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8)
38.
중국 천진 시내로 들어섰다.
이곳의 분위기는 판교를 처음 보았을 때와 흡사한 느낌.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붙어있는 서울과는 다르게, 건물들의 크기는 압도적으로 크고 세련된 듯 보였지만. 군데군데 휑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고문화거리 인근 식당에 정차하여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왔다.
“와, 죽인다.”
입구부터 발길을 사로잡는 이곳.
‘드림 오브 시티.’
총 객실 200여개가 넘어가는 최근에 신설된 호화 리조트.
숙소임과 동시에, 촬영지로 쓰이는 이 고급 리조트는 촬영 대관으로 인해 B별동의 객실 칸은 전부 우리 팀으로 예약되어 있는 상태다.
본관 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복도는 청나라 황실 배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고풍스러운 목조 디자인이었고.
전체적으로 주황색과 황금색으로 디자인된 1층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했다.
이곳 역시, 비교적 한산한 오전에 부분 대관이 잡혀있는 상태.
“그림 장난 아니겠는데?”
어떤 그림으로 쓰일지 벌써부터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이정도면, 대충 찍어도 그림이다.
제작부가 배우들에게 객실 키를 나눠주며 말했다.
“우선 각자 숙소로 들어가 휴식 하시면 되고요. 저녁 식사는 감독님과 같이 하실 테니까, 따로 드시지 마세요.”
“네.”
질질질.
배우들이 일렬로 캐리어를 끌며 안내원을 따라 걸었다.
리조트 내부에는 멋들어진 인피니티풀도 만들어져 있다.
여기, 정말 좋은데.
“조금 있다 보자.”
“네. 쉬세요.”
숙소는 B별동 207호.
내부는 비교적 심플한 1인실이었다.
나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곧 바로 침대에 누워 [피셔> 책 대본을 펼쳐들었다.
“후아”
그리고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며, 내일부터 촬영할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리고 내게 펼쳐진 이 상황에 대해 웃음을 터뜨렸다.
“하, 참나.”
단연코 말하지만, 나는 중국어는 전혀 할 줄 모른다.
아는 중국어라고는 니 하오. 씨에씨에가 전부.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중국어 강사가 배우들의 발음 교정을 위해 함께 동행 했고 발음과 의미가 시나리오에 기재되어있기에망정이지, 이걸 가지고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嘿! 老板! 这个多少钱? (어이! 사장! 이거 얼맙니까!)”
대본에 기재된 대사는 기막히게 머릿속에 틀어박혀있다.
“….”
발음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나 스스로가 분간할 수 없으나, 생전 처음 뱉는 말이 입 밖으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귀신에 씌인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 대본에 씌인 건가.”
*
“아이고! 선생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녁 식사는 주연급 배우들이 모두 중국에 도착하고, 감독님들이 천진 항을 포함한 차량 액션 씬이 예정되어있는 장소 몇 군데를 확인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늦은 저녁이라, 멀리 갈 것도 없이 리조트 1층 뷔페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는데.
‘드림 오브 시티’의 로케이션을 함께 힘써준 중국인 홍보 이사도 자리에 동석했다.
이름이 쉬에츠엔 이라던가.
“…..”
모르겠다.
나는 중국어의 중자도 모르는 막귀니까.
하지만.
당연히 홍보 이사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본의 영향 때문인지 단어 몇 개는 마치 모국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조금 무서울 지경인데.
‘드림 오브 시티’ 홍보이사 쉬에츠엔은 나와 배우들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한 표정과 함께 하나하나 악수를 청했다.
“안령하셰요?”
그리고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는데, 한류스타 조승희를 보고는 중국어로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이제 내 차례.
쉬에츠엔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你在哪儿见过….?(어디서 봤더라…?)”
근데,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거, 대본에 있는 말이잖아.
106씬 천진 항 인근에서 사고를 친 메기가 공안에게 검문 검색되는 장면에서 쓰인 대사다.
쉬에츠엔은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쳤다.
“知道了! (알았다!)”
아마, 북경 TV에 방영 중이라는 [청춘열차>를 본 모양이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认识我吗?(저 아세요?)”
나조차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중국어로.
물론, 이것 역시 106씬의 메기 대사다.
