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39)
39.
왜 해외촬영이 힘들다고 하는지는 첫날부터 알았다.
이건 마치, 생방을 코앞에 앞두고 있는 드라마나 다름없다.
우천 시나, 촬영을 재개하지 못할 때는 조금 휴식을 취할 법도 한데.
“이거 실내 씬으로 변경하고. 111씬 이랑 114씬 촬영 날짜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해.”
정말, 뭐라도 찍어낸다.
그래. 기간이 정해져있는 해외 촬영의 경우 기간 안에 못 찍게 되면 문제가 생기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서두릅시다!”
“….”
죽을 것 같다고요.
마치, ‘이리 와서 연기해!’ 라며 누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촬영장에 끌고 다니는 듯 했지만.
감독님이 이렇게까지 서두르시는데, 배우들이 어쩔 수가 있나. 다 소화해야지.
“후우-”
촬영장에선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던 조승희 조차 지친기색으로 변한 로케이션 4일 차.
나는 모니터 뒤 의자에 앉아 롱 패딩을 이불마냥 덮은 채로 흘러내릴 듯한, 다크써클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거, 티 많이 나겠죠?”
“오빠 어제 잠 설쳤죠? 이 정도면 연결 튈 것 같은데. 분장으로 가려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가려질지 모르겠네. 아이 참! 잠시 눈 위로 떠보세요.”
나는 눈을 위로 한껏 치켜떴고, 분장 팀이 내 눈 밑에 뭔가를 덕지덕지 바르기 시작했다.
으아, 간지러워.
설상가상 메이킹 필름을 촬영하는 스텝은, 이 우스꽝스런 모습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카메라에 담으며 연신 웃고 있다.
“큭큭크”
“…”
아이, 좀.
저 초상권 없습니까.
촬영 현장은 ‘드림 오브 시티’ 1층 로비.
“자! 가볼까요?”
촬영에 한창 열을 올리던 그 때, 기차화통이라도 삶아 먹은 듯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엄 부장이었다.
JW미디어 투자대표 엄 부장.
“… 왜 또 왔어.”
위풍당당한 발걸음은 여전했지만.
“….”
처음 보았을 때 느꼈든 그 특유의 오만함은 사라진 모습이었다.
오히려, 숙련된 영업사원 같은 얼굴이다.
“으흐흐.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의 손에는 웬 박스가 하나 들려있었고 제작부들이 줄지어 박스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한만희 감독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이고, 감독님. 타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리고는 박스에서 피로회복 음료와 강장제 한포를 꺼내 한만희 감독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십시오.”
“… 아, 예.”
“감독님.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희 영화를 위해 이렇게 힘쓰시니, 존경스럽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따위는 잊은 채 한만희 감독에게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한만희 감독 역시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엄 부장은 오히려.
“어이, 어이! 빨리 다들 나눠드리라고.”
뻔뻔한 얼굴로 제작부를 독촉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지.
“….”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엄 부장은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전과는 눈빛이 조금 달랐다.
뭐 묻은 강아지 마냥 적대심을 드러내던 이전과는 다르게.
오히려 애지중지 키우는 새끼라도 되는 듯,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희 씨, 분장 수정 중이신가 보네요?”
“… 예? 아, 예.”
“요즘 연기 평이 아주 좋던데요? 마지막까지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느끼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오늘이 중국 마지막 촬영이죠? 촬영 끝나고, 저랑 커피 한잔 합시다.”
“…”
내가 왜.
“단 둘이서.”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렸다.
뭐야, 도대체.
*
내 촬영 분량이 모두 끝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피셔일당’의 촬영 분량이 끝난 것이지, 조승희나 임강백은 중국에 나흘은 더 있어야 한다.
조승희가 장난스럽게 우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나도 재희 따라 한국 가고 싶다. 요즘 따라 우리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요. 감독님 저 한국 보내주시면 안돼요?”
“엑? 언제는 육아보다 현장이 좋으시다면서? 껄껄껄.”
한만희 감독은 껄껄거리며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재희 씨. 고생 많았어요. 정말로.”
“감독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국 가서 봅시다.”
“네. 감독님.”
“어서 가요.”
나를 향한 스텝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로써, 당분간 [피셔>와는 작별이다.
