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2)
32.
그야말로 촬영 폭탄을 맞았다.
연거푸 이어진 [피셔>의 무박 2일 촬영에 ‘무비 노티스’라는 영화 전문 프로그램의 메이킹 인터뷰 촬영. 오채연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 또 다시 3박 4일의 [피셔> 촬영.
지방 로케이션 일정이 잡혀 [피셔>의 메인 촬영 팀이 빠진 뒤로 이제 좀 쉬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양치기 청년> 촬영이 잡혔다.
마치, 재익이 형이 나를 엿 먹이기 위해 계속해서 촬영장으로 등 떠미는 기분이지만.
“끌끌, 다 네가 자초한 거지.”
맞다.
작품 욕심 부린 것은 나다.
[피셔>의 촬영이 중반에 접어들고, 내 분량은 이제 몇 씬 남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다.새벽 다섯 시에 쓰러지듯 차에 올라 잠들었더니, 눈 떠보니 어느 새 전라북도 부안의 작은 시골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새벽에서 늦은 아침으로. 도심에서 읍내로.
완벽하게 뒤바뀌어 있는 주변 환경을 차창너머로 멍하니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로케이션 대박이네요.”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양치기 청년>이 텍스트로 뿜어내는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허름한 대포촌. 90년대 영화에서나 볼법한 휘갈긴 술집 간판들이 보이고. 현대식 카페가 아니라 실제로 영업 중인 다방이 존재하는 곳이다.
인근에 차량을 주차하며 재익이 형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촬영 인원은 저게 전부인가.”
[양치기 청년> 촬영팀.화물트럭을 소환하고 조명 사다리차를 불러 밤을 낮으로 바꾸는 [피셔>의 기적에 비해서는 [양치기 청년> 촬영 현장은 확실히 초라한 편이었다.
요즘은 영화에서도 투 캠(Two CAM)이 기본이라고 하였지만 카메라는 한 대 뿐이었고, 스텝도 열댓 명이 전부다.
인도 옆길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니터 두 대와 연출부가 들고다니는 슬레이트. 길거리를 점거중인 LED 라이트들만이 이곳이 영화 촬영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비가 대수일까.
누가, 누구를. 어떻게 찍는지가 중요한 거지.
“안녕하십니까!”
나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인사해 현장으로 들어섰다.
“도재희 선배님 오셨습니다!”
“오셨다.”
박진우 연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젊은 천재. 타고난 영화인.
현장에서 만난 그는, 요 며칠 잠을 설쳤는지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눈만큼은 빛내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도시락 먹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도 김밥 먹었습니다.”
박진우 연출이 두 손을 쫙 펼치며 주변을 가리켰다.
“어떻습니까?”
질문에는 섭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허름한 노래방의 돌출간판. 미용실 앞의 돌아가는 싸인 볼. 유리창에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는 대폿집. 모두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다. 그리고, 마치 영화 속 세트 같은 촌스러운 이름의 희망 다방.
어? 희망 다방?
“대본에 기재되어있는 다방 이름이.. 희망 다방 아닌가요?”
내 질문에 박진우 연출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주 잠깐 스쳐지나가는 문장인데, 그걸 기억하십니까?”
“아, 네. 장면이 인상 깊어서요.”
내 말에 박진우 연출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실은, 여기가 제 고향입니다.”
“아?”
“제 고향을 배경으로 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양치기 청년>의 주인공 허영탁이 본 세계는, 극화로 이용되는 ‘도구’만 다르지 실상 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독 본인의 이야기.
삼류 양아치의 삶과 젊은 영화인의 삶이 어찌 같겠냐만.
이들이 가지는 더 큰 세계에 대한 욕망과, 지리멸렬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본질적으로 같다.
인근에서 가장 큰 조직인 ‘상남파’에 스카웃되는 또래들과 달리, 극의 후반부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허영탁. 그 과정에서 맞고, 깨지고, 넘어지지만. 끝끝내 세상을 향해 통쾌하게 소리친다.
‘시발! 내가 나야!’
명문대학교를 나오고, 수석으로 졸업하며 박사과정을 권유받은 인재인 박진우 감독이 선택한 세상은, 좁은 문턱에 치열한 영화판.
닮은 듯, 다른 듯. 허영탁과 닮아있다.
“최곱니다 감독님.”
그리고 내가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도 조금 더 세밀하게 떠오른다.
[양치기 청년>은 단순히 허영탁과 박진우 연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나는 이 영화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남 다른’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재미난 일일 것이다.
“감독님을 믿습니다.”
“저는 도 배우님을 믿습니다.”
“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그 때, 인근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차영호를 중심으로 한 30대의 젊은 영화배우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깎듯 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차영호는 내 인사를 받아주었으나, 첫 만남에서 느꼈던 그 불편함은 여전했다.
“… 오셨네요.”
대놓고 나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언제든 치고 올라올 ‘틈’을 노리는 하이에나의 눈이었다.
“우선 분장 받고 오시면, 준비 끝내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희망 다방’ 안에 설치된 간이 분장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분장을 받으며 생각했다.
[양치기 청년> 배우라인에 퍼진 두 개의 반응. [청춘열차>를 본 사람들과 보지 않은 사람들.내 연기를 본 문성이 형이나, 몇몇 여자 단역배우들의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대형 신인’이 주연으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가지는 ‘편견’으로 나를 보았다.
‘얼굴로 주연하네.’
‘L&K라던데? 결국 회사 빨 아냐?’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내가 거둔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들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연기력.
단순히 저들보다 조금 뛰어난 인지도 때문에 주연을 한 것이 아님을 이들 앞에서 증명해야 한다.
