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5)
25.
곱창 먹는 것에 열중하던 영미 씨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우리들의 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영화감독이라도 된 듯 손가락으로 口 모양을 만들어 문성이 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엇.”
문성이 형의 당황스런 리액션은 덤.
관찰을 마친 영미 씨가 이내 짤막하게 평했다.
“칙칙한 그런 옷은 벗어던지고, 차라리 분홍 계열이나 좀 샛노랑 계열로 입고 다녀 봐요. 우중충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어리숙하면서도 친숙한 이미지가 생길 것 같은데. 세이무어 호프먼 같은.”
나와 재익이 형이 동시에 눈을 맞추었다.
지금 뭘 들은 거야?
“영미 씨. 지금 생판 처음 보는 남에게 조언을 해준 거야?”
“그럼 안돼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영미 씨 생각보다 다정한 여자였구나.”
재익이 형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새겨듣고 있는 문성이 형에게 말했다.
“영미 씨가 좀 무뚝뚝해 보여도 이 방면은 프로야. 한 번 믿어봐.”
“아….”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붙어 본 적 없는 문성이 형.
아마 이 자리가 끝나면, 바로 옷을 주문하지 않을까.
알록달록 무지개 색 맨투맨들로.
내가 [양치기 청년> 대본을 흡수 하고, 문성이 형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배역의 이름은 ‘마동철.’
주인공 ‘허영탁’의 친구이자 삼류 양아치 패거리의 일원으로 멍청하지만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개성강한 캐릭터다.
영미 씨 말 대로 형형색색의 유치한 무늬가 그려진 맨투맨을 입고 어딘가 어수룩한 양아치를 연기할 문성이 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울린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질 만큼.
“일단 형 프로필 있으면 나한테 보내줄래? 박진우 연출한테 보내줘야 할 것 같아서.”
“알았어. 근데… 오디션도 준비해야 하나?”
“음, 그건 모르겠네. 혹시 모르니까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알았어.”
오디션이라는 말에 긴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문성이 형은 조금 단단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고맙다. 재희야.”
나는 오글거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이 싫어 고개를 부르르 떨며 콧등을 긁적였다.
“됐어”
내가 정말 힘들 때, 형이 소주 한잔 사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도 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고맙지.”
당장 문성이 형이 전업 배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드라마 촬영처럼 회차가 많아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천호동에서 곱창 집을 운영하며, 촬영이 있는 날에는 매니저도 없이 직접 운전해 촬영장에 와 촬영을 하고, 없는 날은 그의 일상을 살겠지.
그리고 어쩌다, ‘빛’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본인 스스로가 선택할 것이다.
아, 연기를 계속 해야겠다.
돌아갈 곳 없는 신인의 조급함을 벗어나, 오히려 현장과 떨어져 살며 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 방법이 문성이 형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그토록 갖길 원하던 ‘기회’를 제안했을 뿐이다.
*
독립영화에서나 왕 노릇이지.
여기서는 쥐뿔도 없다.
“먼저 올라가 있어, 나는 볼일 좀 보고 들어갈 테니까.”
“무슨 볼일이요?”
[피셔>의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다.주연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사 사무실을 찾았건만, 회사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재익이 형이 법인 카드를 꺼내들었다.
“마음은 가볍게, 양손은 무겁게. 금방 따라갈게.”
나 먼저 영화사 동방불패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 내부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구를 가득채운 매니저들부터, 천만 감독의 차기작을 취재하러 온 소수의 기자들까지.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자들이 나를 두고 술렁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도재희 잖아. [청춘열차>”
매니저들 틈 사이에서 박찬익 팀장이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어, 여기.”
“아, 먼저 와계셨네요?”
“그럼 당연하지. 여기 인사해. 이쪽은 스타매거진의 오채연 기자. 우리 L&K 출입기자고 종종 현장 따라다니면서 기사 써줄 거야.”
여리여리한 체구.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 기다란 머리는 뒤로 질끈 묶은 채,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오채연 기자.
그녀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스타매거진 오채연입니다.”
“아, 도재희입니다.”
오채연이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청춘열차> 잘 봤어요. 연기 너무 잘하시던데. 슬슬 활동을 시작하시는 것 같은데 다른 영화도 들어가신다면서요?”
“아, 네.”
“공식 기사 나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언제 시간 내서 천천히 얘기나 나눠볼까요?”
첫 인상은 굉장히 도도해 보이는 여성이라는 것 정도.
사무적인 목소리에서, 욕심이 느껴지는 정도.
나는 박찬익 팀장을 바라보았다. 박찬익 팀장은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해보였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좋아요.”
그러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L&K 출입 기자라면 어쨌든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터였다.
“만남이 기대되네요.”
“….”
저돌적인 타입 인가. 단독 기사를 향한 욕망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인걸.
“그럼 들어가 봐.”
덜컥.
리딩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긴 8인용 테이블이 겹겹이 붙어있고, 그곳에는 배우들 몇몇이 듬성듬성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대부분 얼굴을 모르는 단역배우들이었다. 아직 주조연급 배우들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내 자리에 앉았다.
‘망고 役 도재희’
대본과 함께 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배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크린과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작(多作)하기로 유명한 임명한 선생님을 필두로 수많은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하던 40대 선배님들이 뒤 따라 들어섰고.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나와 같은 날에 비공개 오디션을 치렀던, 눈에 익은 조연들까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만큼 ‘진짜 배우’들의 등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인배우 도재희 입니다!”
나는 선배님들이 들어올 때 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어어. 그래요. 반가워요.”
