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8)
28.
영화현장에는 보통, 감독의 베이스캠프 옆에 ‘현장 편집 팀’이 따로 설치된다.
찍은 데이터를 바로 편집 팀으로 보내 백업을 한 후, 필요 없는 장면을 잘라낸 뒤, 앞에 찍었던 컷과 붙여본다.
그리고, 감독과 배우들이 한데 모여 이를 확인한다.
“어땠어?”
“저는 좋았어요.”
“흐음, 살짝 시선이 튀지 않았어?”
“괜찮아 보이는데요?”
“아냐,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 번만 더 가자고.”
영화가 오래 걸리는 이유.
정말이지, 무한 반복이다.
하지만 조승희는 으레 있는 일인 듯, 어깨를 붕붕 돌리며 힘차게 외쳤다.
“자, 다시 갑시다. 다시!”
이 상황 자체가 재밌는 모양이다. 내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자 조승희가 물었다.
“왜 웃어?”
“아, 기분 좋아 보이셔서요.”
“응? 촬영장 재밌잖아?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곳이 어디 있어?”
“네. 맞습니다.”
확실히 조승희는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다. 또 이렇게 옆에서 직접 눈으로 보며 많이 배운다.
어떻게 하면 롱런하는 배우가 되는지.
그런 조승희에게 한만희 감독님이 농담을 던졌다.
“승희 씨. 집에 늦게 들어가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찍 들어가면 애 봐야한다고, 늦게 보내달라며?”
한만희 감독님의 농담에 현장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조승희도 화를 내기는커녕,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어우, 육아가 더 힘들어요. 촬영이 백만 배는 쉽다니까요.”
“큭큭. 나도 그 기분 잘 알지. 집에서 시나리오 붙잡고 있으면, 노는 줄 안다니까? 애나 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자! 오늘은 밤새도록 찍읍시다!”
“승희 씨 제발 그것 만은!”
분위기가 좋다.
드라마처럼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현장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주연의 그릇이 달라서일까.
[청춘열차>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자! 갑시다! 준비!”
“갈게요!”
“오디오.”
“스피드!”
“카메라!”
“롤!”
“1-1-7!”
딱!
슬레이트를 친 연출부가 사라지자마자, 한만희 감독이 신나게 외쳤다.
“액션!”
조승희의 움직임에 맞춰, 달리(이동차)가 출발하며 조승희의 움직임을 쫓는다. 발끝에서부터 시작한 프레임이 틸업(앵글이 위로 향함)되며 어느새 조승희의 옆모습.
턱 끝에서 잠시 멈췄다가, 조승희의 시선에 따라 앵글이 돌아가더니 공간이 점점 확장된다.
어느새 풀 샷만큼 넓어진 공간. 서 있는 나와, 배명우, 임명한 선생님.
‘피셔 일당’이 처음 만나는 풀 샷. 그리고 조승희의 대사.
“언제 도착했어?”
“아, 지금 막. 사부는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거야?”
“오케이!”
“오케이 입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스타일리스트들이 달려와 임명한 선생님, 조승희, 배우들에게 두꺼운 롱 패딩과 따뜻한 커피를 건네주었다.
“오빠 춥죠?”
영미 씨도 물론, 그 대열에 끼어있다.
“으으, 엄청요.”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모니터 앞에 모여들었다. 패딩 주머니에는 뜨끈한 핫팩도 들어있었다.
영미 씨, 센스가 좋단 말이야.
나는 핫팩을 꽉 쥐고,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영상을 확인했다.
괜찮은 거 같은데.
조승희의 표정도 좋다. 조승희가 입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괜찮은데요?”
“자 박수! 드디어 우리 조 감독님이 오케이라고 하십니다!”
“하하하!”
“이제 바스트 딸게요.”
다음, 이어진 바스트 촬영.
배명우가 옆에서 바람을 넣었다.
“벌써부터 슬슬 겁나는데?”
“왜요?”
“승희 씨. 또 병 도질 테니까.”
대사가 쓰이는 장면이라, 풀 샷보다 훨씬 정확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차례.
‘연기 결벽증’ 으로 소문이 자자한 조승희의 눈빛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음. 다시 한 번만 할까요?”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음에도 본인 연기가 만족스럽지 못해 두 번이나 추가촬영을 요구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가시죠.”
그리고 이 결벽증은, 임명한 선생님을 제외한 다른 조연 배우들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감독님, 어때요?”
“음,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가면 어떨까요? 명우 씨. 대사가 너무 늘어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피치를 올려서 해보면 어때요?”
저 놈의 연기 결벽증.
정말 집 가기 싫어서 환장한 것 마냥, 완벽한 컷을 요구한다. 배우도, 스텝들도 지칠 법도 하지만 조승희는 누구보다 쌩쌩한 얼굴이었다.
