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
3.
신인 배우란 외롭다.
아이돌처럼 개체수가 많지도 않고, 회사의 힘을 빌려 데뷔라는 꿈을 꾸기보다는, 바늘구멍 같은 오디션 기회를 스스로 잘 살릴 수 있는 개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
물론, ‘끼워 팔기’를 통해 탑 스타 한명을 팔아주며, 그 조건으로 신인 배우 한두 명씩 작품에 꽂아 넣는 특별한 ‘기회’도 존재하지만, 그 역시 이미지가 맞아야 하고, 감독의 눈에 들어야 한다.
이번에 우리 회사 L&K에서는 송문교를 [청춘열차>의 주인공인 이우진 역할로 집어넣으며, 총 세 명의 배역 T.O를 더 가져왔다. 비중 있는 남자조연 역할 하나와, 고정단역 남녀 한 명씩.
하지만 이 또한 회사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낙점된 인물들이 존재했고, 나는 그 중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청춘열차> 오디션을 보라고 내게 권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회사에게 내 실력에 대한 그 어떤 확신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달라질 예정이다.
“팀장님 바쁘세요?”
“응? 재희구나. 무슨 일이야?”
박찬익.
매니지먼트 1팀의 팀장이자, L&K의 배우 팀에서 어미새 역할을 하는 인물로, 송문교, 임주원을 비롯한 회사에서 요즘 가장 핫한 배우들의 스케줄을 담당한다.
물론, 이번에 들어가는 미니시리즈 [청춘열차>의 배역도 박찬익이 따왔다.
“[청춘열차> 때문에 그러는데요.”
“응? 그건 왜?”
“이번에 신인 배역으로 T.O 세 자리 나왔다고 하던데… 인원 확정 되었나요?”
즉, 박찬익 팀장의 추천이 있어야 [청춘열차> 감독 앞에서 오디션을 볼 수 있다.
“왜? 너도 관심 있어?”
“네.”
박찬익 팀장은 일에 대해서는 매우 공정한 편이다. 기회를 갖고 싶다면, 인지도에 관계없이 부여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그가 약간의 우려를 표했다.
“오디션이야 감독님이 보시니까 나는 상관없긴 한데… 문교가 주연으로 들어가는 드라만데, 괜찮겠어?”
송문교와 나는 함께 무명 시절을 겪었던 동기다. 만약 함께 작품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음, 날짜가 조금 촉박하긴 한데, 내일 모레거든? 대본은 읽어봤어?”
“읽어봤어요.”
“적극적인데, 좋아. 어떤 역할이 마음에 드는데?”
“‘김도훈’ 역할에 지원하고 싶은데요.”
[청춘열차>에서는 2명의 남자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우진 역과, 김강혁 역. 이우진이 원탑 주연이고, 김강혁은 일종의 서브 남주인 셈인데- 내가 말한 ‘김도훈’ 역할은 남주들의 고교 동창으로,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비중 있는 조연이다.“김도훈?”
박찬익 팀장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는 기회를 주는데 있어서는 공정한 편이지만, 그만큼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눈빛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너, 욕심 부리지 마.’
그 만큼 회사에게 내가 보여준 역량은, 턱 없이 부족하다.
아니, 실은 역량을 보여줄 만큼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그런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박찬익이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재희 네가 연기에 대한 열정이 많고, 비주얼도 좋고 이미지도 뚜렷한 점은 강점이야. 근데, 단점도 명확해. 너도 알지?”
“…..”
“그 역할은 1회에서 16회 모두 출연하는 고정 역할이야. 대사 량도 제법 있는 편이고, 다른 부분에서 러브라인도 있는 캐릭터야. 조금 벅차지 않겠어? 차라리 다른 역할 오디션을 봐서 카메라에 익숙해지는 게 어때?”
“오디션만 보게 해주세요.”
나는 최대한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도전하고 싶어요.”
이건 진심이었다. 물론, 연기에 쏟아 부었던 지난 시간이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은 아니었지만, 100% 대본에 흡수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내가 실패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연기에 대한 재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일 테니까.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정말 열심히 준비 할 자신 있어요.”
박찬익 팀장은 그런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네 뜻이 그렇다면.”
허락이 떨어졌다.
물론, 오디션에만 넣어주겠다는 것이지만.
“감사합니다.”
“그래, 열심히 해. 벅찬 기회다. 열심히 해서 잘 잡아 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재희 형도 [청춘열차> 오디션 보시나 봐요?”
“어?”
데뷔 2년차인 임주원이었다.
“오, 주원아. 촬영 벌써 끝나고 온 거야?”
나와의 대화와는 다르게, 박찬익 팀장의 목소리까지 하이톤으로 높아진다. 하지만 임주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예. 간단한 거였는데요 뭘.”
키는 작지만,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 것 같은 귀여운 외모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배우.
요즘 L&K에서 가장 밀어주고 있는 신인 유망주인 임주원은, 회사 입장에서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오디션을 봤다하면, 스텝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꾹꾹 찍어 배역을 물어온다. 그렇게 활동한지 2년 만에, 곧 있으면 주연으로 데뷔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소문도 들릴 정도.
말아 먹은 오디션이 몇 개 인지, 셀 수도 없는 나와는, 여러모로 위치가 다르다.
임주원이 내게 물었다.
“[청춘열차>에 김도훈, 그 역할 오디션 보시게요?”
“어? 어.”
“저도 그 오디션 보는데. 김도훈 역할로. 저랑 경쟁하시겠네요? 우리 열심히 해봐요.”