그러자, 쉬에츠엔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oh…”
그 이후의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통역사가 말해주기를.
내 중국어 발음이 꽤나 정확해 놀랐다고 한다.
중국어 강사에게 물었다.
“저 발음 괜찮았나요?”
그러자 중국어 강사는 말했다.
“사실 현지인 수준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죠. 그런데, 성조가 정확해서 촬영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겠던데요? 혹시, 도 배우님 역할이 중국어를 매우 잘해야 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즉, ‘망고’의 수준에는 적당하다는 말이다.
이거 알면 알수록 신비한 능력이네.
조승희가 내게 물었다.
“언제 중국어 배웠어?”
“아뇨.”
“그래? 생각보다 잘 하던데.”
둘러댈 마땅한 변명이 생각나질 않는다.
“대본을… 열심히 봤을 뿐입니다.”
그러자 조승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던데? 그래, 중국어도 미리 배워두면 좋지. 인지도 더 쌓아서 중국활동 시작하면 개런티 앞자리가 달라지니까.”
“…”
중국 활동이라.
돈 벌기 위해 한국을 떠나, 일부러 중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생각해 본적 없다.
오히려 조금 더 원대한 꿈은 있었지만.
‘할리우드’
만약에 말이야.
아예 외국어로 제작된 대본을 흡수한다면, 내 외국어 실력에 도움이 될까?
유명 미국드라마나, 영국드라마의 영어 책은 대본마켓에 가도 즐비하게 올라와 있다.
만약, 이것들을 모두 흡수한다면?
생각해 본적 없지만…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해외진출도 단순한 ‘꿈’은 아니다.
“어차피 한국 아니면, 중국이랑 일본인데. 언어는 미리 준비하면 좋잖아.”
나는 점점 피가 뜨거워지는 흥분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짐짓 겸손한 척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욕심을 숨기지 못했다.
조승희도 한 수 접어야 하는 동양인의 무덤과도 같은, 할리우드.
내가 할 수 있을까.
*
다음 날.
중국 로케이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천진 항 인근의 해안 도로로 이동했다.
오늘 이곳에서는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차량 스턴트 액션 씬을 촬영한다.
프러덕션 팀이 현지에서 구성한 엑스트라 150명. 엑스트라 차량 40여대. 스턴트 차량 10여대…
차량, 폭발 특수효과, 액션 시바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스케일 큰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영화 로케이션의 기본은 섭외다.
천진 시와 중화영상위원회, 인근 경찰서의 촬영 협조를 받아 도로 일부가 완벽히 통제되었다.
도로에는 차량이 일렬로 준비되어있었고. 스텝들은 각자의 장비를 챙겨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 무술팀은 엑스트라 차량을 배정하고 감독님과 무술감독님은 액션 콘티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배우들은 스텝 버스에서 분장을 받았고, 연출부는 렉카에 차량을 실었다.
“자! 빨리 빨리 준비합시다!”
분주했지만, 왁자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맡은 바 소임을 정확하게 캐치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인다.
가장 화려한 액션이 들어가는 만큼, 현장에는 비장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촬영 내용은 스케일에 비해 간단하다.
임강백(검사)을 포함한 한국 경찰들에게 쫓기던 ‘피셔’ 일당은 천진항 해안 도로에서 차량 사고를 당하고.
차량은 갓길에 쳐 박히게 된다.
간신히 차량에서 빠져나온 일당은 곧 바로 달아나려 했지만 쇄도해오는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인다.
그 틈에, 피셔는 혼자 달아나게 되고. 피셔를 제외한 일당 모두가 일망타진 된다.
“자! 모여 보시죠!”
헤드급 스텝들과, 배우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무술 감독이 말했다.
“승희 씨야 타고난 액션배우시라 걱정은 없는데. 재희 씨는 어때요? 이런 거 좀 해봤어요?”
이런 거.
합을 맞추고 액션 씬을 찍는 것.
[양치기 청년>에서 했던 액션만으로는 해봤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겠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액션 수업은 조금 들은 적 있습니다.”
“음, 그래요? 시간이 없어서 조금 빠르게 진행할 거니까 하는데 까지는 최대한 해보자고요. 일단 저희들 하는 거 한번 보세요.”
