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0)
30.
조승희 기획, 유아름 주연. 도재희 조연.
조모임은 실력 있는 ‘내 사람’들을 서로 끌어주기 위한 모임이다. 내게만 존재하는 일종의 ‘특혜’라기 보단. 멤버들 다수가 이러한 ‘밀어주기’ 과정을 거치며 위로 올라왔고.
이제 ‘내 차례’가 왔을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냥 좋은 자리가 하나 생겼는데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보다 ‘내 친구’에게 주고 싶은 거다.
어차피 소주 [술김에>의 메인 모델은 ‘유아름’ 이고,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아 대사 한 줄 하는 조연일 뿐이다.
단순히 광고 조연 한 자리잖아?
오히려 묻고 싶다.
선의의 초콜릿 한 조각.
이거, 거절 할 수 있나?
“해야지! 무조건 해야지!”
박찬익 팀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나라고 아무거나 주워 먹다 체할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의할 점도 있다.
철저하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
내가 저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개’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조모임>은 내가 밟고 올라설 ‘도구’인데, 오히려 내가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정신 바짝 차리고,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뭐,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L&K 박찬익 팀장과 신속하게 진행된 광고주 미팅. 신인 조연 치고는 파격적인 출연료 협상.
“6개월에 이천이야.”
메인 모델도 아니고, 단순히 광고 출연자에 불과한 내가 이런 큰 금액에 계약하게 된 것은 오로지 박찬익 팀장의 능력이었다.
“첫 광고가 중요하거든. 다음 광고 때 개런티에서 발목 안 잡히려면 높게 불러야지. 광고, 계속 하려면.”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너한테 왜 소개해 준 거냐? 듣기로는 내정자도 있었다는 것 같던데.”
박찬익 팀장의 질문에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남 주기 아까웠나 보지.
“제가 투자할 가치가 있었나 보죠.”
햇병아리 신인배우. 나한테 뭐 뺏어먹을 게 있다고 술수를 부렸겠는가.
내게 날아온 뜻밖의 ‘화살’
이 화살은 시위를 떠나자 과녁에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오늘.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술김에> 촬영 세트장에서 유아름과 재회했다.
“오빠!”
내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는 여자, 유아름.
조승희, 임명한 등이 속해있는 국내에서 배우풀이 가장 넓은 기획사 ‘배우덩쿨’의 소속배우.
국립예종 연기과 출신으로 데뷔 5년 차의 탄탄한 구력을 자랑하는 올해 나이 스물일곱의 여배우.
조, 단역부터 시작해 데뷔 3년 만에 주연을 꿰찬,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성장했고.
반년 전, [술김에>의 소주 모델로 발탁되며 2017년에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오빠 풀잔!’ CF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이번 연장계약을 통해, 새 컨셉으로 촬영하게 되었다.
유아름이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낮에 보니까 되게 신선하네요?”
“큭큭, 그러게요. 저 추천했다면서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다 돕고 사는 거지. 나중에 오빠도 저 도와주셔야 해요.”
유아름은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물론입니다.”
“콘티는 봤어요?”
“아직요.”
“제가 오빠 좋아하는 상황이에요. 짝사랑 같은 거. 대기실에서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기실로 들어가 비밀유지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콘티를 받아보았다.
콘티 내용은.
짝사랑하던 오빠에게 술김에 고백하는, 사랑스러운 여자 후배.
“이제 그만 마셔.”
내 대사는 고작 한 줄이었다.
흡수고 뭐고 필요 없는 수준.
첫 장면에서 걱정스러운 내 대사와 함께, 적당히 취기가 오른 유아름에게 컷이 넘어간다.
“오빠, 나 오늘 할 말 있어요.”
궁금하다는 얼굴의 내 바스트 하나, 다음은 마주보고 있는 투 샷. 다음 컷트는 입술을 살짝 물어뜯는 유아름 인서트.
“나… 몇 번이고 생각해 봤는데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 타이트 바스트.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술잔에 담겨져 흔들리는 술 인서트.
전체 풀샷으로 변하며, 시작되는 유아름의 나레이션.
“말해버렸다.”
유아름의 떨리면서도 후련한 얼굴 타이트.
“… 술김에”
마지막, 사랑스러운 유아름의 표정.
술집 전체 풀 샷에 포커스 아웃되며, 소주 병 CG.
“간단하네.”
내 분량은 거의 없는 수준이나 다름었었지만 그래도 위안할 점이 있다면, CF 첫 시작이 내 바스트라는 것 정도. 그리고 CF 자체가 젊은 남자들을 겨냥한 듯 달달하다.
이거, 꽤나 남자들한테 먹히겠다.
“슛 가겠습니다!”
“가자. 재희야.”
연출팀의 외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트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에는 유아름이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한 젊은 남자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아, 재희 씨. 반갑습니다.”
내게 인사를 건넨 남자는 단편, 티저, CF 등 짧은 영상물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스토리 숏 아트센터’의 대표이자 젊은 CF 감독 이성훈. 이번에 그가 [술김에> CF의 외주를 맡았다.
이성훈이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성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악수를 나누어보니 손이 제법 거칠다. 하지만 거친 손과는 다르게 푸근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괴물 신인이라는 기사 읽었는데… 영광입니다. 오늘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자, 옆에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배불뚝이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하하. 이거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슴 명찰에 박혀있는 ‘동문소주’의 회사 마크.
소개를 하지 않아도 대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슈퍼 갑.
