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7)
27.
사실 나만하더라도 예전처럼 평범하게 거리에 나설 수 없다. 소수긴 하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존재했고.
“도재희다!”
아주 가끔, 별 생각 없이 찾은 편의점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들을 마주해 곤란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헌데, 스타 군단이나 다름없는 [피셔>팀이 홍대 거리에 나타나면 어떨까.
조승희야 두 말할 것도 없고, 임강백도 십년 전부터 대한민국 몇 대 얼짱으로 손꼽히며 미남 배우로 이름을 떨친 배우.
모르긴 몰라도 길거리에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들이 상당할 것이다.
나는 당연히 회식자리는 사람 많은 홍대를 벗어나 외곽으로 빠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가.
도착한 곳은 동방불패 사무실에서 멀지않은 마포구 동교동 중심에 위치한 조그만 상가 횟집.
하지만, 생각보다 안전한 구조로 되어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니, 횟집이 있는 3층까지 그대로 직행.
오히려, 사람들을 마주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햇병아리인 나뿐인 듯 했다.
“이 집 물회가 기가 막히다고!”
조승희나 임강백은 매번 있어왔던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
비싼 임대료를 피해 3층에 지어진 횟집에 손님이 많겠냐 만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한만희 감독님이 자주 찾던 횟집이라 저녁시간 전체 대관을 했다고 한다.
횟집 사장님은 신난다는 얼굴로 서비스라며 이것저것 테이블에 올려주셨다.
“호홋! 승희 씨네? 거기다, 저기 잘생긴 청년은 드라마에서 본 청년이고.”
40대의 주인 아주머니도 나를 알아보셨다.
확실히, 미니시리즈는 여자들에게 먹히는 장르다.
“아이고 사장님. 장사는 좀 어때요?”
“감독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저희야 맨날 거기서 거기죠.”
“그래서 이렇게 팔아드리려고 왔습니다. 하하!”
한만희 감독의 추천은 정확했다.
접시에 회가 가득 담겨있는 것이 벌써부터 ‘다 퍼주겠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양념게장에, 가리비, 키조개까지. 양푼에 담겨진 초무침 물회는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일 정도.
“자자! 다들 오늘 고생 많았고. 일단은 편하게 마십시다!”
나는 한만희 감독님을 포함한 주연급 테이블 바로 옆 테이블에 배명우와 함께 앉았는데, 우연인지 조승희가 내 바로 옆 자리였다.
“많이 먹어라.”
조승희는 한만희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잠시 이야기가 멈추면, 내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고.
“이것도 먹어.”
팔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산 낙지도 슬쩍 내 앞에 밀어 넣어 준다. 티가 날 정도로 유독 ‘나’만 챙겨준다.
“….”
사실 이쯤 되면,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순수한 의심마저 들 정도.
이봐요, 분명히 말해두는데 난 쪽에는 관심 없다고.
“으흣?”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배명우는 알 것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후배님이 승희 씨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네.”
“예?”
배명우는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다.
“승희 씨 결벽증 있는 거 모르지?”
결벽증?
“더러운 거 싫어하는, 그거요?”
“아니. 저 사람 연기 결벽증이야. 그리고 그게 승희 씨를 지금의 위치로 만들어 줬지.”
“연기 결벽증?”
“그래. 저 사람, 일상에서는 가끔 허술해보여도 카메라 앞에서는 엄청난 완벽 주의자야. 자기 연기에 대해서 깐깐한 것은 기본이고, 상대배우 연기도 엄청 신경 쓰거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다시 찍자고 말해.”
아, 피곤한 사람인가.
“사실 좀 무례하기도 하잖아. 제 아무리 주연이라도 감독도 아닌 같은 배우가 디렉팅 한다는 게. 그래서 붙은 별명이 연기 결벽증.”
캐릭터가 잡힌다.
그런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승희 씨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 잘 생긴 사람도 아니고. 딱 연기 잘하는 배우야. 배우의 기본은 연기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연기 잘하는 사람.
연기 잘하는 배우가 선후배 막론하고 ‘갑’이라고 말하던 그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오나 했더니, 원래 성격이다.
대충 알 것도 같다.
리딩 때, 내 나름대로 존재감을 뽐냈으니 조승희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말이다.