무술 대역 배우들의 액션 시바이가 시작되었다.
구석에 찌그러진 액션 차량의 운전석에서 기어 나오는 스턴트가 내 역할.
제일 먼저 달려드는 형사와 강하게 부딪히고. 뒤로 구르고… 재빠르게 자리에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한 명, 두 명, 쓰러뜨리지만 역부족.
옆에서 날아드는 발차기에 맞아 쓰러지고….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대역의 움직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피식, 미소 지었다.
이거, 재밌겠다.
*
“좀 더 세게 밟으라고!”
메기의 외침에 내가 발작하듯 경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빵빵!
“我艹(시발!)! 닥쳐 좀! 가고 있잖아!”
넓은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며 차량과 차량 사이를 추월한다. 하늘에서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내 차량 뒤로는 중국 공안 차량과 임강백의 SUV가 빠르게 따라붙는다.
“시발! 어디 한번 죽어보자!”
나는 결심이라도 한 듯, 차를 엑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앙!
공안 차량이 내 차를 들이받으며 시야가 돌아간다.
핑그르르르르르.
넓은 풀 샷에서 차량이 회전하며 갓길에 범퍼를 콰앙! 들이박고 그대로 정차.
연기가 피어오르는 차량.
핸들에 머리를 쳐 박은 나는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열고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철푸덕.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나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시야가 뿌옇다.
귀에서는 삐— 알 수 없는 이명이 들리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파악! 충격과 함께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컥!”
나를 몸통으로 들이받은 형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고.
나는 핏물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로 박치기.
쾅!
형사가 기우뚱하며 쓰러지고,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야아아아아! 이 개애새끼이이들아!”
미친 듯이 포효하며 달려오는 형사 한명에게 시원하게 잽을 먹인다. 콰앙!
턱 끝에 주먹이 제대로 틀어박히고, 빠르게 주먹을 회수하며 왼손으로 어퍼컷.
빠각!
하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부지불식간에 내 면상에 발차기가 날아들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헥, 헥….”
그리고 그런 내 머리 위로 임강백의 구둣발이 떨어진다.
“끄윽…”
내가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들려고 하자, 임강백이 다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드디어 잡았다. 이 암 덩어리 새끼들.”
“끄어억…”
나는 눈을 희번득하게 떴다.
빗물에 잔뜩 젖은 채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임강백 때문이 아니다.
내 곁눈에 들어온 달아나는 조승희의 모습 때문이다.
피셔,
내 대장.
내 우상, 내게 주었던 희망. 황금, 내 성공.
내 모든 것이!
나를 버리고 홀로 달아난다.
나는 소리쳤다.
“이! 시바알 새끼야아아아!”
하지만 또 다시 내려찍는 임강백의 구둣발에 내 일갈이 쏙 들어가 버린다.
“컥, 커억…”
“어디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속이 아려온다.
“하악, 하악….”
참을 수 없는 극한의 분노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오지만.
내 눈은 오로지 사라지는 조승희의 뒷모습만을 주시했다.
떨어지는 강우기의 빗물도, 분노를 제어하기엔 역부족이다.
개새끼.
죽어버려!
.
.
“오케이!”
그리고 떨어진, 오케이 사인에.
온 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하아….”
무술 감독이 내 쪽으로 제일 먼저 달려와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주었다.
“읏.. 감사합니다…”
“재희 씨. 액션에 군더더기가 없는데?”
“후, 괜찮았나요?”
“괜찮다마다!”
한만희 감독님이 직접 수건을 들고 내게 달려왔다.
“어디 다친데 없죠?”
“예? 괜찮습니다.”
“모니터 보고 진짜 다친 줄 알았잖아요.”
그러면서 기분 좋은 듯 소리쳤다.
“연기도 잘해, 외국어도 잘해. 액션도 잘해. 대체 빠지는 게 뭡니까? 자! 우리 도 배우를 위해 박수!”
“와아!”
한만희 감독의 외침에, 힘찬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얼떨떨한 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연기, 외국어, 액션.
이번 중국 현지 촬영을 통해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조승희가 닿아있는 곳 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봐도 좋겠다는 확신.
[ 책 먹는 배우님 – 3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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