뭐, 한국에 돌아가서 크로마 스튜디오에서 차량 씬 CG 촬영과 나레이션 녹음 일정이 잡히긴 하겠지만.
그 동안의 일정을 미루어 볼 때,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고생했다.”
재익이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후, 뭔가 좀 후련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꼈다.
장장 3개월 가까이 달려온 [피셔>는, 내게 많은 것을 선물로 준 작품이다.
내가 처음 찍은 스크린 데뷔작이면서 동시에.
천만 감독 한만희, 탑스타 조승희와 임명한이라는 롤모델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우연히 알게 된 외국어에 대한 기막힌 능력까지.
거기다…
“아이고! 커피 한 잔 하자니까.”
… 엄 부장 까지.
엄 부장은 나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와, 차키를 흔들며 말했다.
“타세요. 공항 까지 태워다 드릴게.”
“아, 저희는 스텝 콤비 타면 되는데요.”
내가 리조트 주차장에 서있는 중형 콤비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엄 부장은.
“아이, 참.”
내 캐리어를 뺏어 들며 자신의 렌트카 트렁크에 실어버렸다.
“제가 너무 태워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리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뒷문을 열어 내게 자리를 권해주었다.
“… 뭐야.”
재익이 형을 바라보았는데, 재익이 형은 약간 미심쩍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맞춰주자는 의미였다.
재익이 형이 보조석에 앉고, 내가 뒷좌석에 올랐다.
“자, 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공항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투자자가 내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내 머리로 계속 고민해 봤지만, 알 턱이 없다.
그리고 그 대답은.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들린 공항 내부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들을 수 있었다.
“자, 여기 우리 도 배우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매니저님은 카페라떼.”
“….”
“씹을 거리는 안 필요해요?”
“아, 네. 괜찮습니다.”
왜 이렇게 착하게 구는 거지.
엄 부장은 무척이나 들뜬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흐흐, 마시세요.”
엄 부장의 이런 태도에, 재익이 형이 얼굴을 조금 딱딱하게 굳히며 선을 딱 그어버렸다.
“엄 부장님. JW가 엔터 사업도 하고 있으니 염려 차 드리는 말씀인데요. 혹시 재희에게 관심 있어서 그러신 거라면… 아직 저희랑 계약기간도 많이 남았고…”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엄 부장 역시 칼같이 대답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얼굴로 커피를 권하며 말했다.
“우선 목부터 축이자고요.”
“….”
쪼로록.
그리고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달달한 딸기 스무디를 양껏 들이키고는 엄 부장이 말했다.
“저번 일 때문에 조금 서운하게 느끼실 수도 있는데. 저희 그렇게 양아치는 아닙니다.”
아, 그러세요.
재익이 형이 물었다.
“제가 자리를 피해드려야 하나요?”
하지만 엄 부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앉으세요. 숨길 것도 없어요. 어차피 매니저님도 들으셔야 하는 얘깁니다.”
나를 자기 회사로 빼가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엄 부장의 말. 재익이 형과 내 시선이 부딪혔다.
나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재익이 형은 어떤 얘기를 할지 대충 감이 온다는 얼굴이다.
재익이 형이 물었다.
“혹시, 투자 제안을 하시려는 겁니까?”
재익이 형의 질문에 엄 부장이 엄지와 검지를 강하게 튕기며 말했다.
따악!
“비슷합니다. 대화가 빠르겠네요.”
엄 부장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변하고는 말을 이었다.
“재희 씨. 우선, 저번 일은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예?”
“인천이요. 제가 무례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엄 부장은 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이 바닥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기 싸움도 벌이기도 하고. 가끔은 판을 들었다가 그냥 놓기도 하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일전에는 제가 재희 씨 연기를 보기 전이라… 뭣도 모르고 심술을 좀 부렸습니다. 민우가 저희가 키우는 배우기도 하고, 기회를 좀 줘도 되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했는데?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날. 윤민우고 뭐고, 재희 씨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놀랍게도 엄 부장의 말에는 꽤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인천에서 있었던 갑질 논란, 윤민우.
다른 걸 다 떠나서.
내 연기 이후에 ‘배우 도재희’에게 궁금증이 생겼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엄 부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확고하다.
“재희 씨. [피셔> 촬영도 끝났는데, 스케줄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직 촬영 중인 영화가 하나 남았습니다.”
