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4)
34.
어우, 속이야.
조금 느지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끈뜨끈한 온돌 바닥 덕분에 잠은 푹 잤지만, 입 안이 말라버려 텁텁하다.
낡은 미니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벌컥 벌컥 들이켰다.
“크”
시간은 오전 아홉 시 이십 분.
숙소에서 촬영 현장까지 차로 3분 이내에 도착하기 때문에 따로 콜 타임은 받지 않았지만, 대충 내 차례가 몇시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다.
아직 2시간은 여유롭다.
하지만 나는 씻고 머리만 말린 뒤 곧 바로 숙소 밖을 나섰다.
‘차를 멀리해. 그럼 오래가.’
[피셔> 임명한 선생님의 말은 짧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현장에 미리 나와 공기를 마시며, 스텝들과 함께 호흡하고 스스로를 중요한 부품이 아니라 톱니바퀴 중 아주 작은 나사 하나라고 자부하시는 모습은.
원로 배우의 자존심보다는, 그가 영화 현장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알려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쫓아가야 할 롤 모델.
배우가 별건가?
현장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음.”
나는 재익이 형을 깨울까 고민하다 조금 더 자게 내버려두는 쪽을 택했다.
피곤할 텐데.
하지만 혼자 모텔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다, 모텔 입구에서 검은 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재익이 형과 딱 마주쳐버렸다.
“응? 벌써 일어났어?”
“형도요? 더 주무시지.”
“나야 차에서 자면 되니까. 근데 어디 가?”
“음, 산책 좀 하려고요.”
그러자 재익이 형이 알 것 같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아침 먹고 같이 가자. 태워줄게.”
커피에 토스트.
아침부터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리고 현장에 도착했다.
“왜 벌써 오셨어요?”
내게 쏜살같이 다가와 속삭이듯 묻는 조연출에게 나는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잠이 안와서요.”
그리고는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고 살금살금 모니터 뒤로 다가갔다.
모니터에서는 읍내에 들이닥친 ‘상남파’의 건달들이 카메라를 잡아먹을 기세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오, 몰입도 좋은데.
“오케이! 휴대전화 인서트 따겠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진우 연출과 눈을 맞추었다.
“어라, 도 배우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왔습니다.”
“벌써요? 아직 씬 들어가려면 멀었는데…”
“촬영하는 거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상남파’ 배우들, 촬영 감독님,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현장 근처를 거닐며 함께 호흡했다.
조금 일찍 분장실로 들어가, 분장도 받았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몸을 풀었으며. 이따금 카메라 뒤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을 직접 보며 감독과 호응하기도 했다.
조금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주연이 작품에 온전히 몰두한다는 인상을 스텝과 조연들에게 심어주는 것.
30년 넘게 롱런한 원로배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그리 쓸데없는 짓은 아닐 것이다.
“하! 끝났습니다.”
연출부가 아닌, 박진우 연출이 직접 내게 다가왔다.
“점심 식사 하고 진행하려는데, 식사하러 가시죠.”
“네.”
식당은 현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매생이국 집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 바로 오후 촬영을 진행한다는 공지가 돌았는지, 차영호를 비롯한 문성이 형이 느지막하게 식당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아, 푹 주무셨습니까?”
그리고 식당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저마다 쓰린 속에 맑은 국물을 떠먹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진다.
“크아! 시원하다. 속이 한방에 풀리네요.”
“처음에는 4박 5일이라서 시골에 유배 내려오는 느낌이었는데, 이거 공기도 좋고 지낼만한데요?”
“그렇죠? 음식이 너무 맛있어요.”
좁은 식당에 가득 찬 배우들과 스텝들 덕분에 사장님은 연신 싱글 벙글이었다.
나 역시, 매생이를 한가득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시원한 게 딱 좋다.
그 때, 나를 보며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차영호가 물었다.
“그런데 재희 씨는 언제 왔어요? 의상까지 입고 계시네?”
분장을 마치고, 의상까지 입고 있는 내 모습.
입을 열려던 찰나, 나대신 박진우 연출이 먼저 대답했다.
“전 씬 촬영할 때 오셔서 ‘상남파’ 배우들과 인사까지 다 끝냈습니다.”
조연들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 오.”
“그렇게 빨리?”
박진우 연출이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부지런하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거, 저들 입장에서 되게 얄미워 보이는 짓인가?
하지만 괜한 기우인 듯 보였다.
차영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반성하게 되네요. 우리 놀러온 게 아닌데 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분장 받으러 가겠습니다.”
