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4)
24.
강원도 평창의 A 스노우 밸리.
스키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던 나는 눈썰매를 타고 싶었지만, 금방 배울 수 있다는 소윤의 추천에 스키 장비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웬걸.
이거, 재밌다.
“오빠 운동신경 좋으신데요? 처음 타봤다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달리는 경주마라도 된 양, 나를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냐하하하!”
야야, 천천히 가자고.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과는 다르게 사람이 많았다. 2월 초. 방학에 대입을 앞둔 20대 초반의 젊은 남녀들 대부분이 스키장을 찾은 것.
그 틈에서 소윤은 마스크로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채,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꺄하하하!”
스키장이라 확실히 신분을 숨기기에 용이해 보인다.
미친 듯이 슬로프를 질주하는 저 작은 체구의 여자가, 아이돌그룹 에프터 픽시의 소윤인 것을 알게 된다면. 아마 이곳 전체가 난리 나겠지?
슈우욱!
박청아는 수준급의 스키 실력을 자랑하며 슬로프를 누볐고, 김균오는 오랜 모델 생활로 스키를 타 본 경험이 없다며, 소신껏 눈썰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철푸덕!
새하얀 눈밭에 쓰러지더니 내게 달려오며 소리 질렀다.
“칵칵칵칵! 재희 형! 이거 되게 잼써요!”
침까지 튀겨가며 엄청 즐거워 보인다.
어이, 고글에 침 튀긴다고.
오전 내내 눈밭에서 뒹굴다 들어선 리조트에는 뜨거운 그릴에 숯불의 향연이 펼쳐졌다.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소시지, 버섯, 캔 햄 따위와 소주 맥주병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식사하겠습니다!”
조연출의 외침을 시작으로, 장비를 정리하고 감독님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다들 얼굴이 새빨갛다.
젊은 배우들이야 스키를 탄다고 그런 것이지만 문병철 감독님이나 촬영감독님, 오미란 선배는 리조트에 짐을 풀자마자 술을 한껏 드셔서 그렇다.
문병철 감독을 알게 된 것은 고작 세달 남짓 이었지만, 그 어느 때 보다 표정이 밝아보였다.
“우리 배우들,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요. 내 잘 버텨줘서 너무 감사해.”
고생 많았지.
수정 대본 새로 외우랴, 촬영 늦어지는 건 다반사고. 하마터면 방송사고 날 뻔한 구간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비중이 올라가면서 촬영 속도가 좀 빨라졌지만, 그 전까지는 지옥의 끝자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래도 감독님이 제일 고생 많으셨죠. 대본 조율하시고, B팀 촬영까지 도맡다시피 하셨으니까요.”
드라마 촬영 팀은 A팀과 B팀, 보통 두 개의 팀으로 운영되는데, 두 팀이 동시에 촬영을 나가지 않는 이상 문병철 감독님은 모든 촬영을 직접 맡아서 진행했다.
성격은 조금 지랄 맞지만, 작품에 대한 엄청난 열의와 강철 같은 체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병철 감독이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재희 씨.”
“그나저나, 문교 씨가 못 와서 아쉬운데. 그래도 주연이었는데 말이야. 작품이 바쁘다고 했나?”
촬영감독님의 말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박찬익 팀장이 황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하하. 문교가 워낙 다음 작품 준비로 바빠서요. 불참해서 죄송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별 수 없지. 작품이 먼저지.”
“피식.”
그 때, 오미란 선배가 곁에서 조소를 머금었다.
“아이고, 그러세요?”
그리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죄다 까발리기 시작했다.
“문교 씨 아직 작품 안 들어간 거, 내 다 아는데 무슨. 박 팀장. 내 앞에서도 그렇게 말 할 거야?”
아이고.
일 났다.
오미란 선배.
L&K소속이지만, 송문교와의 접점은 전무한 그녀. 팀킬을 시전 하시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다.
오미란 선배님은 송문교를 떠올리면 열이 뻗치시는지 시뻘건 얼굴로 연신 투덜거리셨다.
“합평회는 마지막에 웃으면서 끝내자고 모이는 자린데 불참을 해? 아주 끝 까지 예의 없네. 회사 이미지 구기는 것도 유분수지. 지가 주연으로 한 게 뭐가 있어? 안 그래요 감독님?”
“예? 아아, 예. 이 자리가 불편했나 봅니다. 허허.”
