우님께 확신을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기운을 얻는 군요.”
그는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었다.
감독과 배우의 ‘수직’적인 관계. 요즘에야 덜하지만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너를 대체할 배우는 차고 넘친다.’
… 라는 오래된 감독들의 꼰대 마인드가 팽배했다고 한다.
문병철 감독만 보아도, 이런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은 ‘수평’적이고, 균형 잡힌 사람이었다.
“맞아요! 그 씬은 오히려 풀샷으로 너프하게 찍어볼까 합니다. 바스트로 찍어버리면 너무 강렬하죠. 조금 멀리서 점처럼 보이게 찍고 싶은데, 도 배우님 의견은 어떠세요?”
배우에게 프레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볼 수 있는 감독.
줏대 없는 이미지 보다는, 나를 ‘인정’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거기다.
“혹시 추천해 주실만한 배우 분 안 계십니까?”
캐스팅에 대해서도 먼저 의견을 묻는 ‘열린’ 감독이다.
내가 되물었다.
“아직 섭외가 안 끝났습니까?”
내 질문에 박진우 연출이 턱 끝을 매만졌다.
“음, 단역은 오디션을 준비 중인데, 조연급들은 연기력이 좀 되는 배우들 몇몇을 주위에서 추천받아서 현재 미팅 중에 있습니다. SAFA에 리스트가 있거든요. 독립영화계의 믿고 쓰는 배우 리스트랄까.”
“아.”
“하지만 생각보다 작업이 신통치 못합니다. 너무 비주얼이 강점인 배우들이 많은 터라… 제가 원하는 것은 다채로운 그림을 뽑아 낼 수 있는 독특한 개성파 배우인데 말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 없으십니까?”
“…..”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문성이 형이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명 있긴 합니다만,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조금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박진우 연출이 기대에 찬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배역 이름만 말씀해주시면 비워놓겠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지만. 내가 옆에서 그 성장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등에 달아줄 날개를 이용해, 나 역시 함께 날아올라야지.
[ 책 먹는 배우님 – 2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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