그리고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새끼가 얼마나 싸가지 없는 새끼인지.
박찬익 팀장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다.
마치, ‘네가?’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이곳은 그런 세계다.
실력 없으면, 선배고 후배고 다 필요 없는 세계.
이미지 좋고, 연기만 잘한다면 10년 20년 선배들을 재껴도 아무 말도 못하는 차가운 세계.
“재희, 긴장 좀 해야겠어? 흐흐흐. 어쨌든, 둘이 선의의 경쟁 한 번 잘 해봐.”
박찬익 팀장이 나와 임주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촬영도 없이 매일 사무실, 연습실에만 죽치고 있는 내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청춘열차 1회 대사는 눈을 감고도 술술 외울 만큼 머릿속에 꽉차있고, 김도훈의 캐릭터로 움직이라고 해도 디테일을 모두 잡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움직임들이 떠오른다.
나는 선배로서 지을 수 있는 가장 쿨 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해 보자.”
그래, 한 번 해보자.
*
[청춘열차>의 오디션을 보는 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남,여 신인배우들만 일곱 명이었다.그 중에서 임주원은 일종의 ‘연예인’ 이다.
임주원은 KTN의 주말, 일일 드라마에 조연으로 자주 출연했는데, 감독님들이나 조연출과도 인연을 만들어, 이제는 오디션을 따로 보지 않아도 섭외가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KTN에서 일일드라마나 계속 했으면 좋았겠지만, 본인이 미니시리즈를 하고 싶어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경쟁자가 되었다.
“형 준비 많이 하셨어요?”
“어? 그냥, 뭐.”
“아아, 형은 준비할 시간 많아서 좋으셨겠어요. 저는 일일 촬영 때문에, 대본도 제대로 못 봤는데.”
“….”
아, 그러세요?
이 부러운 새끼. 결국, 지 일 많다고 자랑 질이다.
오늘은 오디션이다.
우리는 청담동 샵에서 메이크업을 마친 후, 로드매니저가 사다 준 김밥을 점심으로 간단히 먹고 오후 2시에 SBC에 도착했다.
5층이 드라마국이었는데, 5층에 올라와보니 복도에는 오디션을 위해 온 다른 기획사 신인배우들이 가득했다.
여자 신인 배우인 조슬혜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이게 전부 경쟁자야?”
“아니요. 다른 배역 오디션도 같이 진행한데요.”
우리가 잠시 멀뚱히 서서 기다리자, 로드매니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곧 박찬익 팀장과 캐스팅 디렉터가 걸어 나왔다.
캐스팅 디렉터가 우리를 바라보며, 박찬익 팀장에게 말했다.
“저 친구들이야?”
“예”
“인물들은 하나같이 좋네. 좋아, 저기 들어가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캐스팅 디렉터의 안내에 따라 나와 L&K 신인배우 모두 ‘소 회의실’ 이라고 적힌 대기실로 들어섰다.
먼저 SBC에 도착해 있던 박찬익 팀장이 우리를 불러 모았다.
“메이크업 예쁘게들 했네? 긴장들 하지 말고. 자, 일단 전달할 얘기가 있다.”
모두의 시선이 박찬익 팀장에게로 꽂혔다. 박찬익 팀장은 종이 뭉치를 여러 장 들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거 봐.”
종이에는 김도훈 역을 포함한 [청춘열차> 단역들의 대사가 적혀있었다.
“이게 뭔데요?”
“지정연기다.”
지정연기라는 말에 조슬혜가 약간 발끈하듯 물었다.
“자유연기, 안 봐요?”
“어. 오전부터 오디션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딜레이 되고 있어서 자유연기는 생략하고, 지정 대사만 보기로 했다.”
“네?”
“오늘 오전 9시부터 오디션만 보셨단다. 감독님은 점심 식사도 못 하시고 오디션만 보고 있어. 우리가 이해해야지.”
하지만 조슬혜는 자유연기를 많이 준비해 왔는지,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 그래도요. 자유연기 본다고 해서 그거 얼마나 준비 많이 했는데요. 나, 이거 진짜 하고 싶은데.”
대사는 [청춘열차> 1회에서 4회 사이에 나오는 대사들이었다. 조연과 단역들의 대사라 그런지, 대사량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과 주고받는 대사들이라, 상대방 대사에 대해서도 숙지는 필요한 상황.
임주원도 조금 당황했는지, 입술을 물어 뜯으며 박찬익 팀장에게 물었다.
“이거, 꼭 다 외워야 하나요?”
“꼭 외울 필요는 없고, 보면서 해도 돼. 항상 신인들한테 하는 말이지만, 어설프게 외워서 연기 망치지 말고. 차라리 보고 제대로 해.”
조슬혜를 비롯한 다른 신인배우들은 황급히 종이를 붙들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불안한 탄식이 터져나왔다.
“난감하네 정말.”
“근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1회 대본만 간단하게 읽어보고, 2회는 아예 읽지도 않은 배우도 많았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총 4권의 책 대본을 모두 읽고 분석하는 배우가 몇이나 있겠는가.
그에 반해 나는.
“….”
머릿속에 인이 박힐 정도로 선명한 대사들을 드라이하게 떠올리며, 마인드 컨트롤에만 집중했다.
대사와 상황들은 모두 머릿속에 있다.
떨지만 않으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문이 열리며 FD와 함께 캐스팅 디렉터가 안으로 들어섰다.
“찬익아 시작하자. 먼저… 조슬혜?”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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