“흥흥. 오히려 재희 군을 봐요. 영화 두 개나 들어가면서 합평회 참석한 거. 얼마나 기특해요? 그러니 문교 같은 애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재밌게 먹자고요.”
그리고는 소주를 종이컵 가득 따라 벌컥벌컥 넘기신다.
시원시원하긴 한데.
적당히 드세요. 얼굴 터질 것 같아요.
“크흠.”
촬영 감독님이 헛기침을 하셨고, 박찬익 팀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이고, 분위기 싸해지는 것 봐.
그 때 문병철 감독이 놀랐다는 듯 내게 물었다.
“재희 씨. 영화 들어가요?”
“아.. 네.”
“영화 좋지. 근데 이제 막 얼굴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는데, 영화 보다는 드라마가 낫지 않나? 영화는 개봉까지 시간 꽤 걸릴 텐데.”
현실적인 조언이다.
직접적으로 반응을 체크할 수 있는 연재소설 같은 드라마와는 다르게, 영화는 출간 된 양장본 소설과도 같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 까지는, 얼마나 팔릴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거기다 조금 끌어올린 내 인지도도, 영화촬영을 진행하는 공백 기간 동안 금세 수그러들지도 모른다.
“음, 그것도 그렇네요.”
내 대답과 동시에 문병철 감독이 말했다.
“그럼! 그러지 말고. 전에 내가 제안했던 대로 차기작이나 같이 준비하자고. ‘주연’으로.”
“….”
결국, 같이 드라마나 하자는 속셈이었던가.
넘어갈 뻔 했다.
감독님.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문병철 감독의 말에 곁에 있던 소윤이 펄쩍 뛰었다.
“헐! 주연이요? 감독님. 언제 그런 얘기 나누신 거예요? 저는 쏙! 빼놓고.”
“맞아요! 저도! 저 스케줄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독님!”
“흐흐흐”
싸늘해졌던 분위기가 금세 돌아왔다.
박청아가 내게 슬며시 물었다.
“저기 오빠. 영화 어떤 거 들어가세요?”
확실히 원래부터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관심이 남다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피셔>랑 [양치기 청년> 이라는 독립 영….”
“[피셔>요?”
박청아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에? 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박’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거 한만희 감독님 차기작이잖아요.”
“아, 네. 맞아요.”
“조승희 선배님 주연으로 나오는 작품. 기사 떴던데. 그거 오디션 했어요?”
“아… 네. 아마도?”
비공개 오디션이었으니, 공개 오디션이 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끝났겠지?
내 대답에 박청아가 시들시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그거 저도 하고 싶었는데.”
‘한만희’ 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이 라도 있는지, 주변 스텝들이 연신 호기심을 보였다.
“한만희? [한산도>에 그 한만희?”
“누구? 그 천만감독?”
드라마 팀들이 영화 팀에 대한 일종의 ‘로망’ 이 있다는 이야기를 조연출에게 들은 적이 있다.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그렇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영화에서 드라마로 넘어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했다.
“재희 씨. 한만희 감독 영화 들어가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조연으로…”
“이야! 성공했네. 재희 씨. 이러다 금방 뜨는 거 아니에요? 몸값 치솟기 전에 확실히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감독님?”
제작PD의 농담에 문병철 감독님이 결심이라도 선 듯, 제안했다.
“작품 같이 합시다!”
“….”
나는 이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멋쩍게 웃으며 재익이 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재익이 형은 영미 씨와 양 손 가득 등갈비를 들고 물어뜯고 있었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이봐, 좀 도와주지.
문병철 감독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재희 씨. 대답해요.”
“….”
아아, 조금 진정하세요.
아직 정해진 작품도 없으면서.
*
신사동의 어느 예쁜 카페에서 진행된 내 단독 인터뷰.
처음 해보는 단독 인터뷰였지만, 다행히 기사도 잘 뽑아져 나왔다.
[청춘열차>마지막 회가 끝남과 동시에 인터뷰 기사가 포털사이트 상단에 걸렸다. [도재희 “청춘열차 김도훈 役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마지막 회는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또 한 번 새 역사를 썼다.
시청률 11.6%
순간최고시청률은 13%를 넘겼다.
‘대작’ 이라고 칭하기엔 부족하지만, 동시간대 시청률 싸움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견고한 1위였고, 끝끝내 승자가 되었다.
마지막 회가 끝난 직후 나와 재익이 형, 그리고 영미 씨 셋이서 조촐하게 야식이라도 시켜 먹으려던 찰나, 문성이 형에게 연락이 왔다.