이들에게 나는, 더 이상 ‘얄미운 주연’이 아니었으니까.
솔선수범.
현장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강압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실력’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주연으로서, 어느 정도 실력을 드러낸 셈이다.
은근히 저들에게 물은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 내 커리어를 걸었어. 너는?’
역시, 베테랑의 조언은 가치가 있다.
*
4박 5일의 [양치기 청년>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그 사이, 경쟁이라도 붙듯 현장에 일찍 나오는 것은 일종의 놀이가 되었다.
“오늘은 늦으셨네요?”
“아앗!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함을 유지했다.
촬영이 끝나면 매일 같이 술을 마셨고, 서로 형 동생이라 부르며 친해지고 나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나에 대한 불신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배우들은 어느새 나를 깊이 ‘신뢰’ 하고 있었다.
“재희야.”
“네?”
“형은, 진짜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다.”
재익이 형의 가장 큰 바램은,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촬영장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요즘이 정확히 그랬다.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촬영 현장에서.
이렇게 분위기 좋은 현장은 매니저에게 천국과도 같을 것이다.
나 역시 똑같은 생각이다.
그래.
앞으로도 요즘만 같아라.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건 내 욕심일 뿐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바닥은, 그리 따뜻한 곳이 아니다.
정글과도 같은 세계에서 ‘평화’는 아주 짧게 스쳐지나가는 ‘사치’이고, 언제든지 나를 잡아먹으려는 괴물들로 득실거린다.
‘나, 요즘 좀 괜찮은데?’
속으로만 삼켰던 이 자만심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을까.
세상은 아직 내게 ‘핏덩어리’라고 말하고 있다.
조금만 더 익히라고. 너는 아직 멀었다고.
계속해서 내게 말하고 있다.
“맞다. 좀 전에 [피셔> 조연출이 그랬는데, 오늘 ‘증권가K’ 역할 있지? 그 역할 특별출연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
“어? 그거 배우 따로 있지 않았어요?”
“사정이 있어서 바뀌었데.”
사정?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배우가 갑자기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누구로요?”
“윤민우.”
[피셔>의 최대 투자기업 JW미디어에서 창립한, JW엔터의 소속배우.마치, 게임 같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보스가 튀어나온다.
*
영미 씨는 윤민우의 열혈 팬이라도 되는 듯, 두 손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윤 프린스의 실물을 영접하다니! 무한 영광!”
그리고 ‘윤 프린스’라고 불리는 윤민우는, [피셔> 여자 스텝들의 비명을 몰고 다녔다.
“대박! 잘생겼어!”
“으으. 어떻게 사람 피부가 저렇게 곱지?”
윤민우.
별명은 윤 프린스.
백옥과도 같은 피부에, 여자도 울고 갈 곱상한 외모의 남자 배우.
‘급’을 구분 짓자면, L&K의 임주원 이상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초대형 신인.
2015년 데뷔와 동시에 귀공자를 닮은 고운 외모로 유명세를 떨쳤고 KTN의 주말드라마에서 30,40대 여성 팬층을 두껍게 쌓았다. 이후 굵직굵직한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필모를 쌓아가더니, 얼마 전에는 [청춘열차>의 경쟁작이던 [랜선 사랑>을 통해 주연으로서 이미지를 굳건히 다졌다.
신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인 배우로, 2018년 가장 기대되는 배우로 손꼽히며 내 이름과 함께 오르내린다.
확실한 것은, 나 보다 경력도 탄탄하고 인지도도 높다는 것.
“안녕하세요. 한만희 감독님! 신인배우 윤민우라고 합니다.”
“아, 얘기 들었어요. 엄 부장님 한테.”
윤민우.
그가 [피셔>에 ‘특별출연’ 으로 등장하며, 먹이 사슬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피셔>의 생태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놈은 일종의 두꺼비다.
황금을 물고 있는 금 두꺼비.
왜냐고?
그는 [피셔>의 최대 투자기업 JW미디어에서 창립한, JW엔터의 소속배우.
즉, ‘투자자’ 라는 빽을 두고 있으니까.
“아이고, 감독님. 잘 찍고 계십니까?”
윤민우의 뒤를 따라 들어온 덩치가 커다란 남자.
185cm는 될 법한 큰 키에 터질 듯한, 근육을 세련된 정장으로 감추고 있는 남자.
위압적인 덩치와, 강압적인 눈빛을 가지고 있는.
JW미디어의 투자대표 엄 부장.
한만희 감독의 이마가 조금 꿈틀거렸다.
