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6)
36.
스타니슬랍스키라는 사람은 몰라도.
‘메소드’ 라는 말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일종의 ‘연기론’을 정립하며 흔히 알려진 ‘메소드 연기’를 구축하신 분인데.
그 선생이 그랬다.
[내면으로 경험해본 적도 없고, 흥미조차 없는 것을 외형적으로 표현하려 하지 마라.지금은 나로부터 출발하라.>
‘남’을 의식한 연기는 당연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든 연기는 ‘나’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말이 있다.
‘햄릿’을 보고 싶어 찾은 관객은 ‘햄릿’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싶은 것이다.
두 가지의 차이는 심오하지만, 의외로 심플한 곳에 정답이 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책에 대한 모든 것.
하지만 결정적으로 ‘망고’는 허구의 인물이고, 나는 이걸 표현해야 한다.
연기하는 주체는, 나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자.
지금 내 속에 끓고 있는 이 뜨거운 무언가를 누르자.
그게 먼저다.
그리고 의식하지 말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시건방진 배우 놈과 투자대표의 반응 따위는 잊어버리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모두 지워버리고.
입에 완벽하게 달라붙어 있는 대사는 그저 거들 뿐, 배역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다.
찰나가 만들어내는, 이 짧은 퍼포먼스에
판세가 뒤집힐 수 있도록.
“후”
호흡을 잔뜩 머금었다.
평소처럼 스쳐지나가는 그런 가벼운 호흡은 아니었다.
단순하지만, 거침없는 ‘망고’의 호흡이었다.
연기는 ‘숨’ 에서 나온다.
호흡을 집어넣는 것 만으로, 분위기도 함께 돌변한다.
“액션!”
한만희 감독의 외침에 내 시야는 오히려 더욱 또렷해졌다.
그리고 완벽하게 몰두한 채 입 안에 빵을 우겨넣은 뒤, 눈을 흘깃거리며 무자비하게 메기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따악!
찰진 타격음이 터져 나왔고.
“악!”
“에라, 씨! 발라먹지 말랬지!”
내 찰진 욕설과 함께 입에 물고 있던 빵가루가 우수수 튀겨나간다.
메기는 얼굴에 잔뜩 묻은 빵가루를 짜증난다는 얼굴로 스윽 닦아내며 대사.
“염병, 형한테 말하는 꼬라지 좀 보게. 다 삼키고 말해 이놈 새끼야!”
그리고 나는 중지를 치켜들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베.”
그러자 메기가 나를 잡으려고 과장된 제스쳐를 취해보였고,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로 달아났다.
“장난은 그만.”
피셔, 조승희의 대사에 나와 메기가 일동 멈춰섰다.
나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피셔를 마주보았다.
피셔의 입에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장문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풀 샷과 동시에 잡고 있는 투 캠(Two Cam)의 리액션 바스트 컷.
느낌이 좋다.
말이 정확히 꽂히고, 움직임에는 힘이 실려있다.
그리고 조승희의 호흡을 그대로 받아먹으며, 소리쳤다.
“지랄하네!”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대장 혼자? 그럼 우리는?”
배신감. 이제껏 얼마나 고생했는데, 피셔는 자기의 신변이 최우선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개새끼.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치며, 눈을 부라리며 광기를 터뜨렸다.
“시발! 이제껏 대장 똥꼬는 우리가 다 닦았는데! 혼자 홀라당 튀어버리면 우리는 뭐가 되냐고!”
최대한 ‘망고’의 캐릭터와 흡사하게. 하지만 인간 도재희의 매력도 한껏 드러나게.
어쩌면, 미친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씨…”
하지만 나는 여전히 거친 호흡을 유지하며 리액션을 선보였다.
일종의 불꽃이 튀었고, 조승희는 내가 뿜어낸 열기를 그대로 받아쳤다.
“걱정 마. 너희도 모두 오게 될 테니까.”
마치 탁구 같다.
팡! 팡! 카메라 앞의 이 조그만 공간에서 연기라는 이름의 불꽃이 이리 튀고, 저리 튄다.
내가 불꽃이라면, 조승희는 차가운 얼음이었다.
뜨거운 불을 녹이듯, 조승희가 나를 안심시켰다.
