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29)
29.
곽철, 황미영, 유아름, 민주용, 주태호.
열거된 배우들의 순위를 나열하는 것에 의미가 없을 만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연기파 배우들.
일명, ‘조승희라인’, 혹은 ‘조승희사단’ 이라고도 불리며 술, 볼링, 스쿼시 등 운동도 함께 즐기는 것으로 알려진 사모임.
[조모임>별들의 잔치.
조모임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연기 잘한다는 것 말고는 공통분모가 전혀 없던 배우들이 한데 뭉쳐 조승희의 영화 시사회에 등장하면서 부터다. SNS를 하지 않는 조승희 특성상, 직접 공개한 사진보다 파파라치나 일반인들이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더 많이 돌아다녔고, 그 덕분에 오히려 역으로 유명세를 타버렸다.
이 무리의 중심, 조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여긴 도재희라고. 이번에 들어간 영화에서 만난 내 후배. 최근에 [청춘열차>라는 드라마 하나 끝냈고. 연기는…”
조승희가 숨을 한 템포 늦게 내쉬며 말했다.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는 씨익 웃는다.
늑대들의 소굴에 들어온 검은 츄리닝을 입은 새끼 늑대.
이런 내 모습이 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비주얼 훈훈한 연기 잘하는 후배’ 정도로 보였으면 좋았겠지만. 실상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불신 가득한 시선.
‘너 누구야? 뭔데 여기에 와?’
이미 터질 듯 팽배해진 텃세 속에, 발을 내딛었다.
“아무리 그래도 츄리닝은 좀 그렇다.”
그리고 주변의 불쾌한 공기에 쐐기를 박는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여기가 무슨 동네 편의점도 아니고.”
민주용이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조승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용아. 액션스쿨에 있어서 옷 갈아입고 넘어온다는 거. 내가 그냥 바로 오라고 했다.”
“그런다고 바로 오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무슨 동네 친구 만나러 PC방 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승희 형이 편한 사람이라도 이건 예의가 아니죠.”
“승희 오빠, 이건 주용이 말이 맞아요. 오빠야 편하다고 할지 몰라도 저희들은 처음 보는데 기본적인 예의는 차려야하는 거 아닌가요?”
차갑다.
원래 이렇게 적대적인건가? 텃세?
조승희를 제외하고 무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곽철이 내게 엄중히 경고했다.
“야 임마. 넌 뭔데 이 따위로 나타나서 분위기를 흐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지배적이다.
“아, 저…”
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조승희가 바락 소리 질렀다.
“야! 뭐하는 거야? 네들 적당히 좀 해!”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 얘 진짜 쫄았잖아. 큭큭”
“큭큭큭큭.”
“깔깔깔! 아! 배야!”
“적당히 하자니까. 다들 진지해지고 있어. 큭큭큭.”
“….”
난데없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참았던 웃음을 빵! 하고 터뜨렸다.
이거 뭐야?
조승희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키득거렸다.
“아고, 미안하다. 다 농담이야. 많이 놀랐냐?”
“….”
뭐야, 몰래카메라야?
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또 한 번 폭소가 터져 나왔다.
“깔깔! 저 분 진짜 놀랬나 봐요.”
“초면에 미안합니다. 저는 곽철이라고 합니다.”
곽철이 내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그 손을 마주잡았다.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
뭐야 이거.
*
[조모임>을 한 줄로 정의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말 많고 유쾌한 모임.
대부분이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처음 들어섰을 때의 그 날선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연신 웃음꽃이 터지며 유쾌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신입회원한테 하는 저희 전통이거든요.”
“제가 들어올 때는, 주용 오빠랑 철이 오빠랑 멱살 잡고 싸우기 직전까지 갔다니까요?”
아, 그러세요.
재미있는 점은.
내가 누군지, 유명한 배우친구는 있는지, 얼마나 인지도가 있는지, 뭐하던 놈인지 도통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출신학교와 회사, 나이 정도만 간단히 나눈 뒤 곧바로.
“선배가 뭐야 선배가? 그냥 편하게 형이라 불러. 아니면 말 놔도 좋고. 그냥 친구할까?”
“오빠죠? 흐음, 아무리 봐도 스물 여덟로는 안 보이는데.”
