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6)
26.
기류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만희 감독이 내 쪽을 주시 했고, 임명한 선생님은 흡족한 듯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셨다.
주변 배우들이 나를 궁금해하는 모습이 곁눈질로 느껴질 정도.
아직은 딱, 그 정도만.
조승희는 내가 당긴 템포를 그대로 받으며 대사를 이어나갔다.
“작업 들어갈 준비들 해.”
그는 연기의 달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화술을 구사했으며, 상대방 호흡을 가져오는 센스는 그야말로 어떤 ‘경지’에 이른 듯 보이기도 했다.
“모두 내가 정한다. 타겟, 배우섭외, 방법, 도주로. 모두 다.”
대사도, 리딩도.
[피셔> 자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결국, 조승희였다.하지만 누구에게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아니면 조승희 앞에서 잘 보이고 싶었는지.
마치 불이라도 붙듯 조연들의 리딩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내가 말했잖아! 나는 아니라고! 정말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입 닥쳐! 니네 한패인 거, 내 다 아는데 발뺌하면 모를 줄 알아!”
연기 배틀이라도 하듯, 너나 할 것 없이 열연을 선보이며 장내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마치, ‘내가 더 잘해!’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흥분한 배우들에 덩달아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점점 잦아졌고, 배우들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침을 튀겼다.
하지만 고조된 열기에 반해, 리딩 현장은 매끄럽지 못했다.
“잠시만. 끊고 갈게요.”
자신이 컷을 따먹어야 하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 준비가 부족한 배우들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어차피, 그 놈 못잡으면 누군가는 피 보는 거지 않습니까. 차라리 제가… 아, 다시 할게요.”
조각과도 같은 꽃 미모를 자랑하던 임강백은 30대 후반이 되어서도 그 외모는 여전했지만, 오히려 연기력은 감퇴된 듯 보였다.
개성강한 배우들이 대거 몰려있는 ‘피셔 일당’들 에게서는.
“과해요. 감정 조금 줄여요.”
오히려 ‘투머치’한 연기가 많았다.
“너무 과한데. 옆에서 그렇게 울어버리면 주연 다 죽겠어요. 볼륨 좀 줄여요.”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가 점점 두 사람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조승희와 임명한.
“어지간히 설쳐야 윗사람들도 찌른 돈 받아먹고 예뻐하는 법이지. 개새끼가 자꾸 고개를 쳐들면 복날 개 잡듯이 끌려가는 수가 있다”
“그 개새끼 몸집이 너무 커져서, 주는 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걸 어떻게.”
마치, 늙은 용과 저돌적인 호랑이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조연들이 제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 이 둘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황망히 바라만 볼 뿐.
“대박.”
속으로 감탄만 연신 뱉으면서.
그리고 난.
그 틈에서 미세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 그게… 죄,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라.. 반도체요.”
조용히 ‘망고’가 가진 매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것.
극 중에서 남을 속이는 ‘배우’ 이자 ‘미끼’역할을 하는 망고는 다양한 매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제가 어디 자해공갈이나 하는 양아치로 보이십니까? 멀쩡한 대학생이라고요. 자, 보세요. 서울대학교 과복. 보여요? 그것도 법과대학이라고.”
나는 회사원, 대학생, 자해를 위장한 보험사기꾼. 여러 배역들을 오가며 묵묵하게 내 맡은 대사를 소화했다.
하이라이트 씬. 중국에서 붙잡히며 바닥에 머리를 쳐 박고 욕지기를 뱉는 장면에서는.
“이런 개에에에에새끼! 감히 날 버리고 도망을 쳐어! 뒤지고 싶지이!”
이마에 핏줄이 돋아날 만큼 몰입을 해버렸고, 임명한 선생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저 친구 재밌네.”
“그렇죠? 제가 말했잖아요 선생님.”
“드라마 뭐 했다고?”
[양치기 청년>에 비해 [피셔>를 준비하는 과정은 노력과 연구가 필요했다.대본에 ‘망고’에 대한 캐릭터 설명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아, 한만희 감독이 집필했던 당시 머릿속에 떠도는 정보들을 하나로 취합해내는 과정이 어려웠다.
그래서 오히려 한만희 감독이 디자인 한 ‘망고’에 대한 연기를, 내 의지대로 보다 더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결국, 망고도 누군가를 연기하는 인물이니까.
조금 더 만화 같이. 어디서 보기 힘든 캐릭터로.
그리고, 이 방법은 주효했다.