간질거리는 분장을 모두 마치고 영미 씨가 건네준 옷을 입고 나오니,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도 배우님 제 옆에 앉으십시오. 리허설 가겠습니다.”
“네.”
“리허설!”
“리허설 갈게요!”
리허설.
나는 의자를 가져와 모니터 앞에 깔아두고 박진우 연출 옆 자리에 앉았다.
동선을 연습한 연출부가 내 대역을 서며 리허설을 시작했다.
“이번 씬이 시바이(*동선)가 많은 장면이라 풀 샷 하나 쭉 받아 놓겠습니다.”
“네.”
아침에 찍을 첫 장면.
허영탁은 용의 꼬리 대신, 뱀의 머리를 자처하며 자신의 동료들을 끌어 모은다. 동료를 모으는 대상들은 모두 빚이 있거나, 돈이 필요하거나, 어딘가 어리숙한 자들로 허점 가득한 조연급 인물들.
첫 번째 동료가 바로 동네에서 제일 큰 슈퍼의 아들. 그의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장면이다.
동선과 카메라 무빙을 숙지한 나는 카메라 앞에 서며 스텝들에게 또 다시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다 차영호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음 씬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번 씬에서는 카메라에 달려있는 HDMI 미니모니터로 내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들에게 처음 보이게 될 내 연기.
나는 내 상대역의 배우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긴장감과 승부욕이 뒤섞인 시선들이 스쳐지나가고.
“오! 도 배우님 지금 눈빛 좋아요. 바로 가겠습니다!”
이내 박진우 연출의 큐 사인이 떨어진다.
“오디오!”
“스피드!”
“카메라!”
“롤!”
“1-1-1.”
“원! 투! 쓰리! 액션!”
“액션!”
스텝들이 동시에 내지른 일갈에 주위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며 잠겨있는 슈퍼마켓의 철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야! 득춘아! 빨리 튀어나와라!”
“….”
“득춘아!”
드르륵!
문이 열리고 득춘이 역을 맡은 배우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자빠진다.
“어, 엇… 탁형.”
“흐흐흐.”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자빠진 득춘이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정말 사악해 보이면 안 된다는 것. 어딘가 어설픈 양아치 티가 나야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읍내의 정비공 ‘문성이 형’의 여자 친구와 바람이 난 득춘의 얼굴이 찍힌 사진.
“남의 여자 데려다 놀았으면, 티 안 나게 놀아야지.”
“허, 헉! 형이 그걸 어떻게…”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내가 모르는 일이 어딨니?”
“혀, 형이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어? 내가 있는 한, 읍내서 이딴 추잡한 짓하는 꼴은 절대 못 보지. 아니, 안 봐.”
남의 약점을 붙잡고 협박하는 양아치지만, 마치 읍내의 보안관이라도 되는 듯 뻔뻔하게 행동한다.
불안한 시선과, 뻔뻔한 시선이 오가고. 득춘이 별안간 나를 밀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나 역시 득춘이를 쫓으며 달려 나가고 한참을 달려 나가고 나서야.
“오케이!”
“오케이 입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박진우 연출과 무술 감독, 조연출이 내게 달려왔다.
“풀 샷은 그대로 쓰면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잘라서 쓸 거니까.”
“좋습니다.”
“그럼 다찌마리(*액션 씬) 전까지 상황 바스트로 받겠습니다.”
“바스트요!”
득춘 역할을 맞은 배우의 연기력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딱 그 뿐. 씬을 잡아먹을 만한 그릇은 못 되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득춘 역할을 맡은 배우 쪽에서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어설픈 악당을 연기하는 ‘허영탁’. 그리고 그 모습을 연기하는 도재희가 만들어내는 시너지.
연기 논란을 불식시키는 바스트 컷. 내게 쏟아지던 불신의 시선이 일순간 수그러들었다.
차영호의 눈도 덩달아 가늘어졌다.
‘이상한데.’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엔 다찌마리 갈게요!”
무술감독이 무술팀 두 명을 데리고 앞으로 나와 간단한 액션 시바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콧발로 차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갈비뼈 다 나가요. 앞 꿈치로 가볍게 턱! 밀어준다는 느낌만 주시면 돼요. 소리만 크게.”
무술 팀이 제시한 간단한 동작의 합을 맞추는 것은, 몇 번의 연습이면 충분했다.
영화 액션에서는 보다 큰 동작과 더불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몇몇 핀 포인트를 잘 잡아야 한다.
그 동안 액션 스쿨에서 몸에 슬었던 녹을 빼내며 신체를 단련했던 것이 효과적이었다.
카메라 달리의 움직임에 맞춰 뛰어, 도망치는 득춘이의 뒷덜미를 붙잡고 바닥으로 강하게 내팽겨 친다.
파악!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멱살을 움켜쥐며 대사.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득춘이 발악한다.
“으아아악!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손을 번쩍 들어 입을 때리려는 제스쳐를 취하다 일순간 멈춰 선다. 그리고 비열하게 웃으며 대사.
“흐흐흐. 너, 나랑 일 좀 하자.”
일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며 당황하는 득춘.
“… 일?”
“오케이!”
“오케이입니다!”
다음에 촬영할 씬은 ‘차영호’를 포섭하는 장면. 비슷한 종류의 여러 씬들이 빠르게 교차 편집되며 ‘패거리’를 꾸리는 허영탁의 모습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시퀀스.
씬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방앗간 김 사장에게 빌린 백삼십 만원을 갚지 못해 달아나는 차영호를 미친 듯이 쫓아가 때려주며 ‘일’ 하나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내용.
나는 묵묵히 카메라 앞에서 몸을 풀고 있는 차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내 인사에 차영호가 긴장이라도 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3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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