“그래도 승희 씨가 촬영 외적인 부분에서 성격은 좋잖아. 잘 웃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남자답고. 그러니까 연기 결벽증이니, 완벽주의자니 이런 얘기가 밖으로 안도는 거고. 단점 축에도 못 끼지.”
좋은 사람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 조금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재밌는 거 하나 더 알려줄까?”
“뭔데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승희 씨가 좋아하는 배우들로 구성된 어떤 사모임이 있거든? 일명 조승희 ‘라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거기 소속 되어있는 사람들이 누군 줄 알아?”
조승희 라인? 사모임?
연예계에 사모임이 많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모르겠다. 감도 안 온다.
“곽철, 황미영, 유아름, 민주용, 주태호.”
“….”
알게 모르게, 헛숨이 튀어나왔다.
열거 된 배우들 모두, 연기파 배우로 이름이 자자한 20,30대 스타배우들이다.
조승희 만큼 거물은 아니지만, 요즘 영화계를 책임지고 있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1등급 스타들.
슬슬 얼개가 맞춰지기 시작한다.
원피스의 루피 대사와 함께.
‘너, 내 동료가 되라.’
조승희가 회식이라는 핑계로 나를 자신의 옆 자리에 앉혀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전반적으로 앞으로 진행될 촬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회식 자리.
술잔도 함께 오가며 배우 스텝의 경계가 허물어지자, 너도나도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인사를 나누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조승희는 이제 아예 내 쪽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재희야. 형이랑 다음에 어디 좀 가자.”
“어디요?”
“다음에 알려줄게.”
조승희가 미묘한 웃음과 함께 잔을 들어 올렸다.
“한 잔 하자.”
*
조승희의 개인 연락처가 내 휴대폰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회식자리가 끝날 무렵, 오직 내 연락처만 물어봤으니까.
“그렇다니까! 재희 바라보는 조승희 눈에서 완전 하트가 나왔다니까?”
재익이 형이 회사 안에서 소문을 퍼뜨린 것도 쉽게 예상되는 전개.
조승희X도재희.
L&K 직원들이라면, 환장할 소식이다.
“조승희 라인이라고? 그거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어?”
“존재하지 그럼. 곽철, 유아름, 주태호, 조승희. 다 같이 모여 있는 거 파파라치한테 찍힌 사진도 있는데. 인터넷에 치면 다 나와.”
“와, 대박이네? 그럼 이제 재희 작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투자자를 물어오는 조승희가 어지간한 배역은 물어다 줄 것이라는 설레발.
“이야, 역시! 인생은 한 방이야. 그치?”
“이거 오히려 우리 쪽에서 기사로 흘리는 거 어때? 조승희면 연예가 가십거리로 입소문 타기 딱 좋지 않아?”
조승희의 눈에 띄었으니, 배우 인생이 폈다는 호들갑들.
이 단적인 관심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물론, 나를 향하는 시선들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사무실에 있던 송문교와 눈이 마주쳤다.
송문교는 최근,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 방송국에 얼굴 도장을 찍는 중이라고 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조승희’ 라는 이름이 내 이름과 함께 들려오자 놀랍다는 눈빛. 그리고 짧은 순간 스쳐지나간 ‘질투심’을 감추려고 애쓰는 불편한 표정.
하지만 그다지 시원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직 내 이름 앞에 붙은 ‘조승희’라는 권력이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진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카메라 앞에서 슛 사인이 떨어진 다음 일이다.
영화라는 뚜껑이 열려야지만.
진짜 내 ‘힘’이 생긴다.
나는 그 날 까지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도 확신한다.
*
영화 촬영과 드라마 촬영의 차이는, 뭐랄까.
더치커피와 믹스커피의 차이랄까.
[피셔> 크랭크업.첫 촬영이 있는 날.
재익이 형에게 스케줄 표를 받아든 나는 너무 놀라 눈을 비볐다.
“이게 전부예요?”
“응.”
고작 2씬.
드라마 촬영 때 하루에 15개에서 20개의 씬을 소화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고작 두 씬.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촬영.
“적지? 그래도 더 못 찍어. 그거 찍고 나면 하루 끝날 걸?”
그래, 영화니까.
연출이 풀샷 찍어주세요, 라고 말하면 8할 이상은 촬영감독이 구도를 잡던 드라마와는 달리.