[드라마 종방 축하한다. 바쁘지? 언제 시간 괜찮냐?]“누구? 문성이? 이문성?”
“네.”
“당연히 기억하지. 근데, 지금 가려고?”
“네.”
“음, 가자. 문성이 얼굴도 오랜만에 볼 겸 내가 태워줄게. 영미 씨도 갈래?”
“에이, 제가 가서 뭐해요.”
“아냐, 가자. 어차피 영미 씨 집 잠실이잖아? 문성이네 곱창 집 천호동이라 안 했어?”
“… 저도 가도 돼요?”
뭐, 상관없겠지.
“다 같이 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문성이 형이 운영하는 천호동의 곱창 집을 찾았다. 화요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는 한산한 분위기였다.
카운터에서 정산하던 문성이 형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연예인이 이렇게 대놓고 다녀도 돼?”
“에이, 무슨 소리야. 아무도 못 알아보는데 뭘.”
“어라? 재익이 형님?”
“이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재익이 형과 문성이 형의 관계는, 내가 뜨기 전과 비슷하다. 누구보다 연기에 대한 재능이 있었지만, 스타의 자질이 부족했던 문성이 형이 회사를 떠난 것에 대해,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지금 당장 조금은 불편하지만, 선 하나만 넘으면 더 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런 관계.
“일단 앉으세요. 내가 기 막힌 요리로 대접할 테니까.”
“왜? 나가자.”
“응?”
“다음에 만나면 내가 크게 쏜다고 했잖아. 나가자.”
하지만 문성이 형이 손사래를 쳤다.
“야야, 나 그거 아껴둘 거다? 더 크게 성공하면 그 때 크게 쏴. 오늘은 여기까지 왔으니까 여기서 편하게 먹고.”
문성이 형은 아예 셔터를 내리고 직원들을 퇴근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괜찮겠어?”
“어차피 평일이라 손님도 없어. 괜찮아.”
음,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영업하다간 오래 못갈 것 같은데.
하지만 문성이 형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얼큰한 곱창전골과 모듬구이셋트가 나왔다. 8인용 테이블 가득한 안주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
“꺄!”
영미 씨가 즐거움의 비명을 내지르며 곱창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간단한 안부인사가 오가고, 주로 내 근황 얘기가 오고갔다. 드라마는 어땠고, 송문교는 여전하고, 영화 오디션을 최근에 보았으며, 독립영화에 들어갈 것 같고.
그러면서 나는 문성이 형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치기 청년>에는 문성이 형에게 어울리는 개성강한 역할이 존재했으니까. 추천해주고 싶었다.하지만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뭐라고.’
멀쩡히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며, 형의 인생에 헛바람을 집어넣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 재밌겠네.”
문성이 형의 얼굴은,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씩 승승장구하고 있는 내 모습이 부러운 듯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신세가 안타까운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제 성공하는 일만 남았구나.”
숨기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욕심’이 있었다.
내가 송문교에게 배역을 달라고 했을 때와 같은 상황.
나와는 다르게 혹시 자존심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자존심, 그깟 게 뭐라고.
나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운을 땠다.
“형이 TV에 나와서 연기하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내가 말했잖아. 우리 동기들 중에서 형만큼 연기하는 사람 없었다고.”
“그건 그렇지. 문성이가 연기는 곧잘 했지.”
재익이 형이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왔다.
아주 적합한 질문과 함께.
“근데, 문성이 너는 다시 연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야?”
문성이 형이 그런 재익이 형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술을 옴짝달싹. 어떻게 말해야 할지, 수 없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때, 내가 지나가듯 말했다.
“아무래도. 형 영업에는 소질 없어 보이는데.”
조금은 장난스럽게.
“나랑 같이 영화 안 할래?”
문성이 형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형도. 나도.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문성이 형은 어색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흠.”
그 때, 곱창집 한 구석에 비치된 TV에서는 [청춘열차> 종방 특집으로, 방송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리뷰 코너가 흘러나왔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곱창집 내부.
[스타 인사이드> 리포터의 멘트가 폐부를 찌르듯, 날카롭게 꽂혀왔다.– 청춘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 젊은이들의 현실을 대변했던 드라마. [청춘열차>. 2018년 올 한해. 청춘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훌륭한 여행을 한 번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문성이 형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 해볼까?”
기 막힌 타이밍이다.
[ 책 먹는 배우님 – 2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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