그게 끝이었다.
‘연기 잘해? 그럼 따질 것도 없이 내 친구야.’
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인지도의 편차, 학벌의 높낮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신인은 이렇게 해야 해, 라는 색안경을 낀 사람도 없다.
‘너도 잘 알겠지만, 부심 부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재익이 형이 걱정할 만큼 어렵고 깐깐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뭐랄까.
이들에게는 ‘조승희가 좋아하는 배우’ 라는 공통분모 하나면 충분해 보였다.
“승희 형이 데려왔으면, 믿을 수 있는 놈이지.”
조승희가 보장하는 일종의 보증수표.
이들이 유명한 연기 스타들이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본다면 특별할 것 없는 모임 자리다.
각자의 근황이 오가고, 쓸데없는 농담이 오가고, 술이 들어가고. 하지만.
“여기서 있었던 일은 딱 여기서만. 이거 하나만 약속해.”
“네.”
“우리는 이제부터 팀이야. 무슨 말인 줄 알지?”
가장 흥미로운 점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가운데 간간히 섞여있는 ‘작품’과 ‘업계’ 이야기다.
“얼마 전에 책 하나 들어왔는데, [만월의 밤>이라고. 재미는 있던데.”
“아, 그거 나도 들어왔는데. 너 할 거야?”
“모르겠어요. 확신이 없어요. 재미는 있는데 감독 전작이 손익분기점도 못 넘겼던데, 되겠어요?”
“네들 생각은 어때? 이거 되겠어? 안되겠어?”
자신에게 들어온 영화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기도 했고.
“중국 돈이 좀 찝찝하긴 해도. 공백기에 나갔다 오면 외화벌이도 되고 한국 팬들도 반겨준다니까?”
업계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가끔은 ‘판’을 만들기도 한다.
“회사에서 이번에 들어가는 작품 사이즈 좀 키워보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쉽지가 않아요. 승희 형 [피셔>들어가지만 않았으면, 승희 형이랑 같이 들어가는 건데.”
“크, 승희 형이랑 같이 들어가면 투자자가 줄을 서지.”
인맥을 이용해서 개런티를 올리는 것은 아주 가벼운 일이며, 각자에게 맡는 작품을 주선해주고 소개해주기도 한다.
“[리턴 브라더> 이 영화, 형 추천해 볼까요?”
‘인맥’이 좋으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이 바닥이다. 물론, 이것만이 모임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재희. 볼링 좋아해?”
“아, 볼링은 처음입니다.”
“그래? 그럼 승희 형이랑 같은 편 하면 되겠네. 승희 형이 제일 잘 치거든. 나갑시다!”
겉으로는 친목, 볼링, 스쿼시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니까.
확실히.
회사에서 설레발을 치는 이유가 있었다.
인맥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지만, 빨리 가는 ‘지름길’ 이기도 했다.
몰랐던 사실들도 아니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세계.
가진 자들이 뭉쳐, 더 거대한 권력을 만드는 새로운 곳.
조금은 불편한 진실을 두 눈으로 목도한 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정의의 사자라도 된 양,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런 곳인 줄 몰랐습니다!’ 라고 외친다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겠지.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조승희를 따라 캐슬 블랙에 발을 들인 순간.
내가 취하는 택지는 오직 하나다.
“주용이 형.”
“어 재희. 아까는 미안했다?”
야외 주차장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만월의 밤> 대본을 스포츠카 보조석 창문으로 밀어 넣는 민주용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까 [만월의 밤>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으셨잖아요.”
“그랬지.”
나는 빨간 스포츠카 보조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대본을 흘깃거렸다.
[만월의 밤> [86/100] (+7)그리고 민주용에게 말했다.
“제 생각엔 괜찮은 것 같아요.”
“오, 그래?”
동아줄이 내려왔는데, 굳이 뿌리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잘라내야 할지 몰라도, 그것이 지금은 아니다.
이들은 송문교로는 감히 비빌 수도 없는, 상상이상의 스타들.
철저히 이들 옆에서 이득을 취해야 한다.
그러면 아주 달콤한 보상이 올 테니까.
*
“예스!”