“설마, 나 혼자 넘어갈 것 같아? 순차적으로 오게 될 거다. 제일 먼저 넘어가는 사람이 바로 나. 그 다음, 메기. 망고….”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미소와, 얼어붙듯 매력적인 눈빛으로.
그 기세에 홀려버린 나는, 눈에 서린 독기를 빼냈다.
선천적으로 다혈질 적인 성격의 ‘망고’는 타오르는 속도도 빠르지만, 식는 속도도 빠르다.
금세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바뀌며 말했다.
“아, 그런 거였어?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리곤, 연신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빵을 씹었다.
그러면 조승희가 내게 ‘희망’을 선물해준다.
“날 믿어.”
자신을 믿으라며. 입에 발린 감언이설로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절대 잡히지 않아, 반드시 성공 할 거야. 모은 돈으로 중국 가서 폼 나게 사는 거야.
내 동공은 점점 더 커진다.
확장.
찌릿찌릿한 전류에 감전되는 느낌이다.
“사람 죽으라는 법 없지.”
이거, 대박이잖아?
완벽하게 현혹된 나는 용수철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빵을 던지며 일갈!
“시바아아알!”
그리고 뿜어냈다.
인간의 멈출 수 없는 욕망을.
“넘어가서 존나 폼 나게 사는 거야!”
눈앞에 휘황찬란한 황금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술과 여자를 끼고 환각열차를 타는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소라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와, 씨이발.
이게 인생이야.
*
엄 부장의 크고 단단한 풍채는 흡사 ‘조폭’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그랬기에, 적당히 위압적인 말 한 마디면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업계에서 JW는 그만한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급물살을 타듯 상승된 현장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어불성설이다.
엄 부장은 느끼고 있었다.
‘뭐야. 대체 뭘 본거야.’
자신도 그 급물살에 휘말리듯 함께 붕 떠버렸으니까.
현장 분위기가, 윤민우가 연기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강한 억양 몇 개만 잘 살리면 전부라고 생각했던 대사 몇 줄. 어려울 것도 없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윤민우의 연기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칼을 누가 들고, 펜을 누가 드느냐에 작품이 달라지듯. 연기라는 이름의 요리가 바뀌어버렸다.
잘 빠진 인스턴트음식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일류 요리로.
그만큼 리얼하고 활어 처럼 살아있다.
‘쟤 뭐야 도대체?’
엄 부장은 오히려 모니터를 잡아먹을 듯 연기하며 괴물 같은 호흡을 내뱉는 신인을 주시했다.
특별출연이 확정된 직후, 책 대본을 유심히 읽던 윤민우가 말했었다.
‘이 대사, 제가 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단순히 연기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걔가 누군데?’
‘있어요. 이제 조연으로 막 활동하는 애’
[랜선 사랑>이 [청춘열차>에게 시청률을 따라잡히고 시청률 2위로 종영한 이유.단순히 ‘로맨스 전문 배우’ 인 송문교에게 밀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청춘열차>를 마지막에 캐리 한 것은 저 신인이었다.
‘치고 올라오는 신인을 어떻게든 밟아주려는 것.’
윤민우가 부리는 욕심을 알았지만, 어느 정도 눈감아주고 그 뜻에 편승하려 했던 엄 부장.
하지만, 오히려 역으로 당해버렸다.
‘이제 어쩌지.’
엄 부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미리 불러놓았던 기자도, 모니터를 보며 당황스러워 하긴 마찬가지.
“대체 뭘 쓰라는 거예요?”
“….”
엄 부장은 눈만 껌뻑였다.
“아! 좋아요!”
한만희 감독의 어깨가 넓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마치, 동창의 아들 보다 내 아들이 더 좋은 명문대에 들어간 것과 같은.
한만희 감독은 그와 흡사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래! 누가 뽑았는데!’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조승희가 반한 배우다.
도재희는 그랬다.
‘긴 무명의 신인’,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배우’
모든 편견을 뒤집어 버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누구라도 탐낼 만큼 매력적인 마스크는 덤.
“아! 이거 다시 안 찍어도 되겠네!”
한만희 감독은 일부러 엄 부장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자비한 팩트 폭행에 일그러지는 사람은 비단, 엄 부장뿐만이 아니었다.
빠드득.
이가 갈릴 만큼 분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윤민우는.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했다.
“씨! 발라 먹어!”