형식적인 인사말이 전부였다.
미니시리즈의 타겟은 확고하다.
20,30대 여성 위주에게 ‘잠시’ 인기몰이를 했던 내 인지도의 명백한 한계.
TV를 보는 것 보다, 카메라 앞이 익숙한 선배님들에게는 나는 그저 햇병아리일 뿐이다.
나는 기회가 오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테이블이 점점 채워지더니, 마지막에는 한만희 감독과 조승희, 그리고 특수 검사 역할의 임강백이 커피를 손에 든 채 들어섰다.
“아이고, 늦었습니다.”
“어이! 우리 한 감독님, 이거 너무 오랜만에 불러주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
“선생님이 제 영화에 출연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뭘, 한 감독 영화라면 무조건 찍어야지. 잘 부탁합니다. 감독님?”
“하하하”
한만희 감독과 안면이 있는 선배님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들에게는 고작 오디션으로 합격한 신인배우일 뿐이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매니저 몇몇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저마다 박스를 하나 씩 들고 있었는데, 물과 대본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테이블 위에 자신들이 준비한 간단한 과자며, 떡, 사탕, 음료 등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십시오.”
“저희 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역시, 한만희 감독이 나타나기 만을 기다리며 준비했던 철저한 ‘보여주기’였다.
그 중에는 떡을 돌리는 재익이 형도 있었는데.
재미난 일이 일어났다.
“재희 씨? 도재희가 누굽니까?”
임명한 선생님이 난데없이 떡을 들어 올리며 내 이름을 호명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반갑습니다. 선생님. 신인배우 도재희라고 합니다.”
연기 경력만 30년이 훌쩍 넘어가는 원로배우.
임명한 선생님은 그저 나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지만, 혁혁한 무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금세 인자한 얼굴로 변하며 말했다.
“아아. 망고 역할로 출연하는 모양이네요. 잘 어울리네. 떡 잘 먹을게요.”
그리고는 떡을 들어 올리며 흥미로운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 응? 떡?
나는 내 앞에 놓인 떡을 들어올렸다.
떡에는.
[망고 역할을 맡은 신인배우 도재희 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이런 문구와 함께 내 캐리커쳐가 붙어있었다.
아, 이런 건 또 언제 준비 한 거야.
나는 재익이 형 쪽을 바라보았다. 구석의 낡아빠진 의자에 앉아 잠자코 무릎위에 올려놓고 내게 엄지를 들어올렸다.
나 역시 미소를 띈 얼굴로 화답했다.
형, 고마워.
그런데, 이 작은 패스가 장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중요한 스루패스가 되어 돌아왔다.
화두에 오른 내 이름을 용케 기억하고 있던 조승희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친구, 오디션 볼 때 제가 옆에 있었는데. 연기 재밌게 잘해요.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신인 배우에게는 더 없는 칭찬이었다.
거기다 한만희 감독도, 그제야 내 얼굴이 기억난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얼마 전에 끝난, 그… 드라마에 출연했던 친구 맞죠? L&K에.”
“네. [청춘열차>입니다.”
“아, 그래 그거. 그래요… 오늘 잘 부탁합니다.”
“네!”
약소하지만, 이만하면 더 없이 훌륭하지 않은가.
젊은 단역 배우들이 [청춘열차>라는 단어에 반응하며 내 얼굴을 주시했고, 선배님들은 저마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내게 던졌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그리고 조승희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치명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감사합니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여유로웠다.
영화 시나리오는 대사보다 지문이 많기 때문에, 빨리 읽어봐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드라마 리딩 현장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한만희 감독과 임명한 선생님을 중심으로 조승희와 임강백이 한 마디씩 곁들이며 분위기가 이어졌다.
‘리딩’ 보다는, 다과회 같은 분위기.
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이 분위기에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였다.
딱, 한 마디에 분위기가 일순간 바뀌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읽어 볼까요?”
한만희 감독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
분위기 전체가 180도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현장이 주는 기백 자체가 [청춘열차> 때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눈빛, 호흡, 몰입도 그 누구도 흐트러짐이 없고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모두들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리딩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 배우들은, 온 몸으로 자신이 준비해온 배역을 ‘뿜어’내고 있었다.
“씬 1. 인천항 부두. 검은 바다가 일렁이고 스산함이 불어오는 늦은 새벽. 간혹 들려오는 먼 뱃고동 소리. 불빛하나 없는 컨테이너 사이를 걷는 남자의 뒷모습. 카메라 돌아가고- 자. 여기서 패닝(Panning 좌우로 카메라를 돌리는 행위) 들어갑니다. 남자, 이내 멈춰 선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여유로운 얼굴로.”
“나와.”
조승희의 대사를 시작으로- 찰칵 찰칵, 조용한 적막에 카메라 셔터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조승희의 집중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사부.’”
“언제 도착했어?”
“아, 지금 막. 사부는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거야?”
임명한 선생님과 조승희가 맞붙었다. 보이지 않는 기(氣)라도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
그리고 ‘피셔’ 일당의 조연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어이. 왔어?”
“이야, 얼굴 까먹겠네.”
안정적이다. 그 누구하나 튀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맞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
거장과 대배우 앞에서 선보이는 첫 연기.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아이, 대장. 지금이 대체 몇 신데 이제 오는 거야?”
장내 가득 퍼져있는, 동료 배우들의 호흡을 마시고.
나는 한 템포를 더 끌어올리며 말했다.
“기다리느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시작이다.
[ 책 먹는 배우님 – 2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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