“호! 잘 하는데!”
처음 쳐보는 볼링이라 초반에는 좌우 모서리 핀만 때렸지만, 생각보다 볼링에 소질이 있었는지 9, 10레인에서 스트라이크를 연속으로 치기도 했다.
“처음 치는 거 맞아?”
“하하, 운이 좋았어요.”
“이거 자주 불러야겠네? 스쿼시는 어때? 해봤어?”
“해보지는 않았는데,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운동 좋아하는구나?”
함께 땀을 흘리면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조모임 멤버들과는 간간히 만나기로 약속하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민주용 님이 단체방에 초대하였습니다.] [조모임>의 단체 채팅방에 초대된 일도 사소한 일 중 하나다.다음 날 오후.
포털 사이트에 아주 짤막한 기사 한 줄이 올라갔다.
[무서운 신인 도재희, [피셔>로 조승희 사단 합류?]오채연 기자.
L&K에서 슬쩍 흘려주고, 오채연 기자가 스메싱을 때린 기막힌 공격이었다.
한만희 연출. 조승희, 임강택 주연의 [피셔>는 촬영 전 부터 화제를 모았고, 연관기사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곽철, 민주용, 유아름 같은 배우들의 기사에도 내 이름이 한 토막씩 실리기도 했다.
이슈에 이슈를 더해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것은.
지리멸렬하게 쓰이던 오래된 방법.
하지만 그 만큼 먹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도재희. 드라마에 이어, 곧 바로 천만 감독 차기작 발탁.] [[청춘열차>의 명품조연 도재희, [피셔>로 올 추석 전격 스크린 데뷔 예정.] [‘조승희 사단’ 연기파 배우 대열에 합류한 ‘작은 괴물’ 도재희.]드라마가 비는 동안의 공백기를 심심하지 않게 [피셔>와 [조모임>관련 기사가 메꾸어 주었고.
[청춘열차>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그리고
또 하나 더.
내 공백기를 오히려 사람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막강한’ 무기.
[피셔> 촬영 중. 쉬는 시간에 조승희가 나를 찾았다.“재희야.”
“예?”
조승희는 달콤한 사탕을 주머니에 숨겨두고, 하나씩 꺼내먹을 생각에 신난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요즘 스케줄 바뻐?”
“아뇨.”
아니. 어쩌면 선물을 주기 전, 산타클로스가 더 가깝겠다.
아주 귀중한 선물.
“너, 광고 할래?”
“예?”
광고.
“아름이 소주 광고 하는 거 알지? 이번에 계약 새로 하면서 다시 찍는데, 거기 상대 남자 배우로 신선한 마스크 찾는다더라. 얼굴은 몇 컷트 안나오겠지만. 내가 너 추천할까 하거든.”
조승희, 그리고 조모임.
‘판’을 움직이는 자들.
‘얘 어때요?’
슬쩍 말 한마디 툭, 던지기만 하면, 현실로 만드는 남자.
드라마가 끝나며 생긴 내 공백기를 너도나도 품앗이 해가며 채워주려고 한다.
‘팀’ 이니까.
이제야 ‘조모임’이 존재하는 이유를 해소한 느낌이다.
하지만 의문도 함께 따라 붙는다.
아무리 단순한 조연이고, 유아름이 같은 기획사라고 하지만.
이런 것 까지 가능하다고?
“자세한 건, 너희 회사랑 먼저 얘기해봐야겠지만.”
조승희가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아주 달콤하게 말했다.
“너 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얘기 한 번 해보고.”
… 이건 마치, 뭐랄까.
헤드윅에 나오는 슈가대디가 이런 맛일까.
권력의 맛.
웃는 얼굴로 휘두르는 칼.
그 칼날 위에 올라탄 나는 흥분감을 감추려 했지만, 쉽사리 감출 수 없었다.
“별거 아냐. 얼굴 한 두번 비추는게 전분데 뭐.”
조승희에겐 별거 아닌 일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다. 공식 모델이 아니라, 조연일 뿐이니까.
하지만 내게는 좋은 기회였고 대답은 그 어느 때 보다 빠르고 명확했다.
“네. 하고 싶어요.”
[ 책 먹는 배우님 – 2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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