연출과 촬영감독 모두, 한 컷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줄지 의견의 합의점을 찾는다. 그 의견이 틀어진다면, 편집 때 골라내기 위해 두 버전 모두 촬영한다.
배우가 마음에 안 들어도 다시, 감독이 마음에 안들어도 다시. 끝없는 다시! 다시! 다시!
반복되는 재촬영에 지칠 때 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 떼 씬(4인 이상이 나오는 복잡한 장면)이라 딸 것도 많고, 아마 밤새야 할 거다.”
오늘 찍을 장면은 인천항 부두에서 ‘피셔’를 기다리는 ‘피셔 일당’들과 ‘사부’의 장면. 오프닝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 관객의 육감을 자극하는 프롤로그 부분이라 더욱 신경 써서 촬영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저녁 여섯시 콜 타임에 맞춰 인천 동구의 화수부두를 찾았다.
옛 시골 부둣가의 정겨움이 남아있는 따뜻한 시골 길이었지만, 어둠이 깔리니 분위기가 스산해진다.
가로등도 없고, 불빛도 없다. 일렁이는 검은 바다와, 잿빛 아스팔트 바닥이 전부.
분위기는 딱 좋았지만, 지문에 쓰여 있던 ‘컨테이너’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나는 회식 때 얼굴을 익힌 조연출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아! 망고. 오셨어요?”
“네. 그런데 컨테이너가 없네요?”
“후후. 곧 생깁니다.”
알쏭달쏭한 말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대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없는 곳을 찾은 것이다. 사다리차가 동원될 수 있는 여유 있는 공간을 섭외해 라이트 셋팅을 원활하게 한 뒤, 십수 대의 화물트럭에 컨테이너를 실고 설치를 시작한 것.
거기다 CG를 위해 준비된 크로마용 가베 천은 부두 바닥 전체를 덮을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드라마와 비교해 보면, 역대급 스케일이라고 부를 정도.
“대단하네요.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영화 세트. 수십 명의 스텝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다.
“오빠! 의상 입으실 게요!”
차에서 영미 씨가 골라준 의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자주색 정장에 갈색 로퍼. 머리는 포마드로 말아 올려 날티를 더욱 강조했다.
발걸음부터 망고의 ‘양’스러움이 묻어나는 듯 했지만, 현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임명한 선생님과 마주쳐, 나는 곧 바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어어, 재희 군.”
내가 꾸벅 인사를 건네자, 임명한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셨다.
선생님은 일렁이는 검은 바다를 보고 계셨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추운데 안에서 기다리시지 왜 나와 계십니까?”
그러자 임명한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씀하셨다.
“이것도 세트의 일부니까, 이렇게 밖에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 스텝들이랑 같이 호흡하는 거지. 혼자 쉴 수는 없지 않나?”
“… 아.”
배우도 세트의 일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이 조금 진지해지자, 임명한 선생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음흐흐. 아냐. 아냐. 농담이야. 나 혼자 쉬기 눈치 보여서 나왔지 뭘.”
뭐가 진심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앞의 말이 진심처럼 느껴지는데.
천만 감독도 한 수 접고 가는 데뷔 30년이 넘은 원로 배우에게, 누가 감히 눈치를 주겠는가. 진지한 분위기를 일부러 피하시는 느낌이다.
그때, 임명한 선생님이 물었다.
“자네, 배우 오래하고 싶지?”
“네. 선생님.”
“차를 멀리해. 그럼 오래가.”
“….”
아무래도 후자가 진심인 모양이다.
“흐흐흐, 가지.”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농담 삼아 던진 한 마디에 내가 무엇인가 느꼈다는 것이 중요하지.
짧지만,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된 말보다 더 강렬한 수업이었다.
차를 멀리해라, 결국.
잘난 배우 하나가 작품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밖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스텝들이 없다면, 추위에 고생하고 있는 이들이 없다면 배우도 없다는 말.
나는 임명한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숨어있는 바다냄새가 코를 어지럽힌다. 현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컨테이너를 내리는 덜컹거리는 소음, 연출부의 외침소리. 촬영 팀의 장비 정리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음들이 한데모여 나를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그리고 말하고 있다.
‘어서 와.’
‘영화는 처음이지?’
[ 책 먹는 배우님 – 2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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