“큭큭큭큭”
모니터에 앉은 한만희 감독과, 스크립터, 스타일리스트, 매니저들, 조승희가 일제히 빵! 터졌다.
“아 찰지다. 찰져.”
“와, 저걸 저렇게 살리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신인 맞아요?”
하지만 유일하게 웃지 못한 사람은 윤민우.
불쾌한 기분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고, 이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조승희가 윤민우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채고 말을 걸어왔다.
“아프지?”
윤민우가 고개를 들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선배님.”
“대답해. 아파? 안 아파?”
“… 예?”
어때, 연기로 맞으니 아프지?
팩트로 때려버렸다.
조승희는 알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윤민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바닥이 그래. 데뷔 먼저 했다고 선배가 아니라. 연기 잘하는 놈이 선배야.”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승희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모르는 척 안 해도 돼.”
“….”
“지금 잘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욕심 부리지 마. 아무거나 뺏어 먹으려다 탈나는 수가 있다.”
세상에 욕심 없는 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실력’이 전제로 깔려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윤민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씨! 발라 먹어!”
또 다시 터져 나온 도재희의 일갈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존나 폼 나게 사는 거야!”
*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는 일종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큰 환호를 받았다.
조승희가 내 목에 헤드락을 걸으며 귀에 속삭였다.
“적당히 패야지. 애 쪽팔려서 죽으려고 하잖아.”
“악, 아파요.”
나 잘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여러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을 부여잡으며 간 떨린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재익이 형.
팝콘을 먹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영미 씨.
이가 훤히 드러날 만큼 크게 웃고 있는 한만희 감독.
그리고 나와 조승희의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 황급히 인상을 구기는 윤민우.
그리고 당황스러운 표정의 엄 부장 까지.
승부는 결정났다.
한만희 감독이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엄 부장에게 경고했다.
“그림 봤죠? 엄 부장님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엄 부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만희 감독이 불쾌한듯 말했다.
“쯧. 재희 씨로 갈겁니다. 책에 쓰인 그대로.”
그리고 두어 걸음 걸어가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멈춰서며 한 마디.
“앞으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다음 씬!”
“다음 씬 갈게요!”
“다음 씬 입니다!”
촬영은 순풍의 돛단배처럼 빠르게 다음 씬으로 넘어갔다.
한만희 감독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고마워요. 진짜 덕분에 내 자존심 제대로 챙겼네.”
“아닙니다.”
“아오, 투자자들… 가끔 이래요. 이렇게 라도 해야, 내가 딴짓 안 한다고 생각하나봐. 머저리 같은 놈들.”
나는 멘탈이 부서진 듯 보이는 윤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웃어보였다.
피식,
내가 선배야 새끼야.
*
물론, 재익이 형의 잔소리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나 아까 진짜 쫄았으니까.”
나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대답했지만.
최소한의 예의도 못 차리는 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평소엔 얌전하더니, 대체 왜 그런 거야?”
재익이 형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눈 뜨고 코 베이나요?”
“감독님이 알아서 해주셨겠지. 하다못해 나도 있고.”
나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글쎄.
하지만 난 원래 이런 놈인걸.
이런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변함없는 저 바다 만큼이나, 앞으로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윤민우에 대해 나가는 기사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윤민우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 다음 작품에 들어갈 것이다.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이 일련의 지저분한 짓들은 모른 채.
화면에 보이는 얼굴만 보고 대중들은 웃어넘기겠지.
불쾌하지만, 연예계가 가진 비극이며 진실이다.
이들도, 시청자도.
모두, 환상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 때 영미 씨가 말했다.
“오늘 윤 프린스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잖아요. 제가 느끼는 이 배신감은 어쩌죠?”
“네?”
“어떻게 그 순수한 얼굴로 그런 악독한 짓을….”
영미 씨는 모 막장 드라마에서,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심에 얼룩져버린 여주인공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휴대폰에 무언가를 잔뜩 쓰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팬 카페에 댓글을 쓰는 듯 했다.
아니. 게시글인가?
“저 이래봬도 윤 프린스 팬 카페 우수회원이거든요.”
“….”
윤 프린스의 실물을 영접할 수 있어서 무한 영광이라더니.
그 정도 였어?
영미 씨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배신당한 팬 심이 어떤 건지 알려줄게요.”
“….”
영미 씨, 무서운 여자였어.
[ 책 먹는 배우님 – 3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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