광고주다.
촬영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광고주의 의견.
광고주는 생각보다 깐깐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은 딱 하나.
“저보다 감독님이 전문가시니 알아서 잘 찍으시겠지만, 우리 아름 씨가 참 예뻐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이성훈 감독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여배우 예쁘게 찍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세트장 분위기는 전형적인 시골 대포집의 따뜻한 분위기였다. 메인 메뉴인 어묵탕은 근처 버너에서 팔팔 끓고 있었고, 나와 유아름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오빠 CF 처음이죠?”
“네.”
“그럼 각오하세요. 후후.”
그리고 유아름은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응? 뭘 각오하라는 거지?
“자 첫 컷트! 남자 바스트 먼저 갈게요!”
“갈게요!”
연출부의 외침에 주변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한 감정에 집중했다.
‘걱정스러움.’
유아름은 내 감정을 위해 카메라 뒤에서 내 눈을 맞춰주었다. 나 스스로가 한 없이 몰입한 지금.
“큐!”
사인에 맞춰 3초 정도 호흡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마셔.”
발성도, 목소리도 제대로 뽑아져 나왔다.
그다지 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인간 도재희’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지만, 유아름이 뭘 각오하라고 말 했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재희 씨! 조금 다른 느낌으로 갈게요!”
“네?”
“방금은 대학생 선배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말괄량이 직장 후배를 보는 느낌?”
“…. 아, 네.”
내 연기가 마음에 안들었다는 건가?
이번에는 조금 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마셔.”
하지만.
“좋아요! 이번에는 이런 거 어떨까요? 여동생으로만 보였는데, 갑자기 여자로 보인다.”
또, 재촬영 요구가 들어왔다.
무한 반복 촬영.
“오케이! 아 훌륭해요! 이번에는 조금 더 장난스럽게 웃어볼까요?”
이성훈 감독은 계속해서 ‘다른’ 연기를 요구했다.
또?
고작 15초 내외의 이 짧은 영상에 들어갈 소스는 왜 이렇게 많이 따는 거야.
“좋아요! 이번에는 조금 무뚝뚝하게 해볼게요.”
좋다고 하지 말라고.
어차피 다시 찍을 거면서.
마치 오케이인 것처럼 좋다면서, 뒷말은 꼭 다른 요구를 해온다.
‘매력적이게!’ ‘긴장된 얼굴로!’ ‘첫 사랑을 만난 것 같은 얼굴.’ ‘최대한 시크하게!’ ‘구름을 걷는 것 같이 행복한 얼굴!’
죄다 비슷비슷한 말 같은데, 모두 다르게 연기하려니 어렵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느낌을 살리며 충실히 행했고.
열 개가 넘는 소스를 찍고 나서야 완전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하아.”
나는 기운이 빠져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너무 NG를 많이 내버렸다.
하지만 유아름이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잘하시네요? 처음이라면서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네?”
“감독님이 원하는 얼굴 척척. 바로 표정이 나오네요? 신인이 제일 고전하는 부분인데. 솔직히 말해요. CF 전에 해본 적 있죠?”
그럴 리가.
“저 10번 넘게 찍었는데요…?”
“CF가 원래 그래요. 그 정도면 짧은 거예요. ”
짧은 거란다.
그리고 이성훈 감독이 내게 다가오며 이 칭찬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이야, 기사에서 하도 괴물, 괴물 하더니 기대했는데 정말로 괴물이네요.”
“….”
고오맙다.
이번에는 유아름의 차례.
유아름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이제야 CF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감이 온다.
CF가 힘든 이유.
“오케이! 아름 씨! 조금 더 푼수 같이 웃어볼까요?”
연출의 생각이 비교적 확고하게 정해져있어 길이 ‘하나’인 영화와는 다르게, 광고는 ‘여러’ 갈래. ‘여러’ 버전을 계속해서 찍는다.
“좀 더 활짝! 아이 좋아요!”
정말 배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의 극한을 뽑아내는 것 같은 느낌. 연기자보다는 모델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었다.
유아름은 프로였다.
카메라 앞에서 유독 빛나는 프로.
스무 번 넘게 촬영하면서, 전부 다른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더 이상 나올게 없을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이성훈 감독은.
“몽실거리게!”
알아듣기 힘든 괴이한 디렉팅으로, 유아름에게 또 다른 매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아름은 그걸 또 해낸다.
감독이 다른 요구를 해 올 때 마다 팔색조 같은 매력을 선보인다.
뭐랄까, 이게 천상 여배우구나 싶었다.
이걸 눈앞에서 보는 게 얼마나 아찔한 일이냐면.
유아름 같이 짧은 단발머리에 괄괄한 성격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단언코 말할 수 있음에도.
“오빠….”
연기에 빠져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오빠. 나 할 말 있는데요.”
소윤이나, 박청아 같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배우들에게는 맡을 수 없는 향(香).
고수의 몸짓.
“나… 몇 번이고 생각해 봤는데요.”
“….”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치명적이다.
양파 같은 여자, 유아름.
나는 확신한다.
이 CF, 분명 수많은 짤을 양산해내며 인터넷에서 전설적으로 회자될 것임을.
유아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짧은 쉬는 시간에 슬쩍 내게 와 말했다.
“우리 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예?”
“CF요. 오빠랑 저, 은근 케미 터지는 것 같은데.”
유아름이 고양이처럼 웃어보였다.
갸르릉.
[ 책 먹는 배우님 – 3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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