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3)
33.
희망 다방의 가파른 돌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오른다.
그리고 희망 다방 옥상에서 1m 정도의 좁은 폭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볍게 뛰어넘어는 두 사람.
차영호와 나.
“크악!”
착지하며 발을 헛디딘 차영호가 바닥을 구르고, 나 역시 어설픈 동작으로 바닥을 구른다.
기어서 도망치려는 차영호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머리로 들이받아 버린다.
콰앙!
“끅!”
차영호는 그대로 뒤로 쓰러지고 숨을 헐떡이며 대사.
“그러게 도망치긴… 헥, 왜 도망쳐… 헥.”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
“오케이!”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차영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물었다.
차영호는 이런 내 행동이 조금 당황스러운지, 말을 더듬었다.
“아, 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이 내게 넘어왔으며.
이 씬이 분기점이될 것이라는 사실을.
문성이 형을 포함한 총 4인방의 짧은 씬들의 촬영이 모두 완료 될 때 마다, 나를 향하던 의심의 눈초리는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냥 얼굴만 반반하기만 한 것은 아니네?’
‘뭐야? 실력파였어?’
‘잘못 봤나.’
그리고 그날 늦은 밤에 들어간 촬영.
졸졸졸 시냇물이 흐르고 주변은 온통 어두컴컴한 갈대밭에 동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내가 연설을 하는 장면.
“사는 거 좃 같지 않아?”
그리고 이 장면은, 줏대 높은 독립영화 배우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결정적 한 방이 되었다.
“‘상남파’ 새끼들이 동네 다 잡아먹고. 돈이란 돈은 죄다 긁어모으는데. 우리는 뭐 없는 개돼지 마냥 떨어지는 푼돈만 받아먹고. 양아치 새끼도 아니고 이게 뭐야.”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상남파가 몇 명인데.”
“….”
문성이 형의 대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허영탁, 나이 스물여섯.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삼류 양아치지만.
“시발! 그래도 남자 존심이 있지 존심이!”
자존심은 더럽게 쌔고, 쓸데없이 정은 많다.
“이 동네가 누구 거야? 어? 누구 거야? 득춘이! 말해 봐”
“…. 우리 꺼.”
“그래! 우리 거라고. 상남파 그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이 우리 구역 침범한 거라고. 네들은 존심도 없냐!”
“근데 형… 원래 상남파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어?”
“….”
득춘이의 질문에 나는 또 입을 다물었다.
마똥, 동구, 희철.
또래 친구들은 죄다 옆 동네 조직인 상남파에 스카웃되어 이 근방 지역을 모두 흡수하고 마치, 왕이라도 된 듯 행동하고 있다. 그 모습이 부러워 한 때는 술에 잔뜩 취해 상남파에 들어가고 싶다고 징징거린 일이 있었지만.
이럴 땐,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장땡이다.
“시발 놈이.”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득춘이 거북이 마냥 목을 움츠렸다.
“언제 적 일을 가지고… 시끄럽고. 이제부터 우리 동네는 우리가 먹는다.”
“… 뭐?”
“어떻게!”
“형! 상남파랑 붙겠다는 거요?”
지레 겁먹은 4인조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하는 나.
자, 조금 고민해 보자.
우리는 다섯 명. 저기는 최소 오십 명.
싸움이 되나 안 되나.
아아, 머리 아프다. 그러니 고민 하지 말자.
“소크라테스가 그랬잖아. 배고픈 개로 살래? 아니면 이 악물고 사람답게 한번 살아볼래?”
“배부른 돼지겠지…”
“이이이! 하자면 하는 거지 무슨 잔말이 이리 많아! 득춘이 너 이 새끼! 지금 당장 삼자대면 한 번 해봐?”
문성이 형의 여자 친구와 바람난 득춘.
이 자리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은 피하고 싶었는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주접들 그만 떨고. 그럼, 하는 거다?”
마지막, 허세 가득한 내 얼굴 타이트 바스트.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4인조의 그룹 샷.
“하자고!”
내 외침에 득춘이가 호흡을 그대로 받아먹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이잇! 그래! 해보자!”
“어차피 똥개처럼 살 바엔! 못 먹어도 고다!”