“아, 좋은데요? 다음 씬!”
한만희 감독이 글을 쓰면서 상상했던 ‘망고’의 모습.
그 모습과 최대한 가까우면서도 내 오리지날리티가 남아있는 캐릭터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한만희 감독은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리딩은 종장에 이르렀다.
“마지막 씬. 피셔가 빼돌린 돈 다발 들이 부둣가 모래사장 위에 휘날린다. 동시에 CG로 스크린에 총 피해금액 카운트 되면서, 허망한 피셔의 얼굴, 타이트 바스트. 경찰차 사이렌이 울려퍼지고, 손목에는 수갑이 덩그러니. 라스트 컷 하늘로 틸업 되면서, 페이드 아웃. 엔딩 크레딧.”
장장 2시간 가까이 치러진 대본 한권 짜리 리딩. 한만희 감독의 디렉팅이 중간 중간 들어가서 더욱 늦어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만하면 평화롭게 끝난 셈이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휴우-!”
한만희 감독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생들 하셨으니까 10분만 쉬었다 다시 모일게요.”
리딩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배우들이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지게 몸을 풀었다. 다들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만큼은 좋았다.
“재밌는데?”
“그렇죠? 대사들이 은근히 입에 붙지 않아요?”
전체적인 반응은 딱 세 가지였다.
첫째. [피셔>의 시나리오. 텍스트가 지닌 힘에 비해 의외로 재밌다.
둘째. 명불허전, 임명한 조승희. 자타공인 연기 신들과 함께한 리딩.
“연기 정말 잘하시지 않아? 독백 하실 때는 소름이 쫙 돋았다니까?”
“내가 임명한 선생님이랑 같은 작품에 출연하다니.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리고.
“도재희 라고 있어요. 생각보다 너무 잘하는데요?”
구석에서 어느 여기자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 나와 인사를 나누었던 오채연 기자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전혀 기죽지도 않고 대사도 완벽하게 외워서 하더라고요 연기도 확실하… 아, 잠시 만요. 나가서 받을게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됨을 느끼자, 곧 바로 리딩실을 빠져나가버렸다.
마지막 셋째. 나.
임명한, 조승희 사이에서 그 존재감을 비집고 올라온 배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지만, 누구지? 라는 다수의 의문을 끌고 다녔던 신인.
질투, 호기심, 경계. 다양한 시선들이 뒤섞이며 내게 꽂혔고 내 이름이 일순간 화두에 올랐다.
그리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게 말을 건 남자.
“아, 저기.”
나와 같은 ‘피셔 일당’ 중 ‘메기’ 역할을 맡은 배명우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재희 씨라고 했나요?”
“네.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배명우.
30대 후반의 코믹전문 배우.
“아아 그럼 그럴까요? 자주 보게 될테니까. 그래요. 연기 재밌게 잘하던데. 학교는 어디나왔어요? 아, 참. 연기전공?”
“아, 저는 가양대 나왔습니다.”
연극영화과는 지방에도 강세인 학교가 존재하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는 딱 ‘이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방 사립 대학교.
“가양대? 아, 거기 수원에 있던가?”
“네.”
“신기하네. 그 학교 출신 이 바닥에서 흔치 않은데.”
내 학교 동기들 중,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 선배들 중 앞서나가 길을 닦아놓은 선배도 없을뿐더러,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친구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기를 그만두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난 명성예대 나왔거든.”
영화감독, 배우, 작가, 가수. 직종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연예인들을 배출한 명문 예술대학.
연예계에 라인이 있다면, 가장 잡기 쉬운 황금 동아줄.
초면에 다짜고짜 학벌을 물어온다면, 이 정도 자부심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다.
명성예대는 얼굴보고 뽑는다는 소리가 있을 만큼, 선남선녀가 모이는 곳인데.
나는 배명우를 훑어보았다.
170cm가 안 되는 작은 키에, 험상궂게 생긴 인상파 배우.
아무리 봐도, 명성예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데?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무시하듯, 그가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어보였다.
“알지? 우리 학교 비주얼 좋은거? 비주얼 보고, 나는 우리 학교 후배인 줄 알았지.”
“….”
아, 그러세요.
배명우가 물었다.
“담배는 피나?”
*
조금 잘난 척 하는 것을 제외하고, 배명우는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실은 전작 끝내고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
무명 시간도 길었고, 굴곡있는 배우 인생을 살았던 배명우.