“음, 그러시군요. 툭 터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바닥에서는.
서로가 원하는 것만 같으면.
“다음 달 6월 즈음에 저희 회사에서 미니시리즈 하나를 제작할 예정인데.”
“….”
“거기에 재희 씨를 주연으로 쓰고 싶습니다.”
어제의 적도,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다.
엄부장이 내게 미끼를 던졌다.
*
자, 던져진 미끼.
이걸 받아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이제 철저히 내 의사에 달렸다.
엄 부장이 말했다.
“드라마 종영 시기와 [피셔>의 개봉 시기가 묘하게 맞아 떨어지죠?”
드라마가 종영 예정인 9월과, 추석에 개봉하는 [피셔>.
이것 역시 의도된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내’ 인지도를 불리고,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방식.
대중들에게는 비싼 광고료 안들이고도 두 배의 각인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제작사에서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조승희나 임강백에게 드라마를 제안할 수는 없으니. 가장 적합한 사람은 ‘나’ 인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가 뭘까.
“진짜 이유가 뭡니까?”
가만히 놔둬도 어느 정도의 ‘흥행’이 보장되어있는 [피셔>의 흥행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 질문의 의미를 간파한 엄 부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일종의 여지를 달라고 표현할까요?”
“여지?”
“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JW미디어는 엔터도 운영하지만 그 기반은 결국 제작입니다. 실력 있고 유망한 배우가 눈앞에 있는데, 제 한 순간의 실수로 놓쳐버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즉, 자신에게도 여지를 달라는 것이다.
실수를 반성하고, 나와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여지를.
“제 제안이 굉장히 이상한 것도 압니다. 불과 며칠 전에 그렇게 못살게 굴던 사람이, 한 순간에 바뀌었으니까요.”
하지만 엄 부장은 딱 하나만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재희 씨가 얻게 될 이익만 생각하세요. 그 어느 제작사도 지금의 재희 씨에게 미니시리즈 ‘주연’을 보장하지는 않을 겁니다. 미니시리즈를 통해 당장 치솟을 인지도. 거기에 [피셔>의 흥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덤. 이것만 생각하세요.”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제안이다.
하지만, 너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덥석 물어버릴 수도 있는 달콤한 과실.
만약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이라면?
내가 입 꼬리를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물건도 안 보여 주고 팔려고 하십니까.”
장사의 기본이 안 되어있네.
주연이라면, 내가 덥석 잡을 줄 알았나 보지?
“아… 대본은 보셔야죠. 그래도 KTN 공모전 당선작이라 퀄리티는 있을 겁니다. 일단 한국 들어가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피셔>가 개봉되기 전에야 그 누구도 내게 ‘주연’을 제의하지 않겠지. 엄 부장 말이 맞다.하지만, [피셔>의 뚜껑이 열리게 되면 상황은 급격하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들은 결국 장사꾼들.
내 몸값이 쌀 때 데려다가 [피셔> 직전에 최대한 단물을 빨아먹으려는 심보로 보이기는 것은 과한 비약일까?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우선,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예. 그럼 저는 화장실을 좀…”
엄 부장이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화장실 코너로 사라지는 엄 부장의 뒷모습을 확인 한 재익이 형이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후-. 이거 너랑 관계를 가지려는 거야. L&K와의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너를 JW로 데리고 올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도 포함된 거라고.”
“또 최대한 제 몸값이 쌀 때 뽑아먹으려는 의도도 숨어 있을 테고요?”
“….”
내 솔직한 토로에 재익이 형이 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 목적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너에게 좋은 기회인 것도 사실이야. 이렇게 빨리 미니시리즈에 주연으로 도장 찍을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으니까. 일단, 같이 고민해보자.”
‘배우 도재희’와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말 뒤에 숨겨진 여러가지 칼날들.
나는 이 칼날의 궤적을 정확히 인지해야만 한다.
“한국 들어가서 대표님이랑 상의 해봐야겠다.”
이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우선, 열매가 탐스럽게 익기를 기다리는 것.
아, 중요한 것 한 가지.
착각하지 말자. 엄 부장이 내게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는 것.
결국, 패는 내가 들고 있고 선택은 내가 한다.
그리고, 프로의 선택은 결국 ‘돈’으로 말한다.
[ 책 먹는 배우님 – 3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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