“하자아아!”
마지막, 드럼통 안에서 홀로 외롭게 불타오르는 불길 인서트 컷과 지미집으로 찍은 넓은 풀 샷이 붙여지니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다.
편집영상 감상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진짜 찌질이들 같네요.”
내 한 마디에 주변 스텝과 배우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푸하하하!”
“큭큭큭 맞아요. 어떻게 이렇게 맛깔나게 살리시지.”
내가 말했다.
“감독님 덕분이죠.”
기본적으로 카메라 각도에 따라 인물의 감정이 다르게 느껴진다.
인물을 아이레벨(*눈높이)에 맞추지 않고 위에서 밑으로 내려 찍으면, 관객이 주인공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강자가 약자를 바라보는 효과로 보이게 된다.
즉, 카메라 각도만으로 감독이 관객의 시선을 알맞게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박진우 연출의 실력은 훌륭했다.
컷과 컷 사이에 어떤 컷을 배치해야 조금 더 잔인해 보일지, 코믹해 보일지. 모두 알고 있다.
또 편집 때 쓰겠다며 불필요한 소스를 여러 개 찍어두는 현장과는 달리, 정말 ‘필요한 컷’만 찍는다.
그 말은. 감독이 이 씬을 통해 관객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역시! 박 진우 감독님!”
내가 호들갑을 떨자, 박진우 연출이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치며 내게 공로를 돌렸다.
“으아.. 부끄럽게. 아닙니다. 저는 다된 밥에 숟가락만 올렸을 뿐입니다. 배우님들이 다 살리셨죠.”
박진우 연출의 칭찬에 오히려 스텝들 쪽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도 배우님! 역시!”
“완전 연기 깡패십니다! 배역 그 자체 아닙니까?”
“캐릭터 완전 찌질한데, 은근히 눈빛은 멋있는거 알아요? 매력 도졌다.”
“오! 나만 본거 아니지? 도 배우님, 큐 사인 떨어지면 눈빛 완전 바뀌시는거?”
기류도 바뀌었다.
‘확신’으로.
비단,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스텝들 뿐 만이 아니었다.
문성이 형은 자기 일 처럼 기뻐해주었고,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모니터를 바라보던 여자 배우들은 나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조금 위험한 눈빛들인데.
“자! 수고하셨습니다!”
첫 날의 마지막 촬영이 끝나니 벌써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쪽잠을 자고, 내일 또 촬영을 해야 하는 4박 5일의 촬영 일정.
피곤할 법도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 듯. 배우 중 한 명이 내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어디 가서 한 잔 하시죠?”
이 술자리를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차영호였다.
“예?”
“크흠. 술 한 잔 하시죠. 어차피 저희 내일 오후 촬영이던데.”
“….”
이 사람, 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
근방의 술집이 대부분 문을 닫아서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안주는 편의점에서 조달했고, 술은 사지 않았다.
차에 넘치는 것이 소주니까.
“아니! 술이 무슨 이렇게 많이!”
나는 아예 소주 한 박스를 통째로 들고 숙소로 들어섰다. 재익이 형은 뒤따라 들어오며 안주가 가득한 봉지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차영호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제가 먹자고 했으니 제가 샀어야 하는데.”
“하하. 아닙니다. 제가 먼저 대접해드렸어야 하는데 오히려 늦었습니다. 편의점 음식뿐이라, 죄송합니다.”
“…..”
차영호는 내 말에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거 참. 미안합니다. 제가 도 배우를 오해했어요.”
나는 과자봉지를 까서 하나로 모으고,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며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네?”
“일단… 한 잔 할까요.”
차영호가 종이컵을 들어올렸다.
“건배 합시다.”
턱턱. 종이컵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렸다.
하지만 늦은 새벽, 창 밖에 그 흔한 가로등도 몇개 없는 황량한 분위기.
열악한 모텔 숙소 바닥에서 먹는.
과자에 깡 소주.
이것도 나름 분위기 있다.
무명 시절에 자주 먹던 단골 메뉴가 아니던가.
이거, 오랜만인데.