그의 치명적인 단점은, 하나의 색 뿐인 단색 배우라는 것이다. 정형화된 코미디 연기. 매번 똑같은 연기에, 비슷한 배역만 소화하는 배우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강점에는 완벽하게 특화되어 있어 줄곧 작품 콜은 들어오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도 요즘 같이 일 끊이지 않고 들어오면, 이미지 변신 안해도 살 만해.”
어찌되었건, 조승희를 제외한 ‘피셔 일당’ 중 가장 유명한 배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재희 씨는 어때? 하고 있는 작품은 있고?”
“얼마 전에 드라마 한 작품 끝냈습니다.”
“그 미니시리즈? 이야, 고생했겠네. 나는 드라마는 도저히 못하겠어. 힘들잖아. 그거 어떻게 해?”
배우가 드라마보다 영화를 선호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드라마는 힘들기 때문이다.
“난 영화가 좋아. 드라마는 못해.”
120분 러닝 타임을 세세하고 심도 있게 찍는 영화가 ‘수공예품’이라면, 드라마는 아무래도 허겁지겁 라이브 스케줄로 찍어내는 냄새가 강하게 나니까.
“올라갈까?”
배명우는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금세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끼익-
흡연장으로 쓰이는 실내 건물 베란다의 문이 열리며, 한만희 감독과 임명한 선생님. 그리고 조승희에 임강백까지. 줄줄이 베란다 안으로 들어선 것.
“아이고, 감독님.”
배명우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냈다.
그에 반해 나는 인사만하고 잠자코 베란다를 나서려고 했지만, 조승희가 난데없이 내게 손을 들어올렸다.
‘응?’
내가 머뭇거리자, 조승희가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마치, 하이파이브라도 하라는 듯.
내가 어색하게 손을 가져다 대자, 조승희는 내 손뼉을 짝! 치고는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어디가? 담배 피러 나온 거 아냐?”
“아, 폈습니다. 선배님.”
“형이라 부르라니까.”
“… 네, 형님.”
내가 귀여워 보였는지 조승희는 큭큭 거리며 내 팔을 놓아주었다.
“이거 피고 같이 들어가자.”
“… 아, 예.”
조승희가 내 등을 툭, 두드리며 말했다.
“기죽지 마. 왜 이렇게 얼어있냐?”
딱히 기가 죽은 것은 아니다. 감독님과 대선배님 앞에서 연기 외적인 부분으로 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하고 있을 뿐.
하지만 거칠 것이 없는 탑 스타에게는 내 모습이 기죽은 강아지처럼 보인 모양이다.
“기죽을 필요 없어. 배우가 연기 잘하면 그 놈이 형이지. 안 그래요 감독님?”
한만희 감독이 나를 바라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망고가 쉬운 역할이 아니거든. 그런데 아주 제대로 살려줬어.”
“들었지? 그러니 허리 펴고 편하게 담배 펴도 돼.”
조승희가 내게 담배 한 대를 건네주었다.
피웠다 끊었다를 반복하는 담배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빼고 싶지는 않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맛은 약간 쌉싸름한 멘솔 향이었는데, 불을 붙히려다 따가운 조승희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너 오늘 스케줄 괜찮아?”
조승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예? 아, 네. 괜찮습니다.”
“그래?”
내 대답에 조승희가 담배를 쭈욱 들이키고는 재떨이에 비벼끄며 말했다.
“감독님. 오늘 회식 어떻습니까?”
느닷없는 조승희의 회식 제안.
“회식? 회식은 따로 날짜 잡으려고 했는데… 오늘이요?”
그러자 조승희가 내 쪽을 흘기며 말했다.
“예.”
… 나 때문인가?
“뭐, 나야 괜찮은데… 승희 씨 스케줄은 괜찮고?”
“저 요새 백수 아닙니까. 하하. 슬슬 저녁 시간도 되었겠다, 다들 모여서 인사라도 할 겸. 미룰 필요 없지 않을까요? 제가 쏘겠습니다.”
“응? 좋지 그럼. 선생님은 괜찮으십니까?”
“아, 나야 한 감독이 가면 따라가야지. 배우는 감독이 가자면 가는 사람이 아닌가?”
“아이고 선생님. 제발 그런 농담 하지 마십시오. 강백 씨는 어때요?”
“괜찮습니다.”
덜컥 이 자리에서 회식이 잡혀버렸다.
조승희가 내게 말했다.
“참석 할 거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이 사람 왜 이래.
[ 책 먹는 배우님 – 2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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