“… 엄 부장님.”
투자 대표와, 감독의 만남.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랜만에 모인 동창회에서 반갑지 않은 동기를 만나기라도 한 듯, 분위기가 얼어있다.
차가우면서도, 불손한 기운이 감돈다.
엄 부장이 한만희 감독에게 말했다.
“잠시, 얘기 좀 하실까요?”
“지금은 촬영이 바빠서.”
“커피차도 불렀습니다. 저랑 ‘대본’ 얘기 좀 하면서 쉬었다가 촬영 하시지요.”
엄 부장과 한만희 감독은 멀찍이 서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 정리해보자.
투자자가 자기 회사 배우 한 명을 투자 영화에 꽂았다.
단지, 그 뿐이다.
투자자의 촬영장 방문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고.
투자자가 배우를 꽂아주는 일도, 흔한 일이다.
그리고, 특별출연 ‘증권사K’ 역할은 그다지 비중이 있는 역할도 아니다.
근데, 왜 이렇게 심각할까.
“….”
투자자가 은근히 내 쪽을 흘깃 거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다.
엄 부장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감독님. 제가 누누이 말씀 드렸잖아요. 조연 중에서는 저희 ‘민우’가 제일 빛났으면 좋겠다니까요?”
무슨 일일까.
“여기에 들인 돈이 얼만데, 쌩판 얼굴도 모르는 신인한테 몰아주면 어떡합니다. 제 체면도 있지.”
엄 부장이 손가락으로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캐릭터를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찍자는 것도 아니에요. ‘망고’ 대사에 멋있는 대사가 많던데, 조금만 나눠서 우리 민우한테 주자는 거죠.”
… 시발.
JW미디어의 투자자 대표는 ‘특별출연’ 윤민우와 함께 [피셔> 촬영장을 찾았다.
제 딴에는 얼마나 잘 찍고 있는지 확인할 겸, ‘윤민우’ 어깨에 힘을 실어줄 겸 해서 방문한 촬영현장.
하지만 막상 실상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윤민우’의 촬영 비중은 크지 않았고, 어느새 조연에서 가장 빛나는 역할이 되어버린 ‘내’ 모습이 배알 꼴렸던 것이다.
한만희 감독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말했다.
“대사를 나눠요? 그걸 누가 정합니까?”
“…. 예?”
“지금, 갑질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엄 부장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갑질이라뇨? ‘인지도’가 민우가 월등하니까, 우리 민우가 조금이라도 대사를 많이 하는 게 맞지 않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한만희 감독도 완고한 입장을 보였다.
“대사 몇 마디가 문제가 아닙니다. 캐릭터가 달라진다고요. 그러면 다 틀어지는거 모르십니까?”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다음 작품을 함께하자는 ‘천만’ 감독 한만희 역시, 물렁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감독은 접니다! 사람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배우 면전에 두고 이 무슨…”
둘의 언쟁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 때, 윤민우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거, 정말로 미안합니다.”
하지만 얼굴은 그리 미안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뭐랄까.
“엄 부장님한테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긴 했는데… 제 말을 안 들으시네요.”
속 빈 강정과 이야기를 나누듯,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이다.
“… 아닙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겉으로는 쿨한 척, 입 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지만.
속에서 내 목젖을 자꾸만 찌르는 ‘가시’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물론, 단순한 과대망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왜 모든 일이 저 놈 머리에서 나왔다고 느껴질까.
왜 저 순진한 얼굴이 뱀처럼 느껴질까.
“걱정 마세요. 저는 재희 씨 대사, 욕심 없어요. 재희 씨가 하시게 될 거에요.”
괜히 나를 견제하고 싶고, 내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서 안달난 놈처럼 행동할까.
윤민우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 아마도.”
아마도?
시발.
요새 좀, 평화롭더라니.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다.
이제껏 [피셔> 스텝들에게는 모자란 내 인지도와 실력에 대한 의문을 모두 잠재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투자자는 다르다.
연기력 따위는 관계없이, 돈을 많이 들였으니 자기 배우를 더 크게 집어 넣야겠다고 생떼를 부린다.
빌어먹을 인지도.
나는 말이 안 통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는 한만희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양보해?’
아니, 내가 왜 두 눈 멀쩡히 뜨고 내 밥그릇을 뺏겨야 하는데.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다음 행동은, 충분히 충동적이었다.
“감독님. 그냥 둘 다 찍으면 안되겠습니까?”
칼을 뽑았다.
[ 책 먹는 배우님 – 3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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