소주 한 잔을 기분 좋게 넘기며 과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차영호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처음엔 도 배우를 오해했어요. 얼굴이랑 회사 빨로 들어온 신인이라고.”
그러자 득춘 역을 맡은 배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사실… 저도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오늘 연기 하시는 거 보니까, 이게 웬걸? 눈이 크게 뜨였습니다.”
“허영탁 캐릭터가 은근히 독특한 캐릭터에 수준 높은 연기력이 요구되는 배역이라, 도배우 마스크만 보고 절대 소화 못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식견이 짧았던 거죠. 물론, 지금은 깊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천성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해주니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를 물어뜯기 위해 이를 드러냈던 하이에나들.
하지만 사소한 ‘오해’가 풀리자 이빨을 게눈 감추듯 감춰버린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지만,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이들 모두를 품고 작품의 ‘완성’만을 목표로 달려가야 하는, 주연배우다.
“제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주연이지만, 동시에 신인인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차영호를 포함한 배우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렇게 까지 나오는데,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그 때, 문성이 형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동안 분위기가 좀 머쓱해서 아무 말 안했는데… 이 친구, 제가 좀 아는데요. 누구보다 무명이 길었던 친굽니다. 아마, 오해하셨던 그런 놈은… 절대 아닙니다.”
결정타였다.
모든 신인배우들의 폐부를 찌르는 한 마디.
‘무명’
이 설움을 모르는 배우는, 절대 이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없다.
“무명이… 길었어요? 안 그렇게 보이는데.”
“길지는 않습니다. 대학생활과 군생활 제외하면 3,4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 아.”
“이제 아주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작품을 잘 만나서요.”
“그… 드라마 하셨다던?”
“네.”
장내의 모든 배우들의 시선이 조금 따뜻해졌다.
내가 생각만큼 건방진 놈이 아니라는 안도감.
내가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배우라는 것에 대한 위로.
여러가지가 뒤섞였지만, 충분히 호의적이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박진우 연출이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으으, 춥다. 이런! 벌써 시작하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감독님.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배우님들이야 오전에 푹 주무셔도, 저는 네 시간 뒤에 일어나 촬영해야 하니까요.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바로 잘 준비 하느라 늦었습니다. 하하!”
박진우 연출이 넉살좋게 웃으며 옆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들이마시더니,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아이고. 더 마시고 싶지만 너무 피곤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결국 박진우 연출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쿵쿵쿵!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지?”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방문을 열자 재익이 형이 양손 가득 흰색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형?”
“술자리 아직 안 끝났지?”
“네.”
“감독님은?”
“… 안에 계세요.”
“그래? 잘됐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서며 과자 봉지를 옆으로 치우고 흰색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니 황 매니저님. 이게… 다 뭡니까…?”
박진우 연출의 질문에 재익이 형이 말했다.
“국밥입니다.”
“예?”
“인근 가게가 문을 닫아서… 조금 멀리서 사오느라 늦었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재익이 형이 머쓱하게 말했다.
“내일도 촬영해야하는데, 과자로 소주 드시면 속 버리지 않겠습니까.”
역시, 베테랑 매니저.
어떤 자리에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다.
“매니저님… 소주도 잔뜩 실고 다니시지 않나. 준비성이 정말로….”
“허허, 그러게요. 무슨 요술 주머니 같습니다.”
“이거 촬영 기간 동안 술은 원 없이 마시겠습니다. 하하!”
재익이 형이 언젠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래. 텃세 같은 거는 없어 보였어?’
아마, 배우들 틈에서 내가 고생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한 행동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내가 잘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내가 편안한 촬영장을 만들기 위한 마음에.
거기다 감독님 까지 오셨으니, 더할 나위 없는 나이스 패스다.
굳이 자신이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것으로 내 점수가 함께 더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진우 연출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머리 국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이거… 조금 더 마셔야겠는데요?”
“하하하!”
나는 웃으며 재익이 형을 바라보았다.
이런 매니저, 또 어디 있을까.
“형, 고마워요.”
“짜식이…. 됐고. 내일 촬영에 지장 있을 정도로는 먹지 말고.”
엄마 같은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나는 풉, 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아이 참, 나 어린 애 아니라니까.
[ 책 먹는 배우님 – 3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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