결국, 배명우는 네 번 만에 오케이를 받아내었다.
“승희 씨, 애 보는 거 진짜로 싫어하나보네.
이거 정말 늦어지고 있다. 이러다 해 뜬다고요.
하지만 재익이 형은 옆에서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이라 그래. 영화 망하면 그 덤터기는 감독이랑 주연이 다 뒤집어쓰니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작품 만들려는 욕심인거지.”
필모그래피에 추가되는 ‘내 작품.’
주연 배우가 느끼는 ‘작품’에 대한 욕심과 부담감을 알지 못하는 나는. 내 차례가 되면 어떻게든 원오케이를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계속되는 NG에 부담감을 느낀 조연들이 조금 기진맥진한 순간에 등장한 마지막 바스트 컷.
나.
“자, 갑시다!”
타석에 들어선 주자만루의 심정으로 앵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드라마 현장에서 본 적 없는 거대한 카메라가 내 쪽을 주시했고.
“액션!”
큐 사인이 떨어지자, 나는 앵글 안으로 들어서며.
“아이, 대장. 지금이 대체 몇 신데 이제 오는 거야?”
당당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눈빛은 강렬하게, 하지만 망고가 가진 특유의 양스러움과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툭, 던지듯.
“기다리느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결과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오케이!”
– 오케이 입니다!
무전기에서 곧바로 오케이 사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감독 대신, 조승희를 먼저 바라보았다.
공은 이미 날아갔다.
안타냐, 홈런이냐.
조승희는 커피를 홀짝이며 아무런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커피 잔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눈꼬리가 반달로 변하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말했다.
“좋은데?”
홈런이다.
그것도 만루 홈런.
“조 감독님이 오케이라고 하십니다. 다음 씬 갑시다! 다음 씬!”
당당한 원오케이.
조승희는 나를 바라보며 돌연, 고개를 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마치, ‘잘했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이야, 재희 씨. 집에 일찍 가고 싶나보네?”
촬영 감독님이 내게 다가와 엄지를 치켜드셨고.
배명우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이야, 우리 후배님! 한 번에 오케이야? 저 깐깐한 승희 씨가 칭찬하는 거 들었어?”
“운이 좋았어요.”
“아닌데? 완전 칼을 간 얼굴이던데.”
그 때, 조승희가 내게 가볍게 헤드락을 걸며 말했다.
“이 여우같은 놈!”
“아앗.”
“아니, 내가 늑대 새끼를 키우나? 얌마, 연기 좀 살살해. 옆에 있는 나 까지 다 죽이겠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속으로 삼켰다.
늑대가 아니라, 호랑이 새끼일지도 모릅니다.
*
암기, 소화, 분석.
내 능력.
대본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배역과 내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최적의 연기를 소화해낸다.
하지만 나는 이 괴랄한 능력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약점’을 대비해야했다.
바로, 액션.
[청춘열차>와는 다르게 [피셔>는 ‘액션’이 가미된 영화다.액션은 대본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물론 대역이 존재하고, 무술팀도 존재하고, 감독이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르지만.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또 기본적인 움직임을 내가 직접 구현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문제.
움직임에 발목 잡혀 연기가 죽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경기도 파주의 액션 스쿨을 찾았다.
물론, 내가 액션 배우의 전문적인 스턴트 기술을 익힐 필요는 없었다. ‘망고’ 캐릭터 자체가 강력한 무술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도 아니었고.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클래스는 실전A클래스.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있냐?”
기초체력증진과 체중감량을 포함한 와이어액션과 무기술 전문교육이 포함되어 있는, 실전 스턴트 강좌.
“미리미리 준비해두면 좋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체력관리 해야지. 너 지금 휴식기 아냐. 영화 촬영 중이라고.”
“다치지 않게 조심할게요.”
“퍽이나.”
차량 스턴트나 승마정도를 제외한, 전문적인 액션배우들이 소화하는 높은 난이도의 클래스.
처음에는 쉬엄쉬엄 몸도 만들 겸, 천천히 액션이나 배워두자고 시작한 일이 은근히 적성에 맞는다.
“생각보다 센스가 좋은데요?”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던, 베테랑 액션배우 김판호가 나를 인정했다.
“운동신경도 좋고, 무엇보다 겁이 없어서 금방 늘겠어요.”
재익이 형이 조금 답답하다는 듯, 무술감독에게 물었다.
“이런 배우 많아요?”
“잘하긴 하지만 저 정도 하는 배우들 생각보다 많아요. 대표적으로….”
“아니 그것 말고. 당장 촬영에도 안 쓰이는데, 굳이 이 멀리 파주까지 찾아와서 사서 고생하는 배우요.”
재익이 형의 질문에 김판호가 풉 하고 웃으며 턱수염을 긁적였다.
“있긴 한데. 대부분 기사 나가고 나면 그만두죠. 이미지 만들려고 하는 거니까. 근데 이정도로 근성 있게 하는 사람은, 적어도 저는 본 적 없어요.”
“들었지?”
나는 재익이 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일으켜 필드 중앙에 섰다. 그러자 재익이 형이 내게 소리쳤다.
“또 하게?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 너 내일 모레 촬영이잖아.”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해보죠.”
“아이고, 두야.”
재익이 형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나는 와이어가 연결되어있는 조끼를 걸치고 줄을 단단하게 동여매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손등에 떨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점프 자세를 취했다.
와이어액션, 고공낙하. 실전무술. 무기술.
현장을 정복하는 보다 완벽한 배우가 되기 위해서라도.
그저 잘생긴 흔해빠진 남자배우라는 이미지를 깨버리기 위해서라도.
진짜 호랑이 새끼가 되기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단련해 두면, 언젠가는 반드시 쓰인다. 그리고 이렇게 몸을 쓰고 있자니 확실히, 내 몸에 끼어있는 찌꺼기가 빠지며 몸이 가벼워진다.
“준비.”
무술팀 한 명이 반대편에서 와이어를 잡고 준비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 때 였다.
“야야, 재희야. 잠깐. 잠깐만.”
“네?”
재익이 형이 내 휴대폰을 들고 두 팔을 휘휘- 휘저으며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전화 왔다!”
김이 팍 새어버린다.
“나중에 받으면 안돼요?”
하지만 재익이 형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안돼. 조승희야.”
… 누구?
*
“왜 이렇게 물가에 버려둔 애 같이 느껴지지?”
“제가 애도 아니고.”
“그래. 물론 믿는데.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근데 정말 옷 안 갈아입어도 괜찮아?”
“괜찮아요.”
나는 카니발의 뒷자석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집 들어가면 문자 남길 테니까.”
그리고는. 쿵. 뒷자석 문을 닫았다.
“적당히 마셔!”
재익이 형의 애처로운 외침이 들려와, 나는 대답대신 손을 흔들어주었다.
[청담동 캐슬 블랙, 룸 No.3]조승희가 내게 초대장을 보내왔다.
늑대 새끼를 늑대 굴로 불러들이는데, 이유는 한 가지다.
먹잇감을 주려는 것.
검은색 츄리닝 세트에 롱 패딩을 걸치고 나온 내 프리한 사복패션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담동 어느 골목의 호화로운 시크릿 바. 캐슬 블랙.
[Castle Black]산란하게 수놓인 네온 샤인을 지긋이 바라보다, 숨을 고르고 내부로 발을 디뎠다.
하지만 가드에게 곧 바로 가로막혀버렸다.
“아.”
“예약하셨습니까?”
내 키 보다, 손바닥 반 뼘은 큰 가드의 등장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크흠. 아… 조승희 씨. 3번 룸이요.”
가드가 귀에 꽂힌 이어 마이크를 짚고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길을 비켜주었다.
“따라오십시오.”
일전에 소윤과 김균오를 따라 방문했던 ‘요코센’ 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지하 2층 정도를 계단으로 내려가자 쿵쾅거리는 비트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화악! 문을 열어젖히자 비트 소리는 더욱 강렬해졌다.
복도는 흑요석으로 만든 듯 반질반질 고급스러웠다. 그 복도 끝에 위치한 No.3
3번 방.
조승희 ‘라인’의 중심.
이 3번방의 문이 열리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어색한 분위기가 내 얼굴을 엄습했다.
시선들이 말해준다.
‘저 촌놈은 뭐야?’
열렸던 문이 닫히며 비트 소리는 게 눈 감추듯 사라져버렸다. 나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고, 최대한 여유로운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감독님도 아니고, 선생님들도 아니다.
‘연기 잘하는 놈이 갑이야.’
조승희가 말했던, 송문교가 내게 경고하던.
내가 알던 딱, 그 차가운 세상.
조승희, 곽철, 황미영, 유아름, 민주용, 주태호.
블랙 캐슬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수많은 젊은 스타배우들이 나를 주시했다.
몇몇 남자 배우의 인상이 팍 구겨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복장이 이게 뭐야?’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조승희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이야, 왔어?”
조승희가 함박웃음을 지어보인다.
나는 두꺼운 롱 패딩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 운동을 하다 와가지고. 복장에 예의가 좀 없습니다.”
그리고는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신인배우 도재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너희는 적이냐, 아군이냐.
[ 책 